[Opinion]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 [영화]

글 입력 2023.02.10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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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포스터.jpg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를 만나 시공간을 공유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들과 마음을 공유하지는 못한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냐는 영지 선생님의 질문에 400명이라고 대답했던 은희는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은희는 마치 철장 속에 갇힌 벌새 같다. 벌새가 1초에 90번씩 날갯짓을 하듯 은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또 세상으로부터 이해받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치지만 좀처럼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다. 그러나 은희의 삶에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들은 은희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철장 밖으로 나오게 한다. <벌새>(김보라, 2018)는 열네 살의 은희가 마주한 1994년의 세상과 그 세상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해 가는 은희의 모습을 고요하게 그려낸다.

 

 

 

가깝고도 먼, 멀고도 가까운 사람들


 

우리는 보통 한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을 가까운 관계라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은희와 한 지붕 아래 함께 사는 가족들은 은희와 가까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은희와 마음을 나누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은희와 단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단절감은 은희가 이들에게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된다. 은희의 마음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과 무관심이 만들어낸 상처로 가득하다. 은희는 자신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가족’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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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인물은 바로 엄마이다. 은희의 엄마는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은희와 가장 ‘가까워야 하는’,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은희와 가장 가깝기를 기대받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임신해 있는 동안은 아이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고, 대개 아이가 태어나면 주 양육자의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은희와 엄마의 관계는 그렇게 가깝지 않다. 떡집을 하는 엄마는 항상 지친 모습을 하고 있고, 쉬는 날에도 무기력하게 방안에 누워만 있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엄마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은희는 엄마와 가까워야 하는 만큼 엄마에게 더 깊은 거리감을 느낀다. 심부름을 다녀와서 실수로 한층 아래에 있는 집을 찾아가 열리지 않는 문을 붙들고 애타게 엄마를 부르는 은희의 모습과 계속되는 은희의 부름에도 돌아보지 않고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는 엄마의 뒷모습은 은희와 엄마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을 보여준다.

 

은희는 가부장적인 아빠에게도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은희에게 권위적인 아빠는 서로 마음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색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다. 은희의 오빠 대훈은 어쩌면 은희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대훈은 우등생이라는 이유로 아빠의 총애를 한 몸에 받지만, 은희에게는 틈만 나면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기껏해야 한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자신을 때리는 오빠에게 대항하기는커녕 숨 쉴 시간을 달라고 말하는 은희는 이미 오빠의 폭력이 익숙한 듯하다.

 

은희는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사람들과의 진정한 관계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회복하려 하지만, 이마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자친구 지완은 은희와 사귀는 도중에 몰래 다른 여학생을 만나고, 단짝 친구 지숙은 은희와 도둑질을 하다가 걸리자 은희의 아빠가 일하는 가게를 문구점 주인에게 일러바치고, 은희가 좋다며 따라다니던 후배 유리는 은희와 입까지 맞추고서는 새 학기가 시작되자 은희를 모르는 척한다. 결국, 소중하게 여겼던 관계들의 붕괴로 인해 은희는 또다시 상처를 받는다. 신뢰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고 자신의 의지와 달리 관계가 비틀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세상을 은희는 미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세상은 이해의 영역 아닌 사랑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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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은희가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을 나누는 사람은 바로 한문 학원의 영지 선생님이다. “선생님. 여기 사는 사람들은 왜 현수막을 거는 거예요?” 은희가 영지에게 철거민들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은 세상을 향한 은희의 순수한 관심이 공식적으로 표출되는 첫 순간이다. 은희는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인물이다. 그래서 은희에게 세상이란 자신을 아프게 한다고 무조건 미워할 수만은 없는 애증의 대상이다. 은희는 겉으로는 마치 비행 청소년처럼 담배를 피우고, 콜라텍에 가고, 도둑질을 하면서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세상에 불만을 표시하지만, 세상을 향한 은희의 애정은 쉽게 감춰지지 않는다. 이는 영화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무언가를 응시하고 주변을 관찰하는 은희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행여 자신의 가장 순수하고 여린 마음이 다칠까 그것을 미움이라는 포장지로 덮어버렸던 은희가 영지에게 던진 한 줄의 질문은 영지를 향한 은희의 단단한 믿음을 보여준다.


은희에게서 세상에 대한 애정을 느낀 영지는 은희가 방황의 시간을 끝맺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 영지의 이 한 마디는 집을 빼앗긴 철거민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은희가 알 수 없는 세상일에 멋대로 답을 내리는 자신의 오만함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그동안 은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세상을 이해해야만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세상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려운 일들이 점점 늘어가는 삶 속에서 은희는 상처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은희는 벗어날 수 없는 상처의 굴레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향한 미움을 키워온 것이다. 영지를 통해 자신의 마음에서 미움의 감정을 발견한 은희는, 그것이 자신의 상처를 곪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었음을 깨닫고 순수한 마음 그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성숙한 사람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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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에 따르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사랑해야 하고,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움직이는 손가락을 쳐다보는 것은 영지가 알 수 없는 세상을 살아낼 힘을 얻는 방법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종종 우주의 점 같은 존재인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일 때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손가락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영지가 작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그런대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계속해서 상처를 받으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세상을 붙들고 방황했던 은희는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는 영지를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은희가 자신을 비난하는 가족을 향해 “나 성격 안 나빠”라고 소리치며 발악하고, 자신을 때리려는 오빠에게 눈을 부릅뜨고 격렬히 대드는 모습은 자신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은희의 최초의 반항이다. 그렇게 은희는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세상과 자신을 분리했던 철장의 문을 스스로 열고 세상으로 날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은희에게 영지의 죽음이란


 

은희의 안식처였던 영지의 죽음은 은희가 이겨내야 하는 마지막 성장통이다. 영지는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세상을 떠난다. 그 누가 다리가 무너질 줄 알았겠는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로 은희는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은희가 영지의 방에서 창문에 붙은 영지의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거나 두 손을 펼쳐 손가락을 움직여 보는 행위는 은희가 실감 나지 않는 영지의 죽음을 용기 내어 마주하는 방법이다. 마음속에는 그대로 남아있는 영지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은희에게 슬픔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묘한 감정을 가져다준다. 은희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얼마 전 외삼촌을 떠나보낸 엄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데, 이때 영지의 죽음은 관계의 회복으로 승화된다. 영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은 은희가 자신과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던 엄마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고, 각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은희와 엄마의 관계가 상실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회복되어 갈 미래를 암시한다. 일터에 나가는 엄마를 뒤로하고 혼자 쓸쓸히 식어 빠진 감자전을 먹던 은희는 이제 엄마와 함께 식탁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전을 먹는다. 은희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은 예전과는 달리 영지만큼이나 따뜻하고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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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가 무너져내린 성수대교를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은 단순히 영지의 죽음에 대한 은희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전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한 은희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예전의 은희라면 영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영지의 죽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왜 일어나야 했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지를 통해 세상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란 걸 알게 된 은희는 자신에게서 영지 선생님을 빼앗아간 세상을 더는 미워하지 않는다. 은희는 영지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데, 그때 은희는 비로소 눈물이라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영지의 죽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장 투명한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연습을 한 은희는 이제 세상을 온전히 사랑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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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은희는 수학여행을 가는 날 들뜬 채 운동장에 모여 있는 학생들을 나지막이 둘러본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아닌 애정 어린 따스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은희의 모습을 보니, 영지가 편지로 은희에게 꼭 알려주고 싶어 했던 삶의 진실은 결국 은희에게 가닿은 듯하다. 

 

이렇게 상처투성이였던 은희가 세상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사실 은희만의 개인적인 성장담이 아니다. 은희가 사는 1002호를 비추던 카메라가 줌 아웃되며 숨 막힐 듯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의 전경을 보여주는 영화의 첫 장면은 은희의 이야기가 곧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비록 상처받을지라도 빛나는 순간들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결국 그 상처를 딛고 일어나 점점 어른이 되어간다. <벌새>는 어쩌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치밀하고 섬세하게 관찰하여 매일매일 계속되는 인생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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