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좋은 삶 - ‘라마 씨, 퇴사하고 뭐 하게?’ 계남 작가

글 입력 2023.01.3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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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는 여행지 역시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고 직장이다. 계남 작가의 그림책 『라마 씨, 퇴사하고 뭐 하게?』의 주인공은 안데스산맥에서 관광객과 사진 찍어주는 일을 하는 라마다. 매번 관광객의 요구를 들어주며 사진 찍어주는 일에 지친 그는 퇴사를 꿈꾼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 라마는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을 안고 새로운 세계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본다. 계남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펼쳐지는 그 세상을 보며, 멋지고 새로운 것은 힘겹게 용기를 냈을 때야 그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림책 속 라마처럼 퇴사 후 남미 여행을 떠났던 계남 작가는 여행을 마치고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아트샵 ‘토도비엔’을 운영하며 나다운 삶을 사는 중이다. 어느덧 퇴사 후 9년, 회사에서 지낸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용기를 내어 마주한 회사 바깥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작가의 본명이기도 한 ‘계남(桂男)’에는 ‘달 속에 사는 선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 뜻처럼 자신만의 중력에 따라 살아가는 계남 작가를 지난 27일 만났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첫 그림책 이야기와 함께 어딘가에 속하거나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은 삶에 대해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라마, 퇴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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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마마르카 ©계남

 

 

『라마 씨, 퇴사하고 뭐 하게?』 책 출간을 축하드려요. 많은 일러스트 작업을 해 오셨지만 책 출간은 처음이시죠. 어떻게 내시게 된 책인가요?


회사를 그만두고 언젠가는 책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는데, 이번에 좋은 제안으로 책을 내게 되었어요.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이 참 많았어요. 그러다 회의에서 담당자분들에게 제가 퇴사 후 라마 그림을 많이 그리게 된 이유를 들려드리니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처럼 퇴사한 라마가 나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도 수많은 동물 중 라마가 주인공인 이유가 궁금했어요.

 

제가 8~9년 전 퇴사 직후 6개월간 남미로 배낭여행을 떠났어요. 거기서 인상적인 것들을 많이 봤는데, 그중 하나가 라마였어요. 당시 한국에서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 낯선 동물이 정말 새롭고 예뻤어요.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지더라고요. 이후 다른 곳에 여행을 갈 때면 그때 남미 여행에서 본 라마도 나처럼 세계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가축화된 라마를 보며 감정이입을 하기도 했어요. 주인이 있는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회사에 있던 저와 농장의 라마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으니까요. 


그 마음으로 라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그린 게 ‘라마 인 원더랜드’예요. 라마가 빽빽한 열대 나무 사이에서 호기심 가득하면서도 조금은 두려운 표정으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죠. 

 

 

말씀을 듣고 나니 이번 그림책에는 작가님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대부분 제 이야기예요. 회사에 다닐 때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과 그걸 하기 어려운 현실이 서로 부딪히며 저를 괴롭혔어요. 그렇다고 회사에서 하는 일을 싫어한 건 아니에요. 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디자인 회사에서 다양한 패턴 디자인과 패키지 디자인을 했는데, 재미있었어요. 다만 날씨가 너무 좋은 날에도 꼼짝없이 회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나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게 힘들었어요. 디자인을 할 때마다 여러 사람의 확인을 받고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는 것도요.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여행으로 그 답답함을 해소하기도 했는데, 그때뿐이더라고요. 생각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어느 날 퇴사를 결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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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인 원더랜드 ©계남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과 그걸 하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작가님이 회사에 다니시며 하고 싶었던 건 뭐였는지 좀 더 듣고 싶어요.


회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저는 제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요즘에야 다양한 SNS와 플랫폼이 발달해서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친구들은 일찍부터 이름을 알리기도 하고, 취업 외에도 다양한 길이 열려 있죠. 하지만 제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는 지금과 또 분위기가 달랐어요. 회사 같은 데 들어가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산다는 게 너무 막막한 길처럼 느껴졌어요. 다들 당연히 취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8, 9년 전이면 지금처럼 퇴사가 흔한 분위기도 아니었을 텐데, 결심을 굳히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퇴사를 결심한 계기가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걱정도, 겁도 많은 성격이라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결심을 굳힐 수 있었던 건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 덕분이에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회사에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 기분이 지금 어떤지 묻고 답하는 데 시간을 들였어요. 그러던 어느 연말, 또 퇴사 고민을 하던 중에 작년 이맘때도 같은 고민을 했고, 재작년 이맘때도 같은 고민을 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대로라면 내년에도 똑같은 고민을 하겠더라고요. 그럼 이제 뭔가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싶었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용기를 내야 만날 수 있는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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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바다 ©계남

 

 

퇴사 후 9년, 그동안의 삶에 만족하시나요? 회사 밖 삶의 장점과 단점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전 항상 좋았어요. 돈이 없을 때도요. (웃음) 남미 다녀오는 데 돈을 많이 써서 한국에 돌아와 커피 한 잔 사 먹는 게 사치처럼 느껴질 때도, 그냥 낮에 밖에 나가서 풀잎 흔들리는 걸 보고 있으면 기쁘더라고요. 그제서야 내 생이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재미있는 건 회사 다닐 때는 제가 회사 생활과도 나름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사람들과도 잘 지냈고 제 일로 인정도 받았으니까요. 잘 맞는 것 같은데 왜 힘이 들까 고민했는데, 그만둬 보니 회사 밖에서의 삶이 저랑 딱 맞는 생활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퇴사 후 9년을 보내며 작가님이 했던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고,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듣고 싶어요.


퇴사 직후 6개월간 남미 여행 가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어요. 배낭여행이었기에 편하고 좋은 여행도 아니었고, 제가 너무 겁이 많아서 혼자 브라질에 도착해 몇 시간 동안 공항 밖을 못 나갈 정도였어요. 겨우 숙소에 도착해서도 강도 걱정에 밖에 돌아다니는 게 너무 무섭더라고요. 제가 안쓰러웠는지 숙소 스텝이 친구라도 사귀어서 같이 다니라고 조언해줬죠. 그래서 같은 도미토리를 쓰던 파라과이 사람과 친해져서 초반에는 같이 여행을 다니곤 했어요. 

 

 

그렇게 걱정도 겁도 많은데 여행을 좋아하시고, 장기 여행도 자주 다니시는 게 신기해요. 작가님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겁이 많긴 하지만 낯선 문화를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아서 여행을 계속 다니는 것 같아요. 특히 저는 도시나 잘 알려진 관광지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에서 여유 있게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해요. 관광객에게 이미 익숙한 사람들 틈에서 머무는 것과, 저를 완전히 낯선 사람으로 인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머무는 느낌은 많이 다르거든요. 대부분은 후자가 기억에 더 오래 남아요.


제가 두려울 때마다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되뇌었던 글이 있어요. ‘용기 안에는 천재성과 힘, 그리고 마술이 있다.’ 책에서 본 괴테의 말이에요. 언제나 제게 힘을 주던 구절이에요. 그 말처럼, 돌이켜보면 용기를 낸 뒤에 결과가 좋았던 적이 많아요. 실제로 용기를 내야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기도 하고요. 그 구절을 너무 많이 되뇌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마음속으로 되풀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런 사고방식이 내면화된 상태예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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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씨, 퇴사하고 뭐 하게?』 중 일부

 

 

『라마 씨, 퇴사하고 뭐 하게?』에는 이제 막 새로운 세상으로 나온 라마가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인 비쿠냐를 만나 함께 여행을 다니고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는데요, 작가님께도 비쿠냐 같은 존재가 있었나요?

 

여행하면서 정말 많은 비쿠냐를 만났기에 어느 한 사람을 꼽기는 어려워요. 특히 장기 여행을 할 때는 한국에서와는 생각의 결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많이 만나요. 그런 사람은 짧게 스칠 뿐인데도 제 삶에 큰 영향을 주죠. 내가 속하지 않은 세상에서 온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우리가 무언가를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준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돼요. 책을 내고 감사의 말을 적을 기회가 있었다면 나의 비쿠냐들에게 감사한다고 적었을 거예요. 

 

 

혹시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책에서도 언급했는데, 제게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 정도가 떠올라요. 


한 명은 호주에서 만난 친구예요. 첫 회사를 잠깐 다니다 그만두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앞으로 뭐가 되어야 할지 고민 많던 저에게 그 친구는 꼭 뭐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무언가가 되겠다는 것만이 꿈은 아니라고 말해주었어요. 자신의 꿈은 원하는 곳에 가서 사는 것이라 여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제 안의 절대적인 믿음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죠. 그때의 저는 누구나 회사에 다니고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회사나 직업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삶의 유형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것을 배웠어요.


또 다른 여행에서 만난 친구와는 어느 호수를 보러 갔는데, 거기에 있던 관광안내원이 길을 따라 한 바퀴를 쭉 돌면서 경치를 보면 된다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안내받은 길로 가지 않고 다른 들판 쪽으로 올라가서 경치를 보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들판에 들어가지 말라는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들판은 길로 인식조차 하지 않았을까, 그냥 안내원이 정해준 길로만 가려 했을까 생각하게 되었죠. 

 

 

 

 그리고 싶어서 그리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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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돋아나 ©계남

 

 

앞서 ‘나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하셨는데, 작가님에게 그림은 무엇인가요? 작가님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이유 없이, 본능적으로 그리는 게 제 그림이에요. 팔아서 돈을 벌고, 어떤 의미를 담거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 그림 그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가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예전의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서도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그림 그리는 건 돈이 더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제약을 두곤 했어요. 지금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가능하면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하지 못할 때는 간절했던 일도 자유가 주어지면 안 하게 되곤 하는데, 작가님은 그런 과정을 겪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무한정 자유가 있는 건 아니라서 그림은 계속 그리고 싶어져요. (웃음) 토도비엔 관리를 제가 다 맡아서 하고 있으니까요. 작은 온라인 아트샵이라 일이 없어 보이지만 제품 관리부터 제작, 배송까지 모든 과정의 일을 제가 해야 해요. 그러니 토도비엔 일을 마무리하고 그림을 그릴 여유가 있는 날에는 호사를 누리는 거죠. 예전에는 토도비엔 일이 없으면 제가 그만큼 돈을 못 번다는 의미니까 초조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림 그릴 시간이 확보되었다고 좋게 생각해요. (웃음) 

 

 

퇴사 9년 차로서, 퇴사를 고민하는 분들에게 먼저 퇴사한 사람으로서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퇴사하고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인가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퇴사하고 돈이 없어도 후회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수입이 보장되는 환경이 중요한 사람도 있거든요. 후자라면 회사에 있는 게 더 잘 맞을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 작가님이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 있을까요?


일기를 쓰든 책을 읽든 꾸준히 자기 자신과 함께하며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 시간이 쌓이지 않으면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가 어려워져요.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힘든 순간이 닥치면 무너지기 쉬운 것 같아요. 저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힘들어하던 때가 있었는데, 계속 고민하며 나를 좀 알게 되니까 내가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확신이 섰어요.


또, 나를 언제든 열어두려고 노력하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제가 첫 책을 내고 나서 여기에 내 모든 걸 다 쏟아부었으니 이제 뭘 더 쓰겠나 생각하고 가능성을 잠가버리면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진다고 생각해요. 그 대신, 내가 모르는 내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가능성을 열어두면 또 좋은 기회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를 제약하는 것은 나 자신일 때가 많거든요.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올해 계획이 궁금합니다. 작가님의 2023년은 어떤 해가 될까요?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는 편이 아니라서, 현재는 상반기에 예정된 전시회를 잘 마치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요. 하반기 일은 하반기에 가까워져야 생각할 것 같아요. (웃음) 그리고 계획은 아니지만, 올 한 해를 시작하며 더 밝아지자는 결심을 했어요. 원래도 어두운 사람은 아닌데 제가 하는 활동이 요가처럼 대부분 정적인 경우가 많다 보니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좀 더 반갑게 인사하고 유쾌하게 지낼 수 있도록 더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올해 목표입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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