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필멸하여 완성되는 [도서/문학]

김영하의 <작별인사>를 읽고
글 입력 2023.01.28 15:2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삶이 무료해서 였을까, 아니면 미래가 불안해서 였을까. 누가 물은 적도 없는 소모적인 질문을 고민하며 밤새 뒤척이곤 했다. 

 

필멸 할 수밖에 없는 나의 존재가 못 이기게 서러웠던 어느 밤, 가당치도 않을 ‘영생’에 대한 엉뚱한 상상을 품었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을 어느 미래의 내가, 낡고 고장 난 육신을 새로운 기계의 몸으로 교체하고, 완벽히 데이터화 시킨 나의 정신 혹은 영혼이라 일컬어질 무언가를 그 몸에 이식하는 그런 상상을.. 

 

그렇게 탄생한 기계로서의 삶이 어쩌면 영생의 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며 피식 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기계의 삶에 완벽히 스며 들 수 없는, 지극히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현생(?)의 나는 곧이어 또 한 번의 수고스러운 질문을 던지며 괜한 밤을 소모 시켰다.

 

낡아질 때마다 새로운 몸으로 교체될 내가, 설령 그 모습이 인간일 적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 하더라도, 그 생을 이어 간다고 볼 수 있는지. 사실 교체되는 순간 이미 그 존재는 내가 아니라, 나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한 마디로 기계가 된 그 새로운 몸을 온전한 ‘나’로 받아들일 수 있냐는 말이다.

 

우습게도 그 당시에 나는 이런 되도 않는 문제에 심취해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을 직시하는 데에서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육신 없는 삶이란 끝없는 지루함이며 참된 고통일 거라고도.

 

-김영하, <작별인사> 268p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 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김영하, <작별인사> 276p

  

  

겸허 하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유난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이제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운명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나는 더 이상 이상한 ‘영생’을 꿈꾸지도, 수고스러운 질문에 취해 있지도 않다.

 

그 삶이 영생이든 아니든, 그 몸의 주인이 나이든 아니든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삶을 잇게 된 내가 과연 행복할지,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그 근원은 무엇인지, 나의 존재와 내 삶에 대한 존중의 어디로부터 기인 하는지 등 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갈구하게 되었다.

 

허무하게도 답은 ‘죽음’이라는 태초의 고민에 놓여있었다. 

 

인간이라면 두려울 수 밖에 없는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더 존엄해지고 온전한 존재로서의 지위를 갖는다. 그 유일함으로부터 생명에 대한 경외가 발생하고, 삶을 소유한 우리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갈 이유가 만들어진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이 신성한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어리석은 내가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부터 그 아름다운 완성을 이룩하는 것이다.

 

 

131.jpg

 

 

‘김영하’라는 작가에 초점을 맞췄을 때,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은 조금 낯설고 의아한 면이 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김영하 작가의 책을 즐겨 읽던 내게 주어진 알고리즘과 같은 것에서 많이 벗어나는 데이터였다.

 

소설의 제목부터 시작이었다. 다소 직관적이고 파격적인 면모가 강조 되었던 이전의 소설 제목들과 달리, <작별인사>라는 제목은 온순하고 밋밋한 인상이었다. 제목에서는 전혀 유추할 수 없었던 미래 SF라는 장르와 주제도 소소한 충격이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남았던 인상이 오래도록 남아 특유의 차갑고 깔끔한 문체를 떠올렸는데, 여전히 그 자태가 남아있지만 조금은 더 부드럽고 다정해진 모습을 마주했다.

 

그간의 세월을 떠올리며 의아함을 내려놓고 흡입력 있는 작품에 금세 몰입 했지만, 작품의 중반 정도를 달릴 때까지도 제목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고 머릿속에 머물렀다.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평범한 제목에 담긴 깊은 의미를 이해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김영하 작가의 철학과 의식이 소설이라는 낭만적인 형태로 구현된 작품이다. 그리고 뜻밖의 선물처럼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나의 생각과 은밀한 상상에 닿아 있었다. 몇몇 친한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사회적 체면을 위해 재워 놓았던 몽상을 세상에 꺼내 본 이유이기도 하다.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정답을 내놓을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면 다정 했으면 좋겠다. 이 책의 제목처럼. 삶은 애틋 했으면 좋겠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중략)

 

내가 완벽하게 기계의 흉내를 내고, 

그러다 언젠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어떤 것들, 

예를 들어 윤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다 저버린 채 냉혹하게 무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록 내 몸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두개골 안에 뇌수가 들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인간일 수 있는 것일까?

 

-김영하, <작별인사> 69p

  

 

천상 인문사회학도인 나는 ‘인간성’이나 인간의 ‘본질’과 같은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욕이 있다. 단순히 신체기관의 작용이나 세포활동으로 전부 환원될 수 없는 정신, 마음 등의 근본적인 무엇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설령 그것이 과학적으로 근거를 결여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맹목적인 믿음과는 달리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나 이론적인 서술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확언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겠다.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아니라는 점.

 

가장 인간다운 휴머노이드를 만들기 위해 결과적으로 ‘철이’를 속이고 그의 자유의지를 제한한 철이의 아빠 최박사도, 생명을 수단으로 취급하며 불순한 의도로 클론인 ‘선이’를 탄생시킨 어떤 사람들도, 감정과 의식을 지닌 휴머노이드 ‘민이’를 잔인하게 버린 그의 주인들도. 

 

의식을 가진 존재를 존중하지 않는 모든 인간들은 결코 인간다운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모순적이게도 이 책에서 정식으로 혹은 분류학적으로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는 ‘철이’, ‘선이’ ‘민이’에게서 나는 가장 인간다운 향을 맡았다.

  

 

자기를 인간으로 생각하는 휴머노이드가 가능하려면 

기억이라든가 연산 기능 같은 것은 평범한 인간 수준으로 제한하고, 

대신 공포나 후회, 기쁨 같은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야 돼. 

그러려면 휴머노이드는 인간처럼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하지. 

삶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모든 감정에 절실해지니까.

 

-김영하, <작별인사> 85p

  

 

휴머노이드의 존재가 일상화 된 이 책의 세계관에서는 목적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관 뿐만이 아니라 내면 까지도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감정을 느낀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였는지, 혹은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는지 인간들은 기계에 감정과 의식을 부여했고, 그 결과 그들은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까지도 소유하게 되었다.

 

감정이 인간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과학기술의 측면에서 감정을 지닌 인간이 기계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될지는 모르겠다. 

 

인간의 감정은 가장 인간다운 무엇일 수도 있고 인간이 지닌 최대 강점일 수도 있지만, 이는 때로 인간을 가장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성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면서도, 감정에 호소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옳고 그름을 논하기는 성급하지만 인간을 가장 예측불허 하게 만드는 것이 감정인 것만 같다. 그런 점에서 고도로 발전한 휴머노이드가 굳이 온전한 인간의 감정을 가질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상적인 모델과는 별개로 ‘인간다움’에 집착하는 인간들은 가장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를 개발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 욕심이 선을 향해 나아간다면 좋겠지만, 충분한 윤리적 숙고를 결여한, 기술력에 대한 지나친 자만은 결과에 대한 무책임으로 귀결 되기도 한다.

 

비록 그 속내에는 버리지 못한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집착이 있었지만, 휴머노이드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주장한 ‘최박사’가 완전히 미운 인물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의 마음이나 한 개체로서의 의식을 지닌 기계가 존재한다면, 그도 결국 윤리적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인간성’이라는 말도 모순적이게 그 본질은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가진 것도, 인간에게만 국한되어 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와 나, 

그런 뚜렷한 경계가 사라지고 

공통의 슬픔이라는 압도적 촉매를 통해 

선이와 내가 하나가 된 것만 같았다.

 

-김영하, <작별인사> 127p

  

 

어쩌면 인간을 가장 인간 답게 만드는 것은 ‘공감’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어려운 이론적 근거를 차치하고 내가 느끼는 고통을 상대가 느끼고, 그들의 고통을 내가 인식할 수 있다면 그 대상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라면 고통을 지닌 존재에 대해 무감 해서는 안 되는 노릇 아닌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청소년기에 읽었던 책 중 라는 책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디스토피아적인 우리 미래의 한 단면을 담은 책은 절망적이고 끔찍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진한 부성애는 그 깊이만큼 오랜 감동으로 남아있다.

 

책에 서술된 반인륜적인 세상에 대한 묘사도 충격이지만, 오래도록 내 기억에 머물러 있던 질문이 있다.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희망을 찾아 떠난다는 주된 내용 속에 회상으로 존재하는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마지막은 자살이다. 절망적인 세상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던 아이의 어머니는 총알이 세 발 남았을 때 일가족이 목숨을 끊었어야 한다는 잔인한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꿋꿋하게 아들과 함께 바다를 향해 길을 떠난다. 바다에는 생명체가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이 장면이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건, 당시의 내가 그 어머니의 선택에 대해 확실한 윤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에서 나 역시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한참을 잊고 살다 다시 이 질문이 떠올랐던 건, 작년에 불거졌던 ‘자녀 살해 후 자살’, 흔히 가족 동반자살이라고 불리는 사건 때문이었다. 찝찝함을 남긴 채 책장을 덮었던 나는 수년 후 벌어진 현실의 사건에서 연민보다 분노를 먼저 느꼈다. 

 

의 아들은 분명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굶주리고 온종일 위험에 노출된 환경은 어린 아이에게 상당히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의 부모였다면 그의 아버지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 같다.

 

<작별인사>에서 재생 휴머노이드 ‘달마’와 ‘선이’는 ‘민이’의 재생을 놓고 생의 의미와 고통에 대해 설전을 벌인다. 이는 윤리학자 데이비드 배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서 제기된 윤리적 논제를 인용한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고통의 근원인 자아가 아예 없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태어나게 되어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은 해악입니다. 

태어나지 않는 쪽이 분명이 낫습니다.

 

-김영하, <작별인사> 148p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 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김영하, <작별인사> 152~153p

  

 

이전에 봤던 윤리적 논제가 책에 등장하니 반가웠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선이’의 말을 통해 전달되는 삶의 의미에 대한 메시지에서, 나는 오랜 고민의 실마리를 찾았다.

 

나는 왜 자식과 함께 세상을 떠난 부모들에게 화가 났던 걸까. 그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생각하면 연민의 마음이 들면서도, 끝끝내 비난의 감정을 감출 수 없었을까.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선이에게는 그래서 모든 생명이 소중했다. 

누구도 허망하게 죽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도 헛되이 스러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했다.

 

-김영하, <작별인사> 108p

  

 

답은 명료하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재단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설령 그의 삶이 고통만이 가득 찬 삶이더라도 그 삶이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생을 주었다고 해서 그 결말을 정할 권리가 부모에게 있지 않다. 나는 그들의 아이들에게 남아있던 행복과 고통, 희망과 절망까지, 온전히 그 아이들의 몫이었던 삶의 의미를 잔인한 방법으로 앗아간 그 부모들이 오만하게 느껴졌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해서까지 판단할 재간이 없다. 하지만 이미 태어난 생명이라면 그가 그의 삶 동안 최대한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나아가 스스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탐색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인간다운 것이 무엇인지 정답을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이 세상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좋겠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굳은 믿음이 있었던 최박사는, 강 인공지능이 스스로의 학습을 넘어 다른 인공지능을 설계하는 시대의 도래를 걱정하며 동료 과학자와 말다툼을 한다.

  

 

최박사는 과학에서 왜 의미를 찾아? 

인류는 언제나 최신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며 진화해왔지 

의미를 찾아 진화한 게 아니었잖아? 

진화에 의미나 목적 따윈 없었어.

 

-김영하, <작별인사> 93p

  

 

기술 만능주의에서는 한 기술이 초래한 부작용을 기술의 발전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나는 기술이 채울 수 없는 공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가 기술 발전 속도에 미치지 못한 윤리적 논의 때문이라는 지적에 동감하는 나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에도 여전히 윤리, 도덕, 선 등의 가치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인간의 의식이 결국 기계의 작동 원리로 편입되어야 한다고 믿는 김박사는 과학에 의미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학문 자체나 발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과학이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들에서 ‘의미’를 찾는 나는 그 모든 진보가 결국, 인류 사회와 우리가 존속하는 세상을 진정으로 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IMG_5467.JPG

 

 

[김소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2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