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연한 죽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1.2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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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생명에는 경중이 없다. 개개인들마다 우선으로 중점을 두는 가치가 다르기에, 절대적인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희미해진 세상 속에서도 이 명제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절대적인 올바름을 부정한다면 주변인들의 눈총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부정하는 것’이란 우리 사회에서 귀하고 천함을, 가볍고 무거움을 따지고 있는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차이가 있어야 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세계 곳곳의 사건·사고들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빠르게 잊히기도, 오랫동안 각인되기도 한다. 망각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은 매체에서 그 사건을 얼마나 오래 또 자주 보도하는지에 좌우된다. 그 지속성과 빈도수는 결국 까마득한 과거의 순간부터 이어진 저울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단 1g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실현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무의식 속의 저울만은 떨쳐낼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하며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부분 사람은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도, 현재도 우리 곁에 남아있는 저울이 과연 미래에는 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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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서부터 2034년 사이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 Years)에서는 급변하는 환경과 극단으로 치닫는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맨체스터에 살고 있는 ‘라이언스’ 가족 구성원 각각은 다양한 사회 계층을 대표하고 있다. ‘셀레스트 라이언스’와 ‘스티븐 라이언스’ 부부는 금융 전문가로 중산층에 속한다. 또한 장애인이자 싱글맘인 ‘로지 라이언스’, 사회운동가인 ‘이디스 라이언스’, 난민 캠프를 관리하는 공무원인 ‘대니얼 라이언스’가 등장한다. 모두 스티븐의 형제들로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먼저 스티븐은 금융위기로 한순간에 재산과 직업을 잃고 로지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 하지만 부당한 이유로 허가받지 못해 정부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대니얼은 난민 캠프에서 ‘빅토르’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미국의 핵 공격으로 방사능에 피폭당한 이디스는 점점 죽음과 가까워진다. 그리고 스티븐의 딸 베서니는 인간의 불완전한 육체의 한계를 넘어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트랜스 휴머니즘에 빠져들어 간다. 정신을 데이터화 시켜 불멸의 존재로 남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는 트랜스 휴머니스트로서 베서니는 자신의 몸에 하나 둘 씩 기술을 이식해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개인적 삶의 변화 뒤에는 사회의 변화가 있다. 한 가정의 텔레비전에서 등장하는 정치인 ‘비비안 룩’은 다른 수상 후보들과 함께 토론하는데, 작은 프레임 속에서 존재하는 그는 언뜻 극과는 동떨어진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내보이는 모든 태도와 정책들의 영향력은 개인의 삶 깊은 곳 구석까지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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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수준 이상의 아이큐를 가진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고, 통신을 차단하는 ‘블링크’를 각 가정과 학교에 배급한다. 난민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이 마련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스스럼없는 비속어와 혐오 표현의 사용은 우스워 보일 정도다. 그의 파격적인 행보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일어난 만큼, 비비안 룩을 지지하는 대중들 또한 늘어났고 결국 그는 영국 수상의 자리에 오른다.


양극화의 끝으로 치닫는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라이언스 가족을 비롯한 대중들의 삶이 안정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어도, 새로운 1년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 소리가 더 이상 희망과 기대를 담지 못하여도 여전히 시간은 흐른다.


모두에게 가혹했던 한 해가 지나고 더 가혹할 다음 해, 또 그다음 해를 맞이하는 1월 1일에 터지는 폭죽의 화려한 불꽃과 큰 소리는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먹하게 만들어 차가운 현실을 묻어버리려는 듯하다. 새로운 난민 정책에 따라 본국으로 추방된 빅토르를 무사히 영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긴 과정 속에서 결국 목숨을 잃게 된 대니얼의 마지막 모습과 절망하는 라이언스 가족의 모습, 원망의 대상이 된 빅토르. 이 모든 사건과 그에 따른 수많은 감정을 덮어버리는 불꽃놀이인 것이다.


빅토르와 대니얼은 영국으로 향하는 배에 함께 몸을 실었지만, 영국 땅을 밟은 사람은 빅토르뿐이다. 대니얼의 죽음이 나에게 남긴 것은 한 사람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보다 더 큰 충격과 허망함이었으며 왜인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계속해서 부정하고 싶었다. 어딘가 개운치 않은 그 꺼림칙한 감정은 극이 끝난 이후에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대니얼이 아닌 빅토르였다면, 그의 죽음에도 나는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까? 아니면 그의 죽음을 그저 안타까운 사고로, 슬픈 결말로 받아들였을까.


굳이 이름 붙여보자면 ‘찝찝함’으로 정리할 수 있는 그 감정은 사실 처음 느껴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의 감정을 나는 과거에 경험한 적이 있다. 바로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보고 난 후, 나는 정확히 같은 감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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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결말을 가진 영화를 주제로 하는 추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그 영화는 나치 장교의 아들 ‘브루노’가 유대인 수용소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곳에서 만난 유대인 소년 ‘슈무엘’을 만나며 시작된다.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며 자행된 홀로코스트를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묘사하며 인류 역사의 비극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슈무엘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수용소 안으로 들어간 브루노가 결국 철조망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결말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관객들은 브루노의 죽음은 안타까워하지만, 슈무엘을 비롯한 다른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고.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에겐 죽음이라는 결말이 당연하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왔을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서 직업의 귀천이 없고 생명의 경중이 없는 공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물의 생명보다는 인간의 생명이 중요하고,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 난민보다 난민이 아닌 사람이, 유대인보다 비유대인이, 블루칼라보다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더 중요하다. 있는 힘을 다해 부정하고 외면해도 우리 사회는 이미 그 자체로 저울이다.


제각기 다른 원인으로 인해 세워진 수많은 기준이 세상에 선을 긋는다. 언제부터인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오래전부터 그어진 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진해지며 벽이 되었다. 라이언스 가족의 내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시련, 그들을 둘러싼 척박한 환경은 서로를 나누고 재는 현재 인류의 행위가 지속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라이언스 가족의 최연장자인 ‘뮤리엘’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기도 한다.


그는 세상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경제, 야당, 유럽 탓을 하거나 광대한 역사의 흐름을 핑계 삼아 무력한 개인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모든 것은 우리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벽을 세운 사람, 높아지는 벽을 보고 있는 사람, 그 안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사람,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조각난 세계에 일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본 현재의 우리는 ‘존재하는 것’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삶의 마지막에 다다라서 이디스가 자신의 정신을 다운로드하여 영원히 살아가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는 자신의 가족, 연인과의 시간이 담긴 기억이 자기 자신임을 되새긴다. 수치와 정보로 정의할 수 없는 시간의 기록 속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육체를 떠나 누구에게도 만져질 수 없고, 보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사랑이라는 본질은 영원히 남아있다.


한 개인의 삶을 이루는 수많은 관계의 실들과 그 실의 양 끝에 있는 모든 존재는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주고받는다. 그러니 조각난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의 내면에 살아있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감정이 우리 사회의 저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 번째 동력일 것이다. 그 동력을 발판 삼아 나아간다면 당연한 죽음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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