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김초엽 덕질.zip - 글리프 6호

글 입력 2023.01.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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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루이들이 희진을 돌보고 아꼈기 때문에 새로운 루이도 희진을 돌보기로 결정한다. 그 과정에는 어떤 대단한 결단의 과정이 없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루이’가 된다.


그들은 분절된 개체이다. 희진은 한 루이가 죽고 다른 루이가 다시 그 자리를 채울 때 연속적이지 않은 두 자아 사이의 어긋남을 목격했었다. 영혼은 이어질 수 없다. 그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다른 루이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같은 루이가 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도 작용하지 않는다. 루이들은 단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스펙트럼> p. 90, 91

 

 

김초엽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스펙트럼>. 생각할 지점이 많아 몇 번이고 곱씹어본 작품이다.


희진은 스카이랩의 서른세 번째 생물학자로 탐사선에 올랐고, 조난 열흘째에 ‘그들’을 처음 만나게 된다. 처음 도착한 낯선 행성에서 만난 첫 번째 ‘루이’는 희진에게 뿔 장신구를 달아줌으로써 무리인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었다. 첫 번째 루이가 죽고, 두 번째 루이를 만난 희진. 두 번째 루이도 마찬가지로 희진을 돌보았고, 열매를 구해다 주었고, 뿔 장신구를 걸어주었다.

 

이 낯선 협곡에서 희진에게 가장 다정한,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푸는 개체는 루이뿐이다. 그러나 첫 번째 루이와 두 번째 루이는 다르다. 두 번째 루이는 첫 번째에 비해 더 오랜 시간 동굴 벽화를 그렸고, 희진의 손짓발짓을 더 잘 이해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루이까지 죽고, 네 번째 루이가 나타난다. 비로소 희진은 자신의 미소를 따라 하는 루이를 만나게 된다.


희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루이의 연속성을 믿고 싶어 했다. 루이들은 온종일 동굴에서 그림을 그렸고, 루이가 죽고 새로운 루이가 나타나면, 새로운 루이는 반드시 이 그림을, 이 기록을 받아들였다(루이가 온종일 그린 그림에는 희진을 ‘소중하게 대해라’ 와 같은 의미를 담은 기록이 있을 것 같다). 경험, 가치, 감정, 희진과의 관계까지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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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를 루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 루이부터 네 번째 루이까지, 어떤 것이 그들을 루이로 정체화하게 했을까. 전대의 루이가 희진을 신경 썼다는 사실 만으로 새로운 루이조차 죽을 때까지 희진을 살뜰히 살핀다니.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켰을까.


영혼의 연속성이 있다는 믿음일까?

 

네 번째 루이는 희진을 무심하게 대했지만, 전대 루이들이 남겨둔 그림을 읽고 희진을 살피기 시작했다. 진실로 영혼의 연속성이 있다면, 본능적으로 희진을 보살폈을 터인데, 그림을 읽고 나서야 희진을 자신이 챙겨야 할 범주로 집어넣었다. 이는 희진의 말처럼 루이들 사이에 영혼이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낯선 생명체들은 영혼 연속성이 있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누군가를 보살피는 행위를 증명하는 걸까.


희진을 챙기는 방식이 루이마다 제각각이었던 점도 흥미롭다. 색채를 읽고 희진을 살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루이들은 모두 희진을 아꼈지만,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접근 불가 영역이었던 그림조차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해준 루이가 나타나게 된 것은 어떤 의미일까.


<스펙트럼>을 읽는 내내 머릿속은 물음표로 복잡하게 얽혀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물음. 필자가 김초엽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게 된 것은 사랑과 연대, 과학적 상상력과 따뜻함을 녹여낸 <스펙트럼>을 읽고 나서다.


김초엽 작가는 현재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2030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작품뿐 아니라 작가를 덕질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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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프 6호 - 김초엽 ‘실험’]은 김초엽 작가 덕질을 아카이빙한 책이다. 책의 표지 조차 ‘작가 덕질 아카이빙’이라고 되어 있으니, 아주 본격적으로 덕질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필자가 서문에서 그토록 길게 <스펙트럼>에 대한 줄거리와 감상을 늘어놓은 이유도 바로 이 책 때문이다. 필자는 서문에서 일종의 ‘덕질’을 했다. 그리고 [글리프]의 방식과 유사하게 덕질해보았다. 하나의 작품을 여러 각도에서 살피고, 뜯어보고, 물음표를 날리고. 나의 감상을 타인과 나누는 일련의 행위를 해보았다.

 

[글리프]는 김초엽 소설이 한국 문학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소설 속 등장하는 행성과 모티프를 모아보고, 정상성과 유토피아에 대해 질문하는 방식을 톺아본다. 또, 소설 속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과 이해에 대해 이야기한 [글리프]는 김초엽 작가의 작품 세계를 더욱 탐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글의 서문을 읽고, 김초엽 작가의 작품 세계가 궁금해졌다면, 당신은 덕질 아카이빙을 반드시 읽어보아야 한다. 비평 대신 덕질로, 한국문학을 새롭게 향유하는 [글리프]를 통해 김초엽 작가의 매력을 알게 될 것이다.

 

활자로 비평이 아닌 덕질을 한 책인 만큼, 타인은 어떻게 작품과 작가를 바라보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에디터들이 어떤 시선으로 김초엽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했는지, 어떤 이유로 김초엽 작가를 좋아하는지 빼곡히 나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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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세션은 ‘사랑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으로, 김초엽 작가의 작품 속 등장하는 여러 형태의 사랑에 대한 질문과 에디터들의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통이 어렵더라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우리가 동물을 사랑하면서 완전한 의사소통이 불가해도 어느 순간 이해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처럼,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여기서 사랑의 범위를 꼭 인간 대 인간으로 한정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네.

 

p. 124

 

 

혼자일 땐 잘 알지 못했지만, 특정한 관계를 통해 알게 되었거나 변화한 가치가 있나요?

 

가까운 관계를 통해서야 알게 되는 차별이 꽤 많은 것 같아. 특히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교묘하고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어서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 같아. 우리 관계 속에서 나의 경우엔 혼자였다면 몰랐을 너의 이야기들을 통해 가치관을 좀 더 다듬을 수 있었고. 

 

p. 125

 


김초엽 작가이 등단이 반가운 이유는 동시대의 사람이 동시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는 연대의 감정을 느끼도록 만드는 작품을 쓴다는 점이다. 장애인, 여성 등 소수자를 그려내고, 우리가 어떤 것을 놓치고 있는지 첨예하게 담아낸다.

 

특히 과학적 상상력을 이용하여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더욱 가감없이,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그저 활자를 읽고 있는 것임에도 그와 한 배를 탄 듯한 감상마저 든다. 외계 생명체를 등장시킴으로써 모순적이게도 ‘인간성’이나 ‘연대’, ‘사랑’과 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것도 매력적이다.

 

김초엽 작가의 특장점은 이해와 고민의 폭을 넓혀, 궁극적으로 나의 세계를 넓혀주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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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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