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마음의 숙제

바다에 묻어놓은 것들
글 입력 2022.12.3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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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도륙해 옮기는 삶을 살다 보면 가끔 모든 것이 섞이는 곳으로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집이 한강 근처라 다행이라는 생각은 갈수록 두께를 더한다. 속이 답답해질 때마다 강가로 내려가 울렁거릴 정도로 비린 강의 줄기를 따라 걷는다. 도시를 관통하는 강을 보고 있으면 이름과 무관하게 비슷한 감정이 들지만 한강은 예외다. 강의 이남까지 까마득한 폭을 자랑하는 한강의 크기에는 자주 압도당한다. 한강 공원을 보고 ‘바다!’라고 소리 지르던 한 아이의 귀여운 착각만큼 당연하게도.


얼마 전에는 H의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잠수교에 갔다. 올해 잠수교가 몇 번이나 잠겼는지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도로가 깨끗했다. 다니는 차 하나 없이 말끔히 비워진 도로에서 강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여차하면 악이나 힘껏 써보려고 간 곳에서 우리를 에워싼 소리에 힘껏 잠겨있기만 했다. 


가만히 앉아서 강바람을 맞다 보니 마음 깊은 곳까지 가라앉은 침전물이 이따금씩 존재감을 알리는 소리를 냈다. 나와 H는 무엇인가 적절한 때를 기다리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H의 등에 매달려서 바람이 나를 비켜가는 것을 보았다. 신호를 기다리면서 H와 나는 동시에 ‘바다 가고 싶다!’하고 외쳤다. 곧 달리기 시작한 오토바이와 바람 소리에 뒤의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나도 다시 묻지 않았다. 바다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였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올해는 끝의 끝까지 일이 몰아쳐 바다는 못 보고 해를 넘기는 줄 알았다. 주말까지 집에서 늘어지려는 나를 챙겨 바다로 떠난 J 덕분에 운 좋게 모래사장을 밟을 수가 있었다. 도착하니 이미 해가 훌쩍 넘어가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12월의 밤바다는 사나웠다. 방파제에 파도가 부딪힐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언제 방파제를 넘어 도로로 뛰어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집채만 한 파도였다. 열이 오른 볼이 순식간에 식었다. 바닷바람을 간신히 막는 패딩 아래로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바람을 맞았다.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차마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파도의 말단이 피부에 닿았다. 처음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밤바다가 사람을 홀린다는 말은 참말인 것이 분명했다. 반복된 탄성 속에 비명이 간혹 섞여들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새까만 물이 오가는 동안 나는 텅 빈 해변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내가 바다를 그렇게 내다보고 있으면, 그렇게 좋으면 들어가지 그러냐고 물어오는 이들이 있었는데. 나는 물이 무섭다. 힘껏 안기기는커녕 발이 조금만 바닥에서 떠올라도 미소가 사라진다.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에는 해일이 나를 덮치는 꿈을 꾸었다. 팔이 빠져라 헤엄을 치며 일어났더니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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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을 걸으면서 바다 이야기를 했다. 나는 유독 파도가 높은 그날의 바다를 보며 바다가 무섭다고 했고, J는 바다로 나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파도가 들이치면 몸을 접어 피하기 바쁜데, J는 오히려 파도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단다. 파도를 타는 순간도 좋지만 파도가 들어오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참 설레는 것 같아. 파도를 타려고 기다리는 곳에서는 파도가 날 덮치지 못하니까. 기다리다가 내가 타고 싶은 파도가 들어오면 그때부터 그 파도 생각만 하는 거야. 


나는 아마 평생 물을 무서워할 사람이라, 파도를 기다리는 마음 같은 것은 앞으로도 모를 가능성이 크다. 너무 사랑하는 건데 동시에 무섭다는 건 조금 비참한 일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무서운 것까지 사랑하는 건 포용력이 높은 거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늘 양면적이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것들에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도 파도를 기다리는 마음은 조금 부러워진다. 


여름과 겨울에는 항상 바다와 함께 해왔다. 요동치는 바다를 보아야 올해도 잘 마무리된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겨울바다는 늘 마음의 숙제다. 내가 올해도 잘 살아남아 겨울바다를 볼 수 있게 되었구나, 연말의 종지부같은 비장함까지 더해진다. 

 

아마 내년에도 나는 허둥지둥대는 마음을 붙들고 바다를 보러가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나는 늘 숙제도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었다 풀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이 숙제는 풀러가는 내내 즐겁기만 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작가의 시를 종알거리며 떠나는 발걸음을.


도시를 지나온 강물에게 내력을 묻지 않는다 

모두 이미 섞인 것들이고 이미 지나쳐버린 것들이고

강변에선

묻지 않는 것만이 미덕이니까


허연 <강물에만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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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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