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물질에 눈먼 자들의 난장판, 연극 '생각은 자유'

무대 위에서 압축된 배금주의 사회의 병폐
글 입력 2022.12.3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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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무리들은 신념을 잃었고, 최악의 무리들은 언제나 열정적이다.”
 
- W.B. 예이츠 '재림' 中
 
 
우리 사회의 배금주의가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고 있다. 자본의 시대는 당연스런 삶의 양태로 안착한 듯 보이지만, 이 또한 인류의 역사 가운데 무수했던 시행착오 중 일부일지 모른다. 모든 가치는 물질로만 측정되어 모든 개개인의 신념마저도 그 궁극이 ‘돈’에 닿아 있다.

2022년 극단 아리랑의 정기공연 '생각은 자유'는, 이 같은 시대에 돈에 대한 욕망으로 뭉친 한 무리의 인간들의 모습으로 현대사회의 민낯을 들춰낸다.
 
지난해 ‘사라’라는 제목으로 초연된 바 있는 이번 공연은 김수진 연출과 김동순, 김미영, 민대식, 김현준, 신시아, 권강현 배우가 참여했으며 대학로 시온아트홀에서 지난 12월 15일에 개막해 25일까지 관객들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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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진행되는 장소는 창에 블라인드가 쳐진 방 안이다. 의자 몇 개와 테이블 하나, 그리고 곳곳에 설치된 모니터 스크린이 눈에 띈다. 방과 분리되어 무대 좌측에 자리잡은 책상 위에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설치된 삼각대가 놓여 있다.
 
그리고 무대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들은 혈연과 지연으로 끈끈히 엮인 집단이다. 국회의원 구서광과 레몬홀딩스 펀드를 운영하는 서광의 동생 구서환, 자산운용사 MH그룹을 운영하는 서광의 처형 오미라, 서광과 친분이 있는 기자 이우진은 인간적인 친밀감 이상의 긴밀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이로 정치와 기업, 언론 간의 유착 관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서광의 아내 오사라는 한 달 전 화재 사고를 겪고 전신화상을 입은 뒤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 중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간호사는 사망했을 정도로 끔찍한 사고였지만, 서광이 아내를 극진히 간호하는 모습이 우진의 도움으로 매스컴을 타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 변신에 크게 성공하게 된다. 서광은 병원 대기실에서 서환, 우진과 함께 국회의원 선거 개표 방송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중 마침내 당선이 확정되자 서로 얼싸안고 승리의 기쁨을 나눈다.

이내 사라의 언니 미라도 당선 소식을 접하고 축배를 들기 위해 병원에 방문한다. MH그룹의 오너 미라는 서환이 레몬홀딩스를 설립하기까지 지대한 도움을 준 인물이다. 펀드사의 어엿한 회장이 된 지금까지도, 서환은 우진과 서광이 탐탁찮아 할 정도로 미라를 깍듯이 대한다. 미라가 짧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뜨자, 이들은 오늘만큼은 기쁜 마음으로 당선을 축하하면서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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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서광이 아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미묘하다. MH그룹의 회장이었던 사라와는 형식적으로 혼인 관계를 맺었을 뿐 깊은 애정이 없었던 데다, 그녀의 사고가 도리어 자신이 정계 입문에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한 방이 됐다. 사고를 마냥 비극으로만 여기기에는 그것이 가져다준 수혜가 너무나도 크다. 그렇게 아내의 사고를 이미지메이킹에 이용한 모양새가 됐지만, 그것도 모자라 아내의 주치의와 내연 관계를 맺기까지 한다.

그런데 서광이 당선된 당일, 깨어날 기미가 없었던 사라가 눈을 뜬다. 주치의는 그녀가 의식은 되찾았지만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었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사라는 전같지 않게 남편 서광에게 꽃을 사다 달라고 부탁한다. 서광 역시 꽃다발을 사다주며 마치 아내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그녀의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려고 한다.
 
주치의는 약물치료를 병행하면 기억을 대부분 회복할 수 있다며, 사라의 법적 보호자인 서광과 치료 일정을 잡기로 한다. 그러나 미라는 주치의와 서광이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 사실을 빌미로 주치의에게 사라의 약물치료를 미루도록 종용한다. 대체 그녀가 친동생의 기억을 묻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바로 다음날, 술자리를 갖던 서환이 음주운전으로 적발된다. 서광의 당선 직후로 그에 대한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서환이 일으킨 트러블은 언론뿐만 아니라 사이버 렉카 유튜버의 표적이 된다. 이때 미끼가 된 것은 레몬홀딩스가 과거에 저질렀던 주가조작 이슈다. 유튜버는 삼각대 앞에서 주가조작이 개미 투자자들에게 가했던 치명타를 운운하며 시청자의 후원을 유도한다. 이때 공연 중 실제로 촬영되는 유튜버의 방송은 무대 곳곳에 설치된 스크린에 동시 송출되며, 유튜브 매체가 지니는 무시 못할 파급력을 가시화한다.
 
그렇게 서광을 둘러싼 스캔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결국 정식 언론까지 가세해 과거의 논란이 재점화된다. 그리고 서환은 검찰 조사에도 참석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서광과 우진은 다급하게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나리오를 마련하려고 머리를 쓰지만, 거래내역이 전부 남겨져 있는 상태에선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서광은 이 상황을 마냥 안일하게 여기는 서환을 질타한다. 동생의 실수가 본인의 의정 활동의 발목을 잡을까봐 두려워서다. 그러나 서환은 역으로 형의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저지른 일이 아니었냐며 화를 낸다. 그러나 그가 서광을 뒷바라지한 것 또한 형을 이용해 국회의 의사결정에 가담함으로써, 기업인으로서 얻게 될 이익만을 철저히 계산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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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튜버가 라이브 방송을 켠 채 사라의 병원 앞까지 찾아온다. 유튜버는 병원 입구를 나서던 주치의를 마주친 뒤 서광을 발견하고, 그를 뒤쫓아 취조하려 든다. 그러자 주치의는 그를 밀치며 온몸으로 카메라를 막는다. 이 모습이 실시간으로 방송되면서 서광과 주치의 사이의 묘한 기류마저도 영상으로 제작되어 매체를 떠돌면서 그를 둘러싼 스캔들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러나 서광이 주치의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들자, 앙금을 품은 그녀는 유튜버의 인터뷰에 응해 비밀을 폭로하게 된다.
 
그 결정적인 비밀은 서광과 우진에게 극도의 충격을 가한다. 바로 기억을 잃은 사라가 사실은 사라가 아닌, 사고 당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간호사라는 사실이다. 이는 미라와 서환이 MH그룹의 비리를 사라 한 명의 혐의로 몰기 위해 펼친 계략이었다. 환자가 전신 화상을 입어 신변 확인이 어렵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간호사를 사고 직후의 트라우마로 다른 사람처럼 변한 사라로 위장시켜, 그녀로부터 혐의 인정에 필요한 서류에 서명을 받기까지 했다.

이 사실을 전부 알게 된 서환과 우진은,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뒤늦게 발을 빼려 든다. 그러나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 서환이 이번 사건의 결정적 증거가 되는 음성 파일을 튼다. 제아무리 서광과 우진이 직접적인 환자 바꿔치기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사실이 세상에 밝혀지면 이들의 앞날은 끝장이다. 미라마저도 이 녹음본의 존재를 몰랐기에 세 명의 인물들은 서환에게서 녹음기를 빼앗으려고 격렬한 몸다툼을 벌인다. 그러던 중 난장판이 일시정지 화면처럼 멈추고, 유튜버가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네 인물들을 한 명 한 명 카메라에 담으며 서사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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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의 모든 인물들은 돈을 향한 탐욕과 개인의 이익에만 눈먼 인간들의 최후를 보여준다. 구서광을 비롯한 네 명의 인물들은 물론이고, 사이버 렉카 유튜버마저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타인의 결점과 자극적인 이슈를 물어뜯는 인물이다. 그가 서환의 부덕을 밝히는데 활약한 것은 맞지만 그 행위가 순전한 선의에서 비롯되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무대 위에서 마치 드라마의 요약본처럼 밀도 있게 몰아친다. 80분 동안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과 갈등의 구조, 사건의 내막이 전부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압축적이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연극 속 서사는 더없이 극적으로, 또 약간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사실 무대 위의 그림은 우리의 현실 사회를 투명하게 비추고 있다.
 
기업인이야 사익을 노리는 것을 문제 삼을 수 없지만,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 구성원마저도 저마다의 사욕을 기꺼이 추구하면서 부당한 이해관계에 단단하게 결부되는 현실이다. 그들의 병폐를 감시하고 지탄해야 할 언론마저도 마찬가지다. 이때 각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친밀함과 혈연관계의 끈끈함 등으로 견고하게 무장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연결고리는 예기치 못하게 단시간에 무력히 붕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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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카르텔이 유지될 수 있었던 조건은 사라의 죽음이라는 진실이 파헤쳐지기 전까지만 유효했다. 그 위태로웠던 균형 상태, 즉 각자의 이익이 겨우내 지속되었던 찰나의 순간에만 이들의 결속이 가능했을 뿐이다. 이 점은 이들이 간절히 공유했던 ‘돈’이라는 지향점이 사실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내보인다. 돈에 조종당해 선택했던 행위들이, 종국에는 돈의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는 참혹한 결말을 낳는다.

이들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행태와는 달리, 그 과정에서 철저한 절대악을 행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다. 이들은 서로의 기능을 파악해 상대를 활용하면서 그릇된 길을 동행하지만, 철저히 계산된 행동을 인간다운 관계로 위장하고 서로뿐만 아니라 스스로까지도 속이려 든다. 이 지점이 그들을 파멸로 몰고 간다. 이들은 돈이라는 목표로 단결해 한 배를 탔지만, 미라와 서환은 서광 앞에서는 병실에 누워 있는 사라의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서광은 생전의 사라를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기만했음에도, 미라와 서환이 숨긴 진실만은 도덕적으로 용납하지 못한다.

극악한 결론을 남겨둔 상태에서도 마지막으로 남은 양심 한 조각이라도 붙잡으려는 이들의 모습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들의 결말을 곱씹다 보니 몇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돈다. 물질이라는 가치를 좇는 것이 인간 본연의 습성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시대가 나아가는 방향성이 그릇된 것은 아닌가? 부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떤 악행도 불사할 수 있는 시대, 돈 우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시대를 경각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 앞에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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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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