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The Shape of Empathy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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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감은 어려워
어느 날, 친구가 울었다. 내게 나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실은 그게 어떤 일이었는지 그에게 충분히 설명하지도 못했는데,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이미 똑똑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인 내 눈물은 쏙 들어가 버렸고, 상황이 역전되어 오히려 내가 그를 달래 주고 있었다. 그 그림이 너무나 황당하여 나도 모르게 나쁜 일은 몽땅 잊어버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그에게 가끔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울 수 있었느냐고. 심지어 그건 네 일도 아니었는데. 그러면 친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한다. '몰라, 그냥 그렇게 되던데?' 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배우고 싶다. 공감은 어떻게 하는 걸까? 아닌 게 아니라, 공감은 어렵다. 내가 '어렵다'는 술어를 사용한 이유는, 공감을 '잘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관심 분야를 좇아가다 보니, 여전히 사회로부터 소외와 차별의 대상이 된 이들의 문제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 쉬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나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있는가?
'느끼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타인에게 발생한 문제를 마치 내 일처럼 여기고 마음 깊이 공감한다면 당장 시급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공감은 자주 정열과 추진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문자로 학습한 당위에 따라서만 사고한다면,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논의와 탁상공론, 딱 거기까지밖에 나아가지 못한다. 내가 배우고 말하고 쓰는 모든 것들이 그저 오만 또는 기만이 되지 않으려면, 타인의 삶에 깊이 공감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차치하고, 막연하게 생각해 보면 타인의 감정에 귀 기울이는 세상이 그렇지 않은 세상보다 더 따뜻한, 사람 냄새가 나는 공간일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생각과는 반대로 오히려 공감에 대한 회의감 내지는 피로감이 관찰되고 있다.
단적인 예시로, MBTI 논쟁이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MBTI는, 이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흔한 형식이 되었다. 네 가지 기준 중, T와 F의 차이가 가장 명쾌하다. S와 N이 무엇이 다른지 묻는다면 대게 얼버무리거나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곤 하는데, 그와 달리 T와 F는 속이 다 시원할 만큼 명확한 단어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성'과 '감정'이다. 극단적인 구분은 종종 유머의 소재로 쓰인다. F와 T의 갈등을 묘사하는 밈(meme)이 그러한데, 그 내용은 주로 다음과 같다.
친구가 '나 오늘 몸이 안 좋아'라고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T와 F는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성으로 대표되는 T는 '병원에 가'라며 해결책을 제시하고, 감성으로 대표되는 F는 '어떡해, 아프겠다, 괜찮아?'라며 정서적 반응을 내비치는 식이다.
이러한 차이는, 종종 '공감 능력'의 틀에서 해석되어, 감정적인 F는 공감을 잘하고 이성적인 T는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곤 한다. 그 결과 F가 T에게 '왜 공감하지 않느냐'며 질타하고, 공감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질려 버린 T는 급기야 '내가 왜 공감해야 해?'라고 한탄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사실상 어불성설이다. 그 이유인즉슨,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과 공감 능력의 부족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공감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으로 정의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공감 능력이란 타인의 입장에 스스로를 대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정서적 반응이라도 기계적 맞장구에 불과하다면 오히려 상대방의 힘을 쭉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상대의 곤란함에 진심으로 동조하여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우, 의도치 않은 감동에 더하여 실질적인 도움까지 받을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에 따르면, 공감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바로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이다. 타인의 정서 상태를 그대로 경험하고 공유하는 것이 정서적 공감이라면, 인지적 공감은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서적 공감 능력은 낮지만 인지적 공감 능력은 높은 경우도 충분히 개연성 있다. 단순히 반응의 형태만 보고 타인의 공감 능력을 판단하기란 어렵다.
해결책이니 정서적 반응이니 하는 것은 공감 그 이후의 이야기이며, 공감이라는 내용을 담는 형식에 불과하다. 만약 내가 상대방의 반응에 상처받았다면, 상대가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형태의 공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 감정에 대한 오래된 오해
앞선 MBTI 논쟁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공감은 종종 이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으로 여겨진다. 오직 풍부한 감수성을 타고난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공감이 불필요하고 소모적이라 주장하는데, 감정에 매몰되어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해결책을 다루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이성과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흔히들 이성과 감정은 대척점에 있다고들 오해하지만, 나는 이 오래된 오해를 푸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싶다. 이와 관련하여, 마사 누스바움 저 <시적 정의>를 주목할 만한 도서로 소개한다.
'감정적이다'는 표현은 종종 '맹목적이다'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에, 누스바움은 감정이 (이성을 벗어난) '맹목적인 동물적 힘'이어서 그 어떤 판단도 담지 않고 그저 분출될 뿐이라는 비판에 대해, 감정은 단순히 느낌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믿음과 판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지주의적 입장으로 반박한다. 즉, 감정 역시 일련의 인지적 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종종 감정에도 단어 사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슬프다'는 단어만 아는 사람과, '울적하다', '서럽다', '저릿하다', '먹먹하다' 등 얼핏 유사하지만 다른 뉘앙스의 단어들을 아는 사람, 이 둘이 느끼는 감정의 폭은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단순히 표현 형식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컨대 뉴스에서 접한 사건은, 헤드라인만 읽고 넘긴 사람에게는 지나가는 수많은 일 중 하나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내막을 파헤치고 진상을 알게 된다면, 분노 또는 슬픔의 감정이 극대화되어, 더는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일이 된다.
알지 못하면,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공감은 단순한 감정적 추돌이 아닌, 이성을 통한 '앎'으로써 실천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이성과 감정이 배타적 반의 관계가 아닌 긴밀한 연관성을 지님을 시사한다.
3. 공감이 왜 필요한가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T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앞선 논의를 통해 납득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공감을 '할 수 있다'가 아닌 '해야 한다'라는 당위 영역으로 포섭하려면,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어지는 내용은 '내가 왜 공감해야 해?'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1) 성숙한 시민사회와 사회적 발전
다시 <시적 정의>로 돌아가서, 앞서 이성과 감정은 긴밀히 연관된 개념이라고 언급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둘은 '상호'적인 관계다. 위 문단에서 설명했듯 이성적 인지 과정을 통해 감정이 형성될 수 있으며, 반대로 감정 역시 이성의 작용을 활발히 촉진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감이 우리 사회에 가져다주는 순기능이 드러난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를 시민사회의 공적 합리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앞서 소개했던 뉴스 예시에서, 진상을 알게 된 시청자는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이때, 그의 분노는 개인적 감정에만 머물기보다 법과 제도라는 사회 구조의 실질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좋은 문학이란 대부분의 역사 및 사회과학적 글쓰기가 갖지 않는 혼란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좋은 문학은 우리에게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불안을 야기하며,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는 전통적인 경건함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향을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우리 각각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사람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듣게 되고, 그렇게 배운 지식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 심리적 동일시와 감정적 반응을 촉진하는 문학 작품들은 직면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을 보게 하고 또 그에 반응하기를 요구하면서 자기방어적 계략을 깨부순다.
시적 정의, 34pg
위 인용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격렬한 감정을 느낄 때 비로소 해묵은 관습을 의심하고 관성에 제동을 걸 수 있다. 감정이 그 자체로 실질적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혹자의 비판은 성립할지 몰라도, 감정이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문제의식'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은, 공동체의 비판적 성찰 차원에서 감정을 결코 경시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감정을 통해 촉발된 공적 논의는 그 자체로도 성숙한 시민사회에 한 걸음 다가섰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공론장에서의 논의는 유의미한 변화와 사회적 발전으로의 이행까지 견인할 수 있다. 계몽주의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외쳤던 '의심하라!'라는 이성의 명령은, 감정을 통해 달성할 수 있던 것이다.
더하여, 누스바움은 공적 합리성을 위한 감정의 자극제로서, 특히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문학에 몰입하면서, 독자는 작품 속 인물들과 자신이 '연결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이를 통해 독자의 감정과 (특히 인지적 공감을 위해 필수 요소인) 상상력이 왕성해진다.
떠올려 보건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지 않았다면, 이미 산업화 이후의 혜택을 누리며 살던 사람들이 이전 세대 판자촌 도시 하층민, 나아가 오늘날 유사한 문제를 겪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떠올리기라도 할 수 있었을까. 문학은, 그저 표지 한 장 넘길 용기만 지불한다면, 겪어보지 못한 방대한 삶으로의 초대장을 건넨다. 인문학이 단순한 유희 그 이상이며, 여전히 소설이 필요한 이유다.
(2) 유대감 형성을 통한 공동체 유지
공감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공감은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다. 특히나, 최근 개인의 삶은 점차 다분화되고 있다. 높아지는 소득 격차와 라이프스타일의 다양성은,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삶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라이프스타일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런데, 이처럼 사회가 원자화될수록 개인 간 상호 의존성은 더욱 강해지고, 우리는 파편화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필연을 끌어안는다.
이때, 너무나도 다른 개인이 하나의 공동체에서 살아가려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타인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공감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회가 분화되는 만큼 타인의 삶을 직접 경험할 기회는 점차 제한되고, 직접 겪을 수 없다면, 입장을 상상하고 헤아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지 않을까. 공감 자체를 거부하는 주장은, 그러므로, 실상 외딴섬에서 살아가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혹자는 공감에 대한 피로감이 개인주의로의 이행이 낳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서, 공동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개인주의의 기원을 떠올려 보자. 개인주의는 왕실이나 종교 등의 폭압으로부터 개인의 존엄성과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등장했다. 즉, 개인주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문법이지, 공동체 자체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극단적으로는 타인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
무엇보다, 개인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공동체가 필요하다. 더욱 정확히는, 개인주의 사회일수록 건강한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건강한 공동체'란, 모든 개인이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각자의 권리를 주장할 때 그에 응할 수 있는 자원과 능력을 갖춘, 완충제로서의 사회적 안전망을 말한다. 각자 스스로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많은 경우 국가나 사회와 같은 공동체에 기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문제에 공감하고 함께 고민하는 자세는, 얼핏 보기엔 남 좋은 일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뒤집어 생각하면 나의 존엄이 위험에 처할 때 동일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과 믿음을 공고화하는 행위다. 이것이, 개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배경하에서도 여전히 공동체와 공감이 중요한 이유다.
4. 마무리하며 - 공감과 공존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공감은, 사실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즉, 타인의 말끝마다 호들갑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의 정서적 반응을 취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고 상대방 말에 무조건 동의하라는 주장도 아니다. 공감과 동감은 다르기에, 공감은 타인의 입장에 스스로를 대입해 헤아리는 행위이며, 판단은 그 이후의 몫이다
공감의 형태는 실로 다양하다.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공감을 하지 않았다고 상대를 나무라는 것은, 자칫 폭력적일 수 있다. 서로 다른 공감의 형태를 공유하고 무엇이 자신에게 맞는지에 대한 대화는, 건강한 관계를 위해 필수적이다.
그런데, 공감 자체를 부정하는 사회, 타인의 입장을 단 한 번도 헤아리지 못하고 '내가 왜 공감해야 해?'라는 무심함으로만 일관하는 사회에, 과연 인정이라는 게 있을까.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공동체는 단순한 개인들의 합이 아니며, 그 잉여의 부피를 차지하는 것은 다양한 개인을 연결해 주는 끈끈한 유대감이다. 집단을 견고하게 지탱해 주는 인정과 유대가 부재한 공동체는, 달걀로 쌓은 탑 위에서 춤을 추는, 누란지위의 운명이다.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너무나 취약한 존재다. 각자도생의 험난한 자연에서, 유약한 인간은 긴 뒷다리도 날카로운 송곳니도 알록달록한 보호색도 없이 진화했다. 그 대신,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힘을 합칠 능력이 있었으며, 인류는 이로써 문명을 이루고 생존해 왔다.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태어나는 즉시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의 크고 작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우리에게, 공감은, 분명히 필요하다.
[김채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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