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성탄절에, 선생님께

글 입력 2022.12.26 17:3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성탄절.jpg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잘 지내시는지요. 크리스마스마다 선생님께서 사주셨던 양말이 다 해지도록 신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양말들 작아서 신지도 못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네요. 겨울에는 유독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나는 것도 같습니다. 아무래도 겨울에 자주 찾아뵀던 탓이겠지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어떤 겨울들을 났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많이 시려웠을 겁니다.

 

소식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빠는 유학을 갔습니다. 머리가 좋으니 기회가 생겨서, 그 길로 바로 떠났습니다. 연락 한 통 없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니 그저 마음 놓고 있습니다. 아, 기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씩 엽서를 보내오는데 아무 말도 적혀 있지 않아 어찌 지내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냥, 어디 있는지라도 알 수 있는 데에 만족하고 있어요. 요즘 세상에 SNS 하나 안 하는 사람 없다고들 하지만 그건 오빠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그래도 오빠는 씩씩하니까, 그냥 마음 놓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 영어 공부 많이 해서 다음엔 꼭 멋있는 크리스마스카드 만들어주겠다고 하더니, 머리 크고 정말 유학을 떠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선생님도 들은 적 있으실 겁니다. 자고 일어나니 현이랑 제 머리맡에 눈사람이 그려진 카드가 놓여있어서 산타가 두고 갔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했었거든요.

 

그런데 Chrismas에 t는 어디 갔냐며, 네 산타는 촌뜨기 산타냐고 친구들이 놀렸던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눈이 침침하실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현이가 대든 덕분에 더 영악한 말을 들은 기억은 없지만, 그걸 들은 오빠는 많이 속상해했어요. 그래서 나중엔 꼭 멋있는 카드 만들어주겠다고 했었던 거고요. 카드 만들어줄 나이는 지났지만 그래도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니 잘 됐다고 생각해요. 언제까지 기다리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


저는 이것저것 하며 살고 있습니다. 윤이 일 있고 회사를 그만뒀었는데, 다시 일자리를 구하려니 영 쉽지가 않네요. 기운을 차린 것이냐 물으신다면,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꿈에서 윤이 대뜸 먹고 살 돈은 있냐 묻기에 없다 답하니 울상을 짓더군요. 표정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그래서 구하는 중입니다. 다음엔 있다고 답하려고요. 그런데 제가 쓰일 구석이 없나 봅니다. 세상은 넓은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지요. 윤은 저 하나면 세상 살아갈 수 있댔는데, 다른 이들에겐 영 무용한 듯합니다.


다들 웃기 바쁜 요즘이지만 저는 울기 바빠 참 야속한 날들입니다. 원래는 윤이 저를 잘 웃겨주었는데, 이젠 그러질 않습니다. 이보다 더 미울 수가 있을까요. 선생님께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셨죠. 선생님의 하느님은 공평하십니까. 저는 제가 전생에 무엇을 해서 이러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왜 이리 박하고 무정하냔 말입니다. 왜 이리 다들 멀리 있는 것인지 연유 좀 알고 싶습니다.


배 타는 사람은 마음 쓸 일이 많으니 웬만하면 만나지 말라던 친구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 매번 이국에서 기념품을 사들고 오면 재미나긴 했지만, 괜히 걱정스럽긴 했었습니다. 매번 불안했던 것도 같아요. 그래도 좋아하던 물로 돌아갔으니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좋아한다던 나한테는 왜 돌아오질 않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우선 그 커다란 배가 어떻게 뒤집어진 것인지 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직도 벽에는 윤이랑 찍은 사진들이 붙어있어요. 제 손으로 떼어내지 못하겠습니다. 속에서도 떼어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웃고 있는 사람을 버립니까. 볼수록 비참하지만서도 참으로 예쁜 웃음이라 계속 들여다보고, 한참을 보고 있으면 울컥 쫓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한참 지났건만 여즉 이래서, 언제까지 이럴지 잘 모르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윤을 껴안는데, 옷이 축축해 무슨 일이냐 물으면 답도 듣기 전에 꿈에서 깹니다. 요즘 들어 더 자주 나와요. 꼬박 28일째입니다. 크리스마스마다 같이 케이크를 먹기로 했었는데, 그래서 찾아오는 걸까요.

 

죄송합니다.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은 이야기로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


시릴 적마다 선생님이 떠오르는 이 습관적인 반응은 어릴 적 기억들 때문일 테지요. 아직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열심히 배웠고, 적어도 이제 집은 춥지 않습니다.


어제는 밤이 길었습니다. 선생님이랑 오빠랑 현이랑 같이 조랭이떡 넣은 팥죽 먹으며 칠칠맞다 잔소리 듣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가끔은 그때로 돌아가도 나쁠 것 없겠다, 싶습니다. 그때면 윤이도 살아서 어디선가 저녁을 먹고 있겠지요. 집은 춥겠지만, 어쩌면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군소리만 많았습니다. 앓기 쉬운 계절이니, 단단히 여미셔야 합니다. 무탈하시면 좋겠습니다. 편지를 언제 부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날이 좀 풀리고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매서운 날씨에 드리기엔 조금 쓸쓸한 말들만 많은 것 같아서요. 어쩌면 부치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셔야 합니다.

 

<醒嘆節>

 

 

아트인사이트 태그.jpg

 

 

[이주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11.1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