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불안으로의 초대 - 레이디스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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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좋아했던 '캐롤'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레이디스]는 '캐롤'로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초기 심리소설 열여섯 편을 묶은 단편집이다. 1936년부터 1949년까지 집필한 수록 작품들은 오 헨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캐롤이 좋았던 이유는 캐롤과 테레즈의 감정을 굉장히 긴장감 있게 그렸던 점 때문이다.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과정에서 서로의 오감에 의존하는 장면은 범인을 물색하는 추리물처럼 강렬하고도 세심했다.
그때부터 기억하고 있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초기 심리소설이라는 점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은 인간이 불안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상황 속의 심리가 묘사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제일 충격적이었던 단편들을 몇 개 뽑아봤다.
특히 이 [최고로 멋진 아침]이란 단편은 이 책의 대표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바뀌는 순간이 굉장히 미묘하고도 파괴적이었다.
최고로 멋진 아침
["생각이 어지러웠지만 어떤 감정인지 당장 파악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어떤 면에서 부족했던 걸까? 그의 어디가 잘못됐기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마을에 녹아들지 못한 걸까? 수수께끼 같은 치욕은 뉴욕 시절보다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았다. 자기가 통제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고, 자기 안에서 추방할 수도 없는 오류 같았다. 다음 순간, 찰나의 순간에, 어설픈 비전은 뚝 끊기고 죄책감과 그 원인에 다시금 사로잡혔다."]
뉴욕에서 도시의 부품으로서 살던 택시 운전사 애런은 새로운 삶을 찾고 싶었다. 완전히 새로운 삶. 복잡한 도시 풍경과 교통 정체, 차가운 도시 사람들을 벗어난 삶. 애런이 정착하고자 했던 클레먼트 마을은 완벽했다. 한가롭게 즐기는 아침 식사와 커피, 그리고 정겨운 이웃들.
완벽하게 평화로운 소설의 도입부였다. 그러나 단순히 '빤히 쳐다보는 호플리 부인의 시선'만으로 조금씩 서스펜스가 쌓이기 시작한다. 무언가 잘못된 걸까? 자신을 자꾸 되돌아보게 만드는 시선. 그 시선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늘어간다. 특히 어쩌다 만나게 된 프레야라는 아이와 친하게 지낼수록 애런은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애런은 이제 마냥 따뜻하게만 느꼈던 클레먼트 마을에서 추방의 위험을 느낀다. 뉴욕에서 항상 느꼈던 생존의 위협. 진짜 생존이 아닌 사회 속의 생존. 잊히고 외면당하는 사회적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잊고 있었던 사회 속으로 들어가려 발버둥친다.
그 속에서 우리가 애런의 비전과 애런을 통해 느꼈던 카타르시스가 마구 망가진다. 돌이킬 수 없는 추방을 통해 애통해지고 어떻게 그 평화로웠던 곳에서 이런 절망을 느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의 사회를 관통하는 절망감과 비통함이 잘 표현된 소설이었다.
영웅
[영웅]은 확실한 광기였다. 그러나 숨겨지고 불확실한 광기였기 때문에 불안에 떨며 글을 읽어야만 했다.
["그녀는 다섯 군데에 불을 붙여두었고, 이제 이 불길들이 손가락들처럼 저택을 타고 올라갔다. 따뜻하게 명멸하며,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루실은 미소 띤 얼굴로, 어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휘발유 탱크가 너무 뜨거워진 나머지 대포 같은 소리를 내며 폭발해 한순간 광경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 이거야말로 기다리던 신호였다는 듯, 루실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이들에 대한 헌신을 증명하고자 한 가정교사 루실은 영웅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을 불길 속에서 구하는 정도의 헌신을 보여준다면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루실은 자신이 어머니의 정신병을 닮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곳에서 그 유전자에서 도망쳤다고. 그러나 그녀가 헌신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방화를 택한 건 결국 그녀가 어머니의 유전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밝고 따뜻하고 일을 잘하는 줄로만 알던 가정교사가 방화를 저지르는 결말로 치닫기까지.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싸우게 된다. 치솟는 불을 보며 흥분하는 루실에게 보이는 광기는 이 글을 아우르고 있던 서스펜스의 근거가 된다.
애프턴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
["현실이 허물어지는 감각이 멈추고 비뚤어졌던 세상이 다시 바로 서고 단단해져서 호텔 로비처럼 약간 허름한 모습으로, 타일 바닥을 밟는 행인의 구두 뒤축 아래 모래 소리처럼 구체적인 모습으로 돌아오고, 애프턴 부인의 모습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뉴욕의 빡빡한 정신과 예약 일정에 지친 바우어 박사는 파리를 떠오르게 하는 애프턴 부인을 만난다. 그녀에 끌리는 것과 별개로 그녀가 가진 고민은 바우어 박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녀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타나지 않는 남편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연기하는 애프턴 부인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바우어 박사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는 의외로 희미하게 흥미를 띄는 미소를 지었다.
애프턴 부인을 속으로 재단하는 바우어 박사.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 인생에서 그를 제대로 속이는 애프턴 부인. 우리는 바우어 박사의 시점에서 굉장한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다.
["아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콧구멍에 손을 댈 수 없어서, 손을 움직일 수 없어서. 그러다 한쪽 눈 바로 앞에서, 한 뼘 앞에서, 그가 알기로, 예전에 문 근처 화분에 심겨 있던 고무나무였던 것이 보였다. 달팽이 한 쌍이 그 위에서 조용히 짝짓기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바로 옆에서, 이슬만큼이나 투명한 작은 달팽이들이 넓어진 그들의 세계를 향해 전진하는 무한의 군대처럼 뿜어 나오고 있었다."]
작은 달팽이들이 많아봤자 얼마나 늘 수 있을까? 그러나 달팽이들은 한번 알을 낳으면 수백 마리까지 번식이 가능하다. 단기간에 서재 하나를 모두 채울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번식력은 끝내는 노퍼트를 죽음까지 몰고 갔다.
무한한 군대같이 밀고 들어오는 달팽이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력감은 굉장한 공포감을 심어준다. 노퍼트의 죽음 속에서 조용히 짝짓기 하는 달팽이들. 이 얼마나 거대하고 무력한 공포인가.
하이스미스는 고작 달팽이로 이런 감정들을 느끼게 만들 수 있었다.
*
하이스미스가 만드는 서스펜스는 여러 종류였다. 그래서 책을 통해 다양한 종류의 서스펜스를 모두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평화를 깨는 불안감.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 하나로 한적한 오후의 일요일이 어느 스릴러 영화로 탈바꿈되곤 한다. 하이스미스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아주 잘 이용했다. 불안은 너무 순식간에 그리고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나는 심지어 안정감을 느끼는 게 무서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평화로워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그녀의 16개의 단편집을 모아둔 책 [레이디스]는 한마디로 "불안으로의 초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상에서 비일상이 되는 찰나의 순간. 미묘한 포인트를 꼬집는.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화롭다고 느낄 때에도 우리는 이따금 극도의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다. 불안이 인간 심리에 작용됐을 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말도 안되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지금 생각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 순간 현실이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상이 비일상이 되는 순간.
생각보다 일상 속에는 그런 순간들이 많다. 하이스미스는 그 순간을 포착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결국 불안의 정도의 차이인 것이다. 광기와 같은 확실한 불안 혹은 저 사람이 나를 알아볼까 하는 작은 불안과 걱정, 병이 옮진 않을까 하는 걱정. 처음 이사 온 동네에서 말을 건 아이가 나를 무시할 때의 불안감. 내가 믿는 게 모두 거짓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
한편으로는 이렇게나 다양한 종류의 불안감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묘사하는 하이스미스가 얼마나 인간 심리에 대해 깊이 고뇌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대표적인 글 외에도 수녀원에서 길러져 결국 수녀원을 폭파하는 남자아이의 이야기부터 남의 러브레터에 답장하는 사랑에 실패한 남자까지. 읽을 수록 하이스미스의 상상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안개처럼 깔려 있는 불안과 긴장 때문에 단순한 이야기임에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공 같았다.
[박소희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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