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은 벽이 되어 돌아온다 [드라마/예능]

드라마 <MIU404>
글 입력 2022.12.1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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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들. 선들이 보였다. 세훈은 대학에 들어가 이상한 종교 단체나 피라미드 업체에 끌고 가려는 사람들을 거절하며 희미한 선들을 보는 법을 배웠다. 넘기 전에는 희미하다. 넘고 나면 선이 아니라 벽이 된다. 아주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꽤 힘들어진다. 살면서 그런 선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게 될까. 넘어가게 될까.] - 정세랑 <피프티 피플>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들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그어놓은 선, 상대가 그어놓은 선, 사회가 그어놓은 선, 윤리가 그어놓은 선... 그 선들 중에는 유난히 자국이 희미해서, 넘어가도 넘어간 줄도 모르는 것도 있다. 무언가 잘못됐다 싶어 되돌아가려고 할 때, 드높은 벽과 마주하고 그제야 깨닫는다. 내가 방금 넘은 것이 일상과 비일상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이었음을.

 

 

 

드라마 MIU404


 

 

해당 리뷰는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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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U404는 2020년 6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일본 TBS 테레비에서 방영한 11부작 드라마로, 2018년 호평을 받은 드라마 <언내추럴>을 쓴 일본의 각본가 노기 아키코가 집필한 수사물이다. 사건의 초동 수사를 담당하는 경시청 '기동 수사대'에 소속한 두 명의 형사가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제4 기동 수사대'라는 가상의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드라마의 제목은 제4 기동 수사대 중에서도 주인공 '시마 카즈미(호시노 겐)'와 '이부키 아이(아야노 고)'가 타고 다니는 순찰차 '기수 404'에서 착안된 것이다.

 

 

 

일상과 비일상을 가로지르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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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길은 올곧지 않아. 장애물이 있거나, 그걸 잘 피했다고 생각했더니 옆에서 밀려서 다른 길로 들어서거나. 이런저런 걸 하는 사이에 죄를 지어버려. 어떤 스위치로 인해서, 길을 잘못 들게 되지."

 

형사처분 이후 남는 전과 기록을 '빨간 줄'이라고 흔히 말한다.

 

살면서 마주하는 여러 개의 선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이처럼 사회가 그어놓은 '범죄'라는 빨간 줄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누가 이 선을 넘는 걸까,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의문의 해답은 없다. 애초에 선은 넘고 싶어서 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선을 '넘어버린' 것일 뿐이다. 

 

 

 

선을 넘어버린 사람들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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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나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오늘 나에게 해를 끼치는 누군가도 다른 사람에게는 은인일 수도 있다. 그게 사람이다. 입체적이다 못해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

 

시마와 이부키가 마주하는 사람들도 그러했다. 그들도 누군가에게는 자랑스러운 자식이었으며, 다정한 친구였으며, 고마운 직장 동료였을 테다. 하지만 '범죄'라는 경계선을 넘었을 때, 그들은 단순히 '범죄자'가 되었다.

 

찰나의 행동으로 그어진 빨간 줄은 벽이 되어 돌아온다.

 

이는 2화의 에피소드에서 확실하게 보여준다. 유년 시절, 아버지의 학대로 생긴 트라우마로 오늘날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카가미. 그도 처음부터 아버지와 같이 '범죄'라는 경계선을 넘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카가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경계선을 넘어버렸고, 추격하는 시마와 이부키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되돌아가는 길은 '살인'이라는 벽으로 막혀버렸기 때문에.

 

카가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는 성실한 직원이었다. 동료들도, 심지어 경찰들마저도 어쩌면 카가미가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찰나의 행동으로 그는 그저 '범죄자'가 되었고, 시마와 이부키에게 붙잡힌다.


이 드라마의 반동 인물인 '쿠즈미(스다 마사키)'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도시에 위법 약물을 유통하고, 충분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학생인 나라카와가 범죄라는 경계선을 넘도록 종용하며, 허위 제보를 하여 같은 시각에 일어난 사건들의 초동 수사를 방해하는 등 누가 봐도 '악한 짓'을 작중 내내, 그것도 꾸준히 해낸다.

 

한번 경계선을 넘은 쿠즈미는 자신을 쫓는 시마와 이부키를 피해 계속 선을 넘고, 그 너머의 선을 넘고, 또 다른 선을 넘으며 도망친다. 결국 두 사람에게 붙잡힌 그는 그저 '악행 가득한 범죄자'로서의 취급을 받게 된다. 그도 누군가에게는 범죄자가 아닌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쿠즈미는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한다. 결국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그가 경계선을 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쿠즈미도 카가미처럼 되돌아가는 길이 벽으로 막혀, 계속 선을 넘어야 했던 건 아닐까. 그 선들이 벽으로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벽을 넘을 수 있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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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따라 장애물의 수는 달라.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사람도 있어. 누구를 만나느냐, 만나지 않느냐. 이 사람의 목적지를 바꾸는 스위치는 무엇일까. 그때가 올 때까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어."

 

선은 벽이 되어 돌아온다. 그렇다면 선을 넘은 사람은 영원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걸까? 이 드라마에서는 확실한 답을 내놓는다. '그렇지 않다'라고 말이다.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스위치를 마주하느냐, 그것에 따라서 선을 넘은 사람은 충분히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드높은 벽을 마주했을 때 위압감에 압도당한 사람은 절대 돌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벽을 넘어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벽을 뚫어 문을 만드는 것이다. 이 문을 만드는 건 혼자서는 절대 쉽지 않다. 그래서 경찰과 사법 기관이 존재하고, 형법 제도라는 게 존재한다. 일상과 비일상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을 넘은 사람들이 벽을 넘어올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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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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