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우리만의 작별연습 - 연극 '세컨드 찬스'

글 입력 2022.12.06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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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골든레코드, ‘Key to the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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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휘원

 

 

모든 자식은 부모와 헤어지게 될 운명이다.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일 때, 병원에 가는 일이 점점 늘어날 때,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은 사람과의 이별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난다. 결말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그 결말을 맞이하기 전 헤어지는 연습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연극 <세컨드 찬스>는 우리가 작별을 준비할 수 있다면 현재가 어떻게 달라질지 생각하며 시작된 연극이다.


대부분의 자식이 그러하듯 윤혜숙 연출 역시 아버지의 암 진단을 계기로 아버지와의 이별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평소 우주장을 해달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린 윤 연출은 ‘Key to the Moon’이라는 레코드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1977년 지구의 각종 정보와 메시지 등을 담은 골든레코드를 보이저호에 넣어 우주로 발사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흔적이 담긴 레코드를 우주로 보낼 유골함에 넣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을 만드는 과정이 극의 주된 내용이 된다. 1인극으로, 작/연출/출연 모두를 맡은 윤 연출이 75분간 공연을 이끌어간다.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작과 끝은 같을지라도 과정이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장례식은 왜 그렇게 천편일률적인 걸까. 사람의 삶이 다 다르다면 작별 역시 모두 다른 방식어야 하고, 작별 연습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윤 연출의 작별 연습이란 단순히 유언을 듣고 장례 절차를 알아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조용히 추도식을 치르려다가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우리만의 골든레코드’에 담을 것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우리가 모르는 당신의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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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우리만의 골든레코드를 만들기로 결심은 했지만, 문제는 골든레코드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막막하다는 것.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윤 서방 왔네.” 할 정도로 아버지와 닮은 딸, 얼굴 생김새부터 사소한 습관까지 많은 것을 물려받은 딸이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그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다. ‘Key to the moon’을 만들기 위해 윤 연출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탐색한다. 작별을 준비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사람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이 된다. 그 과정은 무대 위에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의 연출로 그려지기에 관객은 장면마다 눈을 뗄 수 없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매일 동묘에 가서 점심을 먹는 루틴이 있다. 하지만 딸은 그가 정확히 어느 식당에 가서 무엇을 먹는지 잘 알지 못하고, 동행해본 적도 없다. 같이 밥을 먹자고 할 때마다 아버지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번에야말로 아버지가 매번 가는 식당에서 함께 식사할 기회라며 윤 연출은 아주 작은 단서 하나로 아버지의 목적지를 추리해낸다. 이 과정은 윤 연출이 직접 아버지를 찾아 동묘 거리를 헤매는 영상과 넥스트의 노래 ‘Here I stand for you’를 통해 극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연출된다.


아버지가 없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아버지의 물건을 훑어보는 장면 역시 흥미롭다. 이는 실제 윤 연출이 아버지의 집에서 촬영한 영상이 무대 위에서 재생되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보여진다. 아버지의 공책에 적힌 글, 포스트잇 속 메모, 현관문 옆에 붙은 ‘달’이라고 적힌 뜻 모를 표시. 집안 곳고셍는 딸이 알지 못하는 시간을 지나며 아버지가 남겼을 흔적이 가득하다. 몇몇 기록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어떤 기록은 영영 알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자식은 당연하게도 부모를 다 알지 못한다. ‘아버지’라는 호칭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면면을 그의 집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누군가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은 그가 세상에 나타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긴 궤적을 더듬는 일이다. 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연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은 '윤혜숙 연출의 아버지'라는 추상적인 대상에서 ‘윤기문’이라는 구체적인 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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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휘원

 

 

작별 연습으로 시작된 연극이지만 끝날 때가 되면 이 연극이 사실은 기억에 관한 극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오래 살아남는 것은 그의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연극이 시작될 때 윤 연출은 관객에게 에디슨이 만들었다는 최초의 축음기를 소개한다. 소리를 저장할 수 있는 기기의 발명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소리만이 아니라 사진도, 영상도 손쉽게 저장하는 2022년은 떠나는 사람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좋은 시대일지도 모른다. <세컨드 찬스>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음악과 사진, 영상을 폭넓게 활용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오래되고 훌륭한 저장 매체는 사람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총체적인 기억은 영상, 사진, 녹음기 속 저장된 데이터를 아득하게 초월한다. 극 중 아버지는 대부분 윤 연출이 대신하지만, 때로는 축음기에 아버지의 패딩을 입히고 모자를 씌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사람 그 자체, 또는 그가 가진 기억이 축음기에 저장된 음성과 비슷한 성격을 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게다가 사람은 자식을 통해 유전자를 남기기도 한다. 유전자는 우리의 몸을 이루며 부모의 부모, 그 부모까지 가지고 있었을 사소한 기호부터 습관, 성격, 질병에 이르기까지 물려준다. 축음기가 과거의 영상을 지금 이 순간 재생하는 것처럼, 유전자는 한 사람이 그 부모를 재현하도록 만든다. 윤혜숙 연출의 얼굴에는 아버지 윤기문의 얼굴이 있고 그의 행동에도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기에, 윤기문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계속 세상을 흐른다.

 

기억에 기억을 쌓고, 연습을 해봐도 이별의 감각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유쾌하게 진행되는 연극을 보면서도 계속 먹먹한 기분이 드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 작별 연습을 통해 우리는 언젠가 떠나보내야 하는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지 배워간다. 조금 더 잘 헤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연극이 끝나고 집으로 향하며, 나만의 작별 연습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 생각해본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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