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유로운 정신의 죽음을 달라, '사이버펑크 2077'

글 입력 2022.11.27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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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정신의 죽음을 달라, 사이버펑크 2077

무지성 게이머 6편 : PC 게임 '사이버펑크 2077'

 

*

이 글은 사이버펑크 2077에 관한

리뷰가 아닌 감상문입니다.

스포일러 주의!

 

 

 

1. 아름다운 빈 깡통, 나이트시티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를 본 후, 처박아뒀던 사이버펑크 2077을 다시 플레이했다. 두 콘텐츠 다 즐겁게 즐긴 입장에서 감상을 말해보자면, 사이버펑크는 장르는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사이버펑크 세계에서는 자본이 인간을 지배한다. 각팍한 도시에서 인간 외의 생물은 대부분 멸종하고, 인공적으로 만든 톱밥 같은 음식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씹어먹는다.

 

나이트시티에서는 생존이 최우선 가치로 자리 잡는다. 매일매일 하루 사망자 수로 복권을 추첨하고, 길에서 다 타버린 담배 줍는 것보다 총 맞는 게 더 쉽다. 경찰은 기업과의 계약을 통해 대외적으로 무능한 모습만을 보여준다. 언론은 경찰을 신랄하게 까는 역할을 하면서 인기를 얻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나이트시티의 대부분의 사람은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고, 그 불안을 이용하여 보험사, 무기밀매, 보안 기업들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그래서 나이트 시티에서 돈은 전지전능하다. 돈만 있다면 사이버 펑크 세계에서 정체성은 커스텀 아바타와 같은 것이다. 온몸을 기계로 바꿀 수 있고, 브레인댄스를 통해 타인의 삶을 내 삶처럼 생생하게 느껴볼 수도 있다. 몸 대부분을 기계화시켜 인간이 기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에 가깝게 묘사된다.

 

간혹 몸을 너무 기계화시켜서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말 그대로 '고장나버리는' 사이버사이코들도 존재한다. 사이버사이코는 인간의 물질화와 물질의 파괴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하지만 몸을 대체하지 않은 인간들은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니 온 몸을 개조한 이들에게도 마땅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육체와 정신, 정체성의 문제를 물질이 대체한 모습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세계가 바로 나이트시티다.

 

언제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자아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정체성이 구매나 교환을 통해 다듬어지는 것이라면 관계를 만들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기업의 논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을 꾸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다른 생명은 꺼진 인간밖에 남지 않은 세계, 남은 인간마저도 물질에 가까워진 시대에서도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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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브레이크 없는 동력원



사이버펑크의 매력은 화려하지만, 생명력이 사라진 도시를 누비는 것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물질세계에서 채우지 못한 순수한 충동을 가진 주인공들은 고철 같은 세상에서 더욱 빛난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에서는 데이비드, '사이버펑크 2077'에서는 조니 실버핸드는 이러한 세계에서 빛날 수 있도록 잘 빚어진 캐릭터다.

 

물질에 대한 욕망은 자기애를 부추긴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시장의 상품 논리에서 사랑은 교환이 이루어지는 매대 위에서 잔혹하게 해체된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지키면서 살아간다. 애니메이션 내내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닌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어머니 글로리아와 똑 닮아있다. 어머니 역시 아들을 위해 살아갔지만, 그녀의 소망은 다른 방식으로 데이비드에게 평생의 낙인으로 찍히게 된다.

 

글로리아가 가진 감정과 목적은 숭고했지만, 냉혹한 도시에서 숭고한 가치는 대부분 왜곡된다. 데이비드를 위해 훔친 산테비스탄이 데이비드의 삶을 자기파괴의 길로 이끌었으니 글로리아의 목표는 좌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데이비드 역시 같은 길을 걷는다. 그는 언제나 순수한 감정과 목적으로 행동하지만, 성찰이 제거된 목적만 남은 행동은 순수한 충동으로만 변질되어 자기 파괴로 이어진다.

 

글로리아는 아들의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바랐고, 메인은 데이비드에게 생존할만한 힘을 바랐다. 루시는 데이비드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바랐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엣지러너의 삶을 살고, 너무 많은 임플란트에 통제력마저 잃어간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사랑하는 동료를 잃고, 데이비드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루시의 약속마저 지키지 못한다. 이렇게 쓰고 나니 데이비드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는 생각보다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가 없다. 루시의 소망을 윙해 데이비드가 산테비스탄 착용을 그만두었으면, 더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데이비드는 나이트시티에서 벗어난 인물이면서, 단절이라는 나이트시티의 비극을 그대로 재현한 인물이다. 인간성이 제거된 나이트시티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파괴라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트시티의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생존이 아니라 죽음을 목표로 달려야 한다. 브레이크 없이 기름이 끓어오르는 동력만 남은 도시와 개인의 삶은 끝을 맞이할 때 까지 찬란하게 빛나지만, 그 끝에서는 참혹한 모습으로 파괴된다. 이런 아름다운 파괴가 이 쇠락해가는 도시의 유일한 아름다움이나 기적으로 남는 것이다. 반대로 그만큼이나 나이트시티의 장래가 어둡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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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2077의 조니 실버핸드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니 실버핸드에서 디스코엘리시움의 해리 드 부아 형사가 많이 연상되었다. 캐릭터의 설정 면에선 감성적이고 행동 양식이 거창해서 믿을 수 없지만, 그 자체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인간성의 싹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고, 무엇보다 해리 드 부아 형사가 '디스코'에 심취하여 번영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조니 실버핸드도 2023년에서 추출되어 2077년까지 망령이 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조니실버핸드의 사이드퀘스트는 2023년에 그들이 공유했던 어떤 것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니 실버핸드라는 캐릭터는 광기에 가까운 반항심과 열정에 차있는 인물이다. 조니는 대안을 제시하거나 숙고하지 않고 거대한 힘과 부조리에 맞선다. 데이비드와 다르게 조니는 나르시시스트로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다. 기업의 질서를 거부하는 조니 실버핸드 V는 조니가 관계와 인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을 돕고, 그가 느꼈던 권력의 흉포함에 관한 맹렬한 악의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다.

 

이처럼 사이버펑크의 주인공들은 물질세계의 질서를 거부하고 자기파괴로 달려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이트시티에서는 희생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선택지밖에 없지만, 자유와 죽음만은 그 자신의 몫으로 남겨둔다. 명백히 잘못된 선택지로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도 이들이 물질이 되지 않기 위해 저항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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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가며



한때 MBTI가 유행처럼 들끓었다. 많은 사람이 AI 발달로 인한 개인화 서비스와 자기표현에 초점이 맞춰진 플랫폼의 대중화가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 있다고 속삭인다. 개인적으로 이유가 무엇이었건 이러한 현상 자체가 이 모든 것이 정체성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나라는 자아의 인식과 타자와의 관계는 모두 지지부진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어떤 시대를 지나오건 나와 너의 인식은 느린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느린 것들을 도태시키고 있다. 경쟁적이고 불안정한 직업 환경에서 일반적인 직업은 성별분업에 기초한 핵가족의 형태가 개인에게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 지지기반으로 기능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시간과 거리를 초월한 노동환경에서 전문성을 갖추는 것을 강제 당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랑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받지 않는,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지향하게 되었다.

 

통신기술과 자본주의 논리의 만남은 사랑의 대상을 타자화, 상품화, 대상화하고 있다. 현대인의 경제적 박탈감과 계급적 불안을 잘 드러내는 현상은 최근 유통되는 단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쿨찐', '인셀', '한녀' 등으로 사랑의 주체가 되는 존재들의 능력적, 육체적인 면모를 깎아내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침투해온 자본은 사랑은 교환의 논리에서 존재의의를 잃어가고 있다.품과 경쟁의 논리는 들끓는 기름처럼 우리를 불태우고, 사랑은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선택할 수 없는 교환상품이 되었다.

 

정체성은 놀이가 아니다. 교환은 우리의 정신을 결코 대체할 수 없다. 지루하고 얽매여오는 사랑의 위협 속에서야 우리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이버펑크 세계관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이 소울킬러로 복사하고 찍어낸 듯한 정체성으로부터 저항해야 한다. 사이버펑크 세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슴 아리게 꽂히는 이유는 나이트시티의 비인간성이 오늘날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이버펑크에서는 물질이 만연한 사회에서 물질이 되지 않은 인간을 그린다.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표현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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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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