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우리의 난감한 헤엄은 세상에 존재하려는 철학이 되지 - 물속의 철학자들

우리는 함께 철학을 한다. 이 엉망진창이고 무섭고 아름다운 세계에서.
글 입력 2022.11.26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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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철학을 한다. 

이 엉망진창이고 무섭고

아름다운 세계에서.

 

 

나의 사색은 철학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아니 의문이 든다. 철학책을 읽는 나는 정말 철학을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사소한 질문 같은데, 솔직히 어떤 답을 내놔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질문이 맞는 질문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럼 나는 여태 철학책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철학이란 울타리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는 걸까.

 

그럼 철학은 대체 뭐야.

 

이거 참, 외계인보다 낯선 게 철학이 아닐까. 하지만 지극히 '인간다운 웅얼거림'을 꼽으라면 나는 철학이라 답하고 싶다. 이것만큼 인간만이 하는 것도 없고, 인간 때문에 생긴 것도 없지 않은가. 모르겠다. '철학 하는 인간'이란 것이 너무 낯설어 보인다.

 

그리고, 이번에는 달랐다. 무엇이 달랐느냐고 묻는다면,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해보려고 한다. 어쩌면 나는 처음으로 일상에 스며들어온 철학을 보았다. 아니지, 일상적인 순간이기에 비로소 삶에서 배어날 수 있었던 철학의 순간을 보았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토록 소소한 형태로 짙은 농도를 품은 철학을 처음 보았다. 

 

우리는 세상이란 물속으로 침잠한다. 내 바깥을 둘러싼 세계와 내 안을 품고 있는 세계 모두에. 함께, 또는 홀로. 손바닥에 느껴지지만 결국 한 방울도 온전히 잡을 수 없는 물속에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여전히 흐릿한 나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바보 같은 고민과 질문의 반복일지도 모를 몸부림을 치기 위해. 타인의 철학이 아닌, 내가 존재하려면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소소하고 깊은 철학 속으로.

 

 

『물속의 철학자들』

_나가이 레이

 

 

물속의 철학자들_표1.jpg

 

 

[PRESS]

우리의 난감한 헤엄은 세상에 존재하려는 철학이 되지

 

 

『물속의 철학자들』은 철학을 전공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철학 대화*를 이끌어가는 저자의 일상과 사색이 담긴 책이다. 단순히 철학책이라기엔 사사로운 에세이 같고, 그저 일상을 말하는 에세이라기엔 저자가 글로 펼쳐내는 풍경은 분명 철학 하는 풍경이다.

 

* "철학 대화란 간단히 말해서 철학적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곰곰이 생각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이다. 평소 당연하다고 여긴 것에 새삼 의문을 품고 차근차근 생각해서 이야기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깜짝하고 깨닫기도 한다." (16p. 에서 저자의 설명을 발췌. 미국의 철학자 매튜 리프먼이 1970년대에 개발한 '어린이 철학'에서 비롯된 대화 방법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철학을 시작하기보다 '무언가에 의해'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일상은 철학의 기폭제로 가득하다.

 

- 135p.

 

 

초등학생들과 나눈 철학 대화 이야기부터, 살다 보면 엉뚱하게 떠올리곤 하는 질문까지. 다른 철학책에선 기대하지도, 보지도 못했던 다양한 철학이 이 책에 담겨있다. 저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논의의 주제가 되기는커녕 화제에도 올리지 않는 것(89p.)"이 어떻게 철학이 되는지 보여준다. 

 

 

한껏 꾸민 미용사가 내 뒤로 와서 싱긋 웃으며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라고 친절하게 묻는다. 거울에 비친 얼빠진 내 얼굴을 보면서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뭘까?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은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싶나요?'라는 뜻인 동시에 '당신은 어떤 인생을 보내겠어요?'라는 뜻이기도 하다. (...)

 

얼음처럼 굳어버린 내 옆에서 다른 손님이 유창하게 원하는 바를 전달한다. '나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거나 알려고 하는 사람인 것이다. "친구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해서요."라는 말도 들린다. 타인의 말에 제대로 귀 기울이는 사람이다. 대단하네. 옆자리의 미용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님의 말을 듣고는 "고객님의 머릿결을 생각하면 이런 것도 추천하는데요."라며 대화를 시작한다. 미용사는 고객의 인생을 함께 고민해주는 탐구자인 것이다.

 

철학이다. 철학이 벌어지고 있다. 

 

-160p.~161p.


 

책에 나오는 질문이나 순간들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한 번쯤은 다가왔던 것들이었다. 그 덕에 글을 따라가는 시선이 경쾌하면서도 묵직한 굽 소리를 냈다. "그래... 나도 모르겠어. 앞으로도 모를지도 몰라." "나도 그런 이상한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는데"라며 책을 읽는 의식의 흐름에선 공감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실없는 공감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마저 왠지 기꺼워지는 책과의 만남이고 이야기들이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그런데 나도 그런 적이 있고, 너도 그런 적이 있어. 그런 흔한 이야기에 철학의 무게가 스며들듯 실린다. 

 

우리는 모호한 질문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 예를 떠올리기는 아주 쉽다.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책 속 한 챕터의 제목처럼, 그야말로 "세계는 문제집"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실수가 반복되는 세계. 이런 정신 없는 와중에 당연하게도 철학은 우리를 구원해낼 수 없다. 무엇이 우릴 구원한단 말인가. 말 그대로 '답이 없다.' 걷잡을 수 없는 난제들이 공존하는 세계를 살아가지만 - '살 수밖에 없지만'이 더 정확할지도 - 내가 나의 발로 나의 세상에 서 있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물음을 건네 보고 싶다. 두 발로 서 있기 위해 내던져 왔던 모든 생각들이 사실 모두 철학이었다면 어떨까.

 


우리는 넘어지면서도 질문의 답을 찾으려고 계속 달린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언젠가 지치게 마련이다. 딱딱한 땅에 무릎을 꿇고, 몸 어디에서도 힘이 솟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어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그러면 천천히 체념이 다가온다. 체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나타난다. 배 속이 차가워지고, 까무룩 졸음이 쏟아지며, 세계에 짙은 안개가 끼는 게 느껴진다.


그럴 때에도 질문은 그림자처럼 내 곁에 있다. 그 순간 깨닫는다. 질문은 때로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때로는 나를 격려해주는 존재라고.


체념이 나를 먹어치우려는 순간, 질문은 나를 걱정스럽게 들여다본다. 도저히 모르겠어서 내팽개치고 싶을 때, 성급하게 답을 내버리고 싶을 때, 질문은 말한다. 아직 몰라, 아직 모르는 거야.


-117p.~118p.


 

1.jpg

 

 

결국 정답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다듬기 위해 고요히 혹은 고군분투로 생각에 잠기는 것. 아직은 모르겠고, 말하려니 표현되지 않고, 건네보려니 확신이 서지 않아 스스로가 바보 같아 보이는 순간들. 그 고군분투가 저자가 말하는 철학 속에선 물속에서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한 몸부림, 헤엄이 된다.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한 디딤돌, 내 생각을 찾으려는 몸부림. 『물속의 철학자들』에서 우리의 망설임은 무지(無知)가 아닌 내가 나로서 선명해지기 위한 '헤엄'이 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얻은 깨달음이자 위로가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얼마든지 헤엄쳐도 괜찮다. 모양 빠지는 어설픈 몸부림이어도, 새로운 음 하나를 찾지 못해 도돌이표만 밟아대는 마디에 갇혀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멎은 채로 고민에 잠겨있더라도 말이다. 숨통 한 번 또렷이 틀 수 있는 수면에 떠 오르는 그 잠깐의 찰나 때문에 온종일 헤매며 헤엄쳐도 괜찮다고. 

 

나를 난감하게 하는 물들이 가득 넘쳐흐르는 이곳.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난제들을 향해 온갖 것들을 쏟아붓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삶의 의미란 게 대체 뭐지?"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얼마만큼의 속도로 성취해내야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거지?" "이렇게 계속 고민하는 게 내 삶에 도움이 되기는 할까" 답을 찾기는커녕 의심만 반복되는 사이, 『물속의 철학자들』은 그저 그렇다고만 여겼던 '생각하는 일'들이 얼마나의 무게를 지닌 순간이었는지 보여준다. 결국 우리 모두 세상이란 물속의 철학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질문 때문에 쓰러질 듯해도 질문과 함께 계속 살아가는 것, 그것을 나는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철학의 역할은 익숙한 세계를 분쇄하고 놀라움을 주어 삶을 불안정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숨을 헐떡이며 땅에 쓰러져도 된다. 불안에 떨며 골머리를 앓아도 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함께, 질문과 함께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철학이다. 

 

-118p.~119p.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모호하고 알 수 없는 시간을 살아내려면 우리가 선명히 해야 할 건 '정답'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몸과 마음의 목소리들이 아닐까. 완벽한 자세라는 둥 정석은 없는 물속에서, 각자의 몸짓으로 물살을 일으키는 풍경들. 서로를 바라보며 당신의 몸짓을 따라 해보기도 하고, 서로 맞춰보려 하기도 하고, 당신을 보며 나를 돌아보기도 하는 그런 풍경. 

 

물속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흐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물속은 무수한 누군가들의 헤엄으로 헤집어지고 뒤집히며 새로운 공기를 맞이해온 게 아닐까. 그렇게 이 세상이 모두가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는 물속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가장 큰 위로를 받았던 책의 대목이 떠오른다. "의미가 떨어지면, 우리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다. 그 자리에는 의미도 이야기도 없다.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어, 거짓말이야, 의미 따위 없어도 괜찮아(174p.)"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를 타인에게 설득해야 하는 '이야기'라는 짐도 내려놓은 채 지그시 생각해 본다. 내가 지금 나의 눈과 나의 생각으로 존재한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 꽤 멋진 일처럼 느껴진다. 짊어지는 의미 없이 나의 리듬 따라 호흡하며 시선을 반짝이는 나의 모습. 반짝이는 시선으로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물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나의 모습.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존재는 생각보다 더 멋있을지도 모른다. 

 

*

 

이 엉망진창인 세계에서

계속 생각하기 위해,

부디, 계속 생각하죠.

-269p.

 

『물속의 철학자들』을 읽으며 했던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그랬듯, 이 책과의 시간은 기억될 동안만 내게 머물렀다가 곧 사라지겠지." 꼭 "어차피 살다 보면 나도 죽게 될 거야"라는 말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살짝 묘해졌다. "이 글에 기록한 생각들도 내게 잠시 머물다가 사라질 거야.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럴 거야." 회의적인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불현듯 나타났다가 자연스럽게 차츰 흐려지는 기억들로, 매 순간의 지금에 내가 존재하고 있는 거겠지"라고 읊조렸다. 그렇다면 이건 나의 철학일까. 다시 묻는다. 지금의 나는 내 생각을 새기는 이 문장들로 존재하고 있는 걸까? 왠지 이 물음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왠지, 왠지.

 

나는 지금 내가 나열하는 문장들로 존재한다. 이 문장은 곧 생각이고, 이는 곧 내 관점이자 삶의 방식이다. 이 존재는 시간이 흐르면 차츰 흐려질 것이다. 다음에 다가온 '또 다른 나'가 다음의 '지금'에 등장해 또 그만의 생각을 가지고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차츰 흐려지고 또 흐려지다가도, 나타나고 또 나타나는 '나.' 나의 철학은 그렇다. 

 

어푸어푸. 허우적거리며 머리만 겨우 빼꼼 내미는 어설픈 날갯짓의 접영. 나의 헤엄은 그렇다. 온갖 기를 쓰며 힘들게 헤엄치면서 그 결과물은 미약하기 짝이 없는. 지금 이 글도 겨우 꼬로록-거리는 철학의 잔재, 물방울들의 향연이다. 정말 난감한 풍경이지만 그런데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려 한다.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엉망진창으로라도 생각하며 내가 나로서 존재해야 할 테니까. 그렇게 특별한 것 하나 없는 나의 난감한 헤엄은, 세상에 존재하려는 철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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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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