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리석음과 비극의 되풀이를 막기 위해 - 이국에서

글 입력 2022.11.24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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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수주의적 경향이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잘살아야 되고, 자기들이 잘살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부끄러운 주장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공공연하게 합니다. 차별과 증오의 벽이 높아만 갑니다. -309쪽

황선호가 모시는 광역시장이 이번 재선에서 꼭 성공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뇌물 스캔들이 불거진다. 긴 회의 끝에 황선호는 책임자 한 명이 모든 비리와 부정을 뒤집어쓰고 선거에서 승리할 때까지 완벽하게 종적을 감추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황선호는 그 아이디어를 낼 때만 해도 자신이 그 담당자가 될 줄은 몰랐으나 시장은 황선호에게 부탁의 형식을 취한 지시를 내렸고, 그는 결국 '강진'이라는 위장 신분으로 보보민주공화국에 입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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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없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그에게 '친구들의 집'은 그럴듯한 지표가 되어주었다. 그는 '친구들의 집'을 찾아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으로 자신을 규정하기로 했다. -81쪽
 
나는 길을 잃을 수 없는 사람이다. 길을 잃으려면 목적지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82쪽

황선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강진'이라는 사람으로 보보민주공화국에서 6개월(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시장을 잘 모시는 것, 시장을 위해 일하는 그의 목적은 사라졌다. 목적이 없는 삶은 곧 목적지가 없는 끝없는 여정이다. 길을 잃을 수조차 없는 공허한 상태의 우리는 그 어느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 살아감의 목적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선거를 위해 온갖 비리를 뒤집어쓸 사람, 즉 재선 성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던 한국에서의 황선호는 그렇게 다시 존재하게 된다.

황선호는 보보의 한 골목에 앉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이 더럽고 악취가 심한 거리를 떠도는 바람은 이리 저리 쓰레기를 옮긴다. 분별력이 없는 바람은 쓰레기를 옮김으로써 도시를 더욱 더럽게 만든다. 이러한 난봉은 심술이 아닌 무절제와 무분별에 기인한다.

보보민주공화국은 수많은 외지인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국민들은 그러한 것에 익숙하며 외지인에 대해 오히려 무관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국가가 그들을 외부인으로, 국가 혼란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국민들은 곧 분별력이 없는 바람과 같이 외부인을 향해 난봉을 부리기 시작했다.

쟝은 극단적인 차별주의자들이 정권의 비호 아래 독버섯처럼 늘어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291쪽
 
쟝이 이야기하듯 불안과 갈등, 차별, 혐오, 위험과 같은 것들은 사람들을 솔깃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부정적인 것들의 원인은 제거되어야 할 것, 그리고 그 제거되어야 할 대상은 언제든 우리 집단의 외부로 내쫓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발딛고 서있는 곳으로부터 위험 요소를 완벽하게 제거해 안전해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원인이 되는 것은 그 무엇보다 갈등, 차별, 혐오, 위험에 취약한 것들이다. 우리는 어째서 무분별하게도 그러한 난봉을 부리는 것인가?

*

그는 그저 놓여 있다. 낯선 곳에 잊힌 상태로 놓여 있는 자의 외로움을 넘어설 수 있는 외로움은 없다. 죽은 자에게 외로움을 부여한 것은 산 자의 선택(하지 않음)이다. -301쪽

작년 9월, 국군 전사자 유해 봉환식이 열렸다. 6·25 전쟁 당시 전사하신 호국영웅 두 분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온 것이다. 이후에도 한국과 미국이 각 국의 전사자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식이 있기도 했다. 자신의 나라를 떠나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들의 거처를 결정할 수 있는 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광역시에서 황선호는 원하는 것이 많았고 원하지 않는 것도 많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할 일이 많았고, 하지 않을 일도 많았다. -11쪽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방이다. 외부인은 안 된다. 그 말은 관계자 중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27쪽

책의 초반 부분에서, 작가는 하나를 단정지어 서술하지 않는 문체를 자주 사용했다. A라고 이야기하다가도 그 다음 문장에서 곧바로 A가 아닐 수 있다고 반박하거나, A', A''를 부연 설명하는 등이었다. 책의 도입 부분에서 이도 저도 아닌 듯한 내용들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다보니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답답하기도 했다. 이 특징 탓에 방금 읽은 글자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다시 앞쪽부터 읽은 적도 여러 번이다. 이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점차 희미해졌다. 그렇다면 앞부분에 왜 이런 문장들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는가?

이 책은 내부와 외부 그 사이 어딘가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글이다. 보보민주공화국은 자신의 국가를 떠난 수많은 외부인이 내부인처럼 살고 있는 곳이지만 곧 국가적 차원에서 그 경계를 명확하게 그음으로써 그들은 영영 외부인으로 남게 되었다. 하나의 책상을 나누어 쓰는 학생들은 그들 간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아도 저들의 합의를 통해 공간을 공유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사이에 선을 긋는다면 그 때부터 그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했는지의 여부를 두고 싸우는 일은 당연하게 되어 버린다. 무언가를 정의 내리고 이름 붙이는 일은 곧 그들을 그 틀에 가두는 걸 의미하기에 수많은 고민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봤을 때, 작가 역시 그러한 고민을 거쳤기에 모호하게 보일 수도 있는 문장들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책의 도입부는 곧 이 책에 대한 소개와도 같기 때문에 작가는 더더욱 독자들이 무언가를 섣불리 판단내리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과정은 사실 책을 다 읽은 후 이 글을 쓰면서 마침내 얻게 되었다. 정확하게 무엇이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보다 경계가 모호한 내부와 외부에 대한 서술을 하자니 모든 글자들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작가 역시 이런 마음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상황과 겹쳐보인 부분이 꽤 많다. 타국에서 생을 달리한 사람들을 고국으로 데리고 오지 못 한다거나,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세상 어딘가에 내버려두는 일.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차별과 혐오를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바깥으로 내보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점점 자연스러워지는 상황 등. 우리는 그런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옳은 길을 향해 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어리석음과 비극의 되풀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일들을 통해 앞으로의 날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

이승우 -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일기] [신중한 사람] [모르는 사람들] [사랑이 한 일], 장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 [생의 이면] [그곳이 어디든] [식물들의 사생활] [지상의 노래] [사랑의 생애] [캉탕] 등을 냈다. 대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다수의 작품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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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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