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를 다시 숨 쉬게 만드는 태초의 사랑, 그 사랑을 통한 치유 [영화]

기예르모 델 토로가 내리는 사랑의 정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글 입력 2022.11.0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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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겨울이 다가올 때면. 가벼운 옷들을 옷장 깊숙이 집어넣고 포근한 코트와 패딩을 꺼낼 준비를 하는 날이면. 추운 몸을 녹여줄 두터운 외투와 목도리를 찾듯이, 괜히 따뜻한 로맨스 영화가 그리워지곤 한다. <러브 액츄얼리>와 <어바웃 타임>이 노래하는 사랑 찬가가 추운 겨울을 따스히 안아주고, <캐롤>과 <윤희에게>의 따뜻한 그리움이 꽁꽁 언 마음을 녹이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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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 그러한 영화다. 날씨가 추워지면 괜히 꺼내보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목소리를 잃은 공주.’ 마치 동화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서로의 상처와 결핍을 사랑으로 보듬어가는 이야기다. 차가운 현실에 맞서 자신의 가치와 서로의 존재를 지키려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내겐 꼭 얼어붙은 겨울 속 작은 난로처럼 다가왔다.


‘사랑은 무엇인가?’, ‘어떠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평생에 걸쳐 고민해도 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 ‘사랑’의 문제에 대해, 셰이프 오브 워터는 나름의 답을 내려준다. 영화 제목에서도 그러하듯, 사랑의 모양은 꼭 물과 같다는 것. 투명한 물에 무언가를 비추면 그 모습이 그대로 비치듯이,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바라보는 것.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형태 없는 물처럼, 있는 대로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2시간의 러닝 타임 내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진정한 사랑에는 형태가 없다’는 것.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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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에는

주인공이자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언어장애를 지닌 여성 ‘엘라이자’,

엘라이자와 청소부로 함께 일하는 수다스럽지만 믿음직하고 강인한 여성 ‘젤다’,

엘라이자가 의지하는 하나뿐인 이웃이자 가난한 화가 ‘자일스’,

그리고 연구소에 새로 온 보안 책임자 ‘리차드’가 있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 패권 경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영화는 미국 항공 우주 연구소의 비밀 실험실에 온몸이 청록색 비늘로 뒤덮인 ‘양서류 인간(괴생명체)’이 들어오며 시작된다. 관계자들은 그를 두고 민감한 물건이라 칭하고, 리차드는 전기 충격을 가하는 긴 곤봉으로 그를 길들이려 한다. 소련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하는 상황에 당면한 그들에게 양서류 인간은 그저 우주 관련 실험을 위한 ‘사물’과 같은 존재였던 것.


하지만 엘라이자는 달랐다. 엘라이자는 그의 신비한 청록색 피부에 이끌려 그가 갇혀있는 수조에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처음 겪는 환경이 낯설진 않을까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소리로 교감을 시도하고, 계란을 까서 건네주기도 하고, 수어도 알려주며 그와 가까워졌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느끼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엘라이자에게 그는 겉모습만 조금 다른, 그저 ‘인간’일 뿐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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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 안에서 가까워지기 시작한 그들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양서류 인간이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언어와 음악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구소. 그를 소련에서 노리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리차드는 하루빨리 죽여 해부할 마음을 먹는다. 그 계획을 엿듣게 된 엘라이자. 양서류 인간을 연구소에서 탈출시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삼엄한 연구소의 보안과 경비를 뚫을 순 없는 법. 자일스와 젤다가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보안 카메라의 위치를 돌려놓고 세탁소 차를 이용해서 양서류 인간을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한 그들. 엘라이자는 집의 욕조에 소금을 뿌린 물을 가득 채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파하기 시작한다. 물에 완전히 잠기지 않은 채 바깥공기에 오래 노출된 양서류 인간. 비늘이 뜯어지고 힘을 서서히 잃어가는 그를 보며, 엘라이자는 그를 살던 곳으로 보내줄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비가 쏟아지던 10일 밤, 물이 가득 찬 운하 앞에서 이별을 앞두고 서있던 두 사람과 자일스 앞에 양서류 인간의 행방을 쫓던 리차드가 나타나 그들을 끝까지 방해하고 공격한다. 하지만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다. 치유 능력을 갖고 있던 양서류 인간이 총을 맞은 부위를 회복하고 엘라이자와 자일스를 치료해 준 것. 이후 양서류 인간은 기절한 엘라이자를 소중히 안고 물속으로 함께 돌아간다. 양서류 인간이 물속에서 조심스럽게 입 맞추자 엘라이자의 목에 있던 상처가 아가미로 변하고, 마침내 엘라이자는 숨을 쉰다.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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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뻥긋거리고, 나도 그 사람처럼 소리를 못 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양서류 인간은 우리와 겉모습이 다르고 말을 하지 못하지만, 언어와 음악을 이해할 수 있고 나름의 방법으로 인간과 교감하며 소통한다. 영혼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라는 뜻이다. 하지만 명예, 이상, 성공만을 좇는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철저히 이용당하고 고통받는다. 영화는 목표 달성을 위해 누군가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의 단면을 연구소의 모습과 리차드라는 인물에게 투영시킨다. 양서류 인간은 패권 경쟁 및 물질적 가치 팽배의 시대 속에서 고통받고, 폭력과 파괴의 사회를 상징하는 리차드로부터 억압당한다.


물론 작중 고통받는 대상이 양서류 인간뿐인 것은 아니다. 엘라이자는 언어 장애를 갖고 있는 여성 청소부, 젤다는 흑인 여성 청소부라는 연유로 리차드에게 수시로 성희롱과 인종 차별을 당한다. 자일스는 동성애자라는 연유로 식당 점원에게서 ‘가족 레스토랑이니 출입하지 말라’는 혐오의 말을 듣는다. 영화는 그저 남들과 다른 점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소수자를 부당하게 외면하고 소외시키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남들과 다른 점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도, 사회의 일부는 종종 리차드처럼 개개인이 갖고 있는 차이점을 비정상, 모자람으로 치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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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엘라이자, 젤다, 자일스는 고통받고 힘들어할지언정 굴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 기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여기는 것, 사랑하는 존재를 지키는 것 등 여러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켜 나간다. 그 태도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강인함이 자신뿐만 아니라 서로를 보듬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하고 상대를 포용하는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과 불완전함까지 모두 나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소중한 이들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부당한 현실에 나름의 저항을 시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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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리차드는 어떤가. 양서류 인간에게 물린 후 썩어가는 손가락을 방치하다가 결국엔 꺾어버리는 장면이 리차드라는 인물의 특성을 잘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손가락에서는 내내 악취가 난다. 그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손가락을 치료하기는커녕 신경 쓰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결핍, 잘못, 모자람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겉모습, 품격, 품위를 지키는 것에 치중해 내면을 보지 못한다. 값비싼 캐딜락이 높은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고, 상관의 인정과 승진만이 품위를 높여준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자신의 모습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하니 남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권력과 품위가 자신을 우위에 있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기에 약자에게 차별적이고,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양서류 인간을 이용해도 되는 괴물이자 사물로 여기고 억압한다. 리차드를 보면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겉모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자연, 생명, 사랑을 상징하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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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주제는 작중 양서류 인간이 상징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첫째, 양서류 인간은 세속적 가치와 파괴적인 사회로부터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비주류로서 차별받는 대상을 상징한다. 둘째, 양서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치유와 회복 능력은 자연과 생명 존중의 가치를 나타낸다. 그가 연구소에 잡혀 오기 전 아마존 주민들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물속에 공물을 바치고, 석유 채굴을 막으려고 화살로 저항하는 등 자연을 경외하는 아마존 주민들에게 양서류 인간은 강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자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 마지막, 언어장애를 갖고 있는 엘라이자를 남들과 다르게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사랑하는 그는 내면의 가치를 바라보는 숭고한 사랑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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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사랑을 말하는 이 영화는 극명한 색 대비를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청록색은 극중 대부분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연구소를 포함한 여타 공간들 대부분이 녹색 계열로 채색돼 있고, 엘라이자가 평소 입고 다니는 옷 또한 청록색을 띠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양서류 인간과 처음 관계를 가진 후, 다음 날 그녀의 의상은 적색으로 변한다. 작품 속 적색은 진실하고 짙은 온도의 감정이자 내면을 바라보는 따뜻한 사랑을 상징하는 색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녹색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일단 전반적 공간을 녹색으로 설정해 엘라이자를 억압하는 차가운 현실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양서류 인간이 사는 곳인 물과, 엘라이자의 아가미가 돋아나며 숨을 쉬게 되는 강 또한 청록색인 것으로 미루어 보면 생명과 자연의 기운을 상징하는 포용의 색이기도 하다.


양서류 인간과 엘라이자를 감싸 안는 공간인 ‘물’은 작중 모든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 양서류 인간이 본래 살던 곳은 강이자, 그가 강에서 떠나온 후 지내는 곳은 수조와 욕조이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공간은 물이 가득 찬 욕실이고, 다음 날 그녀가 어루만지는 버스 창가에는 물방울이 가득 맺혀있다. 또한 고아인 엘라이자가 어렸을 적 버려진 공간도 강, 그녀 목의 흉터가 아가미로 바뀌며 다시 숨 쉬게 되는 공간도 강이다. 내면과 영혼의 숭고한 가치를 상징하는 엘라이자와, 자연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양서류 인간이 존재하거나 교감하는 공간에는 언제나 물이 존재한다. 이는 물이 곧 사랑이자 생명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하게 해준다. 모양이 없는 물처럼, 그리고 대상의 생김새 그대로 투영해 비추는 투명한 물처럼, 사랑과 생명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

 

 

 

사랑에는 형태가 없고, 모든 사랑은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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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날 바라보는 눈빛은 내가 어디가 모자란지, 어디가 불완전한지 모르는 눈빛이에요. 그 사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요. 날 볼 때마다 그 사람은 행복해해요.”


이 작품이 내리는 사랑의 정의가 가장 잘 담겨있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사전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쳐보면,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나온다. 성별, 인종, 직업, 겉모습에 관계없이 누군가가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재 자체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 모든 것이 전부 사랑이다.


 

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그대의 모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네

I find you all around me 내 곁엔 온통 그대뿐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love 그대의 존재는 사랑으로 내 눈을 가득 채우고

It humbles my heart 그대의 존재는 내 마음을 겸허하게 하네

For you are everywhere 그대는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의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시가 흘러나오는 순간, 양서류 인간이 엘라이자에게 입 맞추고 그녀의 흉터는 아가미로 변한다. 물속으로 돌아가 진정한 사랑의 결실을 맺자 그녀는 마침내 호흡했다. 다시 숨을 쉰다는 건, 다시 태어났다는 것.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을 채운 양수 속에서 태어나는 것처럼, 물속에서 그들은 다시 태어났다. 진정한 사랑은 그들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고, 그들은 태초의 사랑을 완성시켰다. 엘라이자를 둘러싼 모든 곳에 물이 존재했듯이 태초의 사랑은 보이지 않아도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다. 모든 곳, 모든 순간, 그리고 모두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감정 앞에서 당당하기를 바란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모든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 속에서 모두가 크게 숨 쉬며 살아있음을 느끼길 바라본다.

 

 

[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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