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980년 5월, 그날의 고백을 들은 오늘의 나는 [공연]

연극 <고백, 나는 광주에 있었습니다>
글 입력 2022.11.07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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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향인 광주를 내려갔다. 여전히 광주 청년들의 핫플레이스는 동명동이었기에, 그곳에서 친구들과 술 한잔하며 회포를 풀기 위해 여느 때처럼 금남로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구 전남도청 건물이 눈에 밟혔다.

 

쓸쓸해 보이는 새하얀 건물.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분수대까지.


그것은 지난날, 무대 위에서 보았던 1980년의 5월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연극 <고백, 나는 광주에 있었습니다>


 

 

해당 리뷰는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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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극단 푸른연극마을은 연극 <고백>의 서울과 광주 순회공연을 마쳤다. 연극 <고백>은 5·18 민중항쟁 42주기를 기념하여 5·18 기념재단에서 공모·선정한 작품으로, 1980년 5월 광주에 계엄군으로 왔던 이경남 목사의 인터뷰, ‘어느 특전 병사의 고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연극은 손으로 바닥을 쓸어 닦는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여자는 아무런 말 없이 손으로 바닥을 쓸어 닦는다. 나를 비롯한 관객들은 난해한 시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무용인가 싶다가도, 왜 많은 현대 무용 동작 중에서 ‘심히 알 수 없는 동작’을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의 물음표를 띄우며 연극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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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은 이정하라는 사내의 딸 영은의 시선으로 전개되지만, 스토리의 주축은 둘이다. 광주에서 중국 식당 <만호 반점>을 운영하는 강만호. 그리고 1980년 5월에 공수부대의 일원으로 광주에 왔던 이정하.

 

작품에 영감을 얻고 싶었던 연극배우 영은. 아버지 이정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광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호 반점>에 들어서게 된다. <만호 반점>의 시간은 1980년 5월에 멈춰있는 듯했다. 달력도, 메뉴판의 가격도, 그리고 사장인 강만호마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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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 중독에 더불어 치매기도 있던 만호. 그가 영은을 자신의 딸로 착각하게 되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80년 5월의 <만호 반점>을 보여준다.

 

2022년과 다르게 멀쩡한 모습의 강만호와 애교쟁이 만호의 딸 혜숙. 서로 썸 타고 있는 버스 안내양 민정과 구두닦이 영수. 그리고 확신의 개그캐, 철가방 봉식까지. 매일 투닥거리기 바쁘지만, 평화로운 다섯 사람의 일상을 보여준다.

 

저마다 소박한 꿈을 품은 채 살아가던 다섯 사람. 5월의 어느 날, 지산 유원지로 소풍을 떠나게 된다. 맛있는 것도 먹고, 자신들의 꿈을 적어 타임캡슐도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다섯 사람.

 

그러나 광주에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한순간에 붕괴된다.

 

*

 

군인들은 시민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사태를 파악한 그들은 허겁지겁 <만호 반점>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만호 반점>에 들어섰을 때는 만호의 딸 혜숙이 사라진 상태.

 

어쩔 줄 몰라 하던 네 사람은 결국 한 명씩 <만호 반점>을 떠난다. 영수는 만호를 대신해 혜숙을 찾기 위해, 민정은 연모하던 영수를 찾기 위해, 봉식은 돌아오지 않는 세 사람을 찾기 위해. 그렇게 혼자 남은 만호는 사라진 딸과 가족과도 같던 세 사람을 찾기 위해 떠돌아다닌다.

 

그러나 결국 <만호 반점>에 다시 돌아온 건, 만호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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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에 벌어진 만호의 비극과 아버지 정하의 행각,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영은은 아버지 이정하가 참회할 수 있는 연극을 만든다. 연극을 보며 1980년 광주에서 저질렀던 과오를 떠올린 이정하, 그는 종국에는 '무명 열사 묘' 앞에 무릎을 꿇고, 42년 만에 뒤늦은 사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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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의 막이 내렸을 때. 나는 도입부에 나왔던 여자의 몸짓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무 말 없이 손으로 바닥을 쓸어닦는 여자의 모습.

 

그녀는 42년 전, 숨결이 바람 되어버린 시민들의 피를 닦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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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오늘의 광주는 평화롭다. 나들이 나온 가족들은 분수대 앞에서 도란도란 사진을 찍고, 분수대의 옆에서는 청년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하하 호호 웃으며, 연령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구 도청을 지나친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잠시 1980년 5월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과거를 곱씹으며 마음이 미어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1980년의 과거를 마음에 품고서, 2022년의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

 

다만 그것뿐.

 

 

[임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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