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낡기만 한 것은 고전이 될 수 없다. [도서/문학]

글 입력 2022.10.20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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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의 거장. 스위스의 대문호. 영광스러운 노벨문학상의 수상자. 그를 지칭하는 화려한 수식어들조차 그가 문학사에 남긴 모든 위엄을 전부 담아낼 수는 없을 듯하다. <수레바퀴 아래서>(1906),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유리알 유희>(1943) 등 문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다수의 작품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대까지도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가 사랑 받는 이유가 된다. 아마 평소 문학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은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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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손꼽히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중에서도, <데미안>은 우리에게 가장 유명하고 친숙한 작품이다. 수많은 명사들과 문학 애호가들이 ‘인생작’으로 꾸준히 언급하는, 교양을 표방하는 미디어의 단골 소재이기도 한 <데미안>은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 작품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차 신선하지 않은 이야기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도 없이 읽히고 인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의 내용과 의미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이 가지는 또 다른 유명세는 난해한 문체와 내용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 이상으로 이해가 동반되기 위해서는 탐독을 넘어서는 인문학적 교양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작품에 차용된 신학 및 철학적 메타포에 대한 고찰 없이는 담겨 있는 메시지를 온전히 음미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좀 더 솔직하게는 일정 수준의 배경 지식을 갖춰다 하더라도 헤르만 헤세의 작품 의도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얼마 되지 않을 것도 같다. 작품을 읽은 뒤 한 동안을 <데미안>에 빠져 살았던 시기에, 인터넷, 유튜브,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존재하는 관련 콘텐츠까지 섭렵하면서, 학식 깨나 있다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차 <데미안>에 대한 해석이 엇갈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자 역시 작품 해석의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작품을 재생산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문학 작품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해석의 경지를 넘어 내용 자체에 대한 이해마저 어렵다는 평을 듣는 <데미안>은 분명 독자에게 친절한 작품은 아닌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데미안>은 여전히 명실상부한 최고의 명작이자, 영원한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일까? 필자 역시 <데미안>이 지니는 명성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 처음으로 읽었던 <데미안>은 어린 필자에게 거의 미제 사건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감동은 커녕 감상 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독서는 어린 마음에 어른들의 안목에 의심을 품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십 대 중반의 필자는 십 여 년 만에 재회한 <데미안>에서 작가의 짙은 고뇌를 마주쳤고,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위로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고전의 진가는 여러 번 읽을 수록 더욱 빛이 난다는 것을, <데미안>은 함께 나이 들어갈 만한 작품이 틀림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 배경에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삶에 본질적으로 놓여있는 가치를 조명한 헤르만 헤세의 통찰과 혜안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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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목소리를 좇아 방황한 헤세의 자전적 이야기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데미안>은 사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데미안>의 초판이 작품의 주인공과 동명인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간되었는데, 헤세의 문체를 알아본 열렬한 독자에 의해 그 정체가 탄로났다는 이야기는 작품 만큼이나 유명한 비화이기도 하다. 작가의 이름과 동일한 주인공의 이름. 이는 <데미안>이라는 작품 자체가 자아의 부름에 응하는 삶에 대해 끊임 없이 고뇌했던, 방황했던 지난 삶을 반성하는 헤세의 모든 내적 성장 서사가 담겨 있는 집약체 라는 점을 보여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서 유복하게 자란 싱클레어는 홧김에 내뱉은 거짓말로 프란츠 크로머에게 약점을 잡히고 협박을 당한다. 가족이라는 선의 세계에서만 머물던 싱클레어는 크로머로 인해 규율을 깨고 악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어느 날 싱클레어가 다니는 라틴어 학교로 전학 온 신비한 소년 막스 데미안은 크로머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해주었고,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접촉하며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관에 붕괴를 겪게 된다.


싱클레어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긴 방황을 겪기도 하고, 불안과 좌절에 휩싸이기도 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극심한 고통에 사로잡힐 때마다 그의 앞에 나타나 내면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끊임없는 방황의 끝에 전쟁통에서, 자아의 부름에 응하는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싱클레어는 비로소 모든 고뇌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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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의 첫 구절은 사실상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카인과 아벨, 베아트리체, 야곱, 압락사스, 에바 부인 등 작품에 나타나는 여러 인문학적 은유들을 전부 이해하려 했던 시도들이 무색하게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본질은 ‘자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간단한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헤세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아주 친절하게도 작품의 말머리부터 요약하여 제공했던 것이다.


물론 작품에 담겨 있는 메타포를 고려하면서 <데미안>을 읽는다면 더 풍부한 감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해 되지 않는 내용들을 전부 소화하려 노력하다 작품에 대한 흥미를 잃기 보다는 전체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며 읽는 것을 추천한다. <데미안>은 평생에 걸쳐 여러 번 반복하여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에 다음 번의 감상을 위해 여지를 남겨 두는 것도 나름 좋은 선택일 것이다.


내가 날 수 있는 꿈을 꾸었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어느 정도 큰 도약으로 대기를 가르고 내던져졌다. 이 비상의 느낌은 기운을 북돋우는 것이었으나, 내가 의지도 없이 위태로운 고공을 홱홱 날게 되자 그것은 곧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러나 호흡을 멈추었다가 한꺼번에 힘껏 토하는 식으로 내가 나의 상승과 하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구원 같은 발견을 했다.


과거의 청춘으로부터 전달된 메시지는 왜 현대의 청춘에게까지 깊은 울림을 선사했을까? <데미안>에는 단순히 시대적 배경에 갇히지 않는 젊음의 불안과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지금이나 백여 년 전, 아니 그 어떤 시대라도 청춘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물이 된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음을 의미할 뿐, 우리는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충분히 아파해야 한다.


더 이상 어른의 무게를 외면할 수 없는, 스스로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에 휩싸였던 이십 대의 정 중앙에서 다시금 <데미안>을 만난 또 하나의 청춘은 십 여년 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깊은 위로를 발견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내면의 목소리이며 이 삶의 주체는 자신 뿐이라는 헤세의 솔직한 반성은, 이 모든 방황이 전혀 부질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안도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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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열 한살이라는 다소 어린 나이에 <데미안>을 처음으로 접했다. 요즘에도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데미안>은 그 당시에 청소년 권장 도서였기 때문이다. 꽤나 독서를 즐겨하던 어린이였기에 또래보다 이르게 중고등학교 권장 도서를 섭렵하기도 했던 과거의 한 시점이었다. 그런 필자에게 <데미안>과의 조우는 책장을 덮을 때까지도 이해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어린 소녀가 급기야 독서에 대한 흥미 자체를 잃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이런 어려운 책을 읽게 시켰던 엄마를 조금 원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십여 년이 지날 때까지도 가슴 한 켠에 찝찝함으로 남았다. 다소 불쾌한 여운은 모순적이게도 언젠가 반드시 다시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다시 읽은 <데미안>은 어슴푸레 짐작만 했던 내면의 성장을 직접 목도한 계기였다. 십 년이 넘는 시간동안 축적해 온 지식, 경험, 생각 등은 사고력과 이해력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주었다.


만약 열한 살 보다는 조금 더 큰 나이에 <데미안>을 처음으로 읽었다면 애매하게 나마 존재하는 감상에 취해 <데미안>을 다시 읽을 의지를 갖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열한 살의 어린 아이가 이해의 단초를 전혀 세우지 못하고 완독하였다는 사실은 비록 어떠한 의미를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담겨 있는 울림을 가장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시기에 청년이 된 소녀를 다시 작품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언제나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필자는 <데미안>을 통해 이해의 부재로 남은 공백마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사실 여전히 필자에게 <데미안>은 공백을 가진 작품이다. 여전히 부족한 삶의 경험과 지식의 축적은 <데미안>의 온전한 가치를 전부 수용할 수는 없게 한다. 하지만 작품에 남아 있는 공백들은 싫기 보다는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 공백들이 결국은 살아가면서 <데미안>을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하여 감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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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전 읽기의 필요성을 느껴왔던 것과는 별개로 난해할 것이라는 편견은 그들에 접근하는 것을 꺼리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고전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전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시간의 흐름에도 퇴색되지 않는 메시지가 담긴, 스스로의 삶의 흐름에 맞춰 색다른 감동을 선사하는 고전. 필자 역시 고전과 같은 사람으로 나이가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그냥 낡은 것이 아닌,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가치 있는 것. 바랠 지 언정 언제나 그 아름다운 본질은 잃지 않는 것.

 

 

[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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