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월요일은 은혜로운 대체 공휴일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혜화에 다녀온다. 어제는 뮤지컬 테레즈 라캥, 오늘은 오즈의 의류수거함, 문화초대 신청 접수를 할 때야, 에이 어떻게 되겠거니, 생각하게 마련이라지만 날짜가 다가올수록 이런 낭패가 또 있나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말까지 리뷰를 다 어떻게 써내지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그쯤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는 주 토요일에는 당직근무를 하고서, 부랴부랴 늦지 않게 대학 동기 놈 결혼식에 참여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아 참 오늘 늑장을 부리느라 머리도 못했지, 대충 포마드로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간만에 서울은 추워졌다. 가을비가 쏘살거린 탓이다. 어제 시간에 허덕이며 혜화로 넘어온 기억이 학습되었기에, 일찍 나왔다. 이대로면 시작 30분 전에 도착해 여유만만히 담배도 피우고 서론도 써둘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흡족했다. 시온아트홀은 혜화역 1번 출구로 나와 100미터도 채 걷지 않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시온아트홀이 바로 보이는 골목에서 그러나 전화벨이 울린다. 나는 전화가 싫어요. 스팸이 아니고서야 웬만해선 업무 전화이기 때문에.
친구들은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카톡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 반경에서 살아가다가, 이따금 카톡을 턱 하니 남겨두면, 만나서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곤 한다. 그런데 전화라니, 역시나 고객사 팀장 전화이다. 내일 자 주문에 착오가 생겼단다. 젠장. 황급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돌렸다. 어, 어, 너 혹시 퇴근했니? 아까 전에? 그… 미안한데… 주문 수정 소요가 조금 생겨서… 어, 일단 고객사 담당자 통화해볼게. 네, 담당님. 네, 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수정이 생기면 저희가 대응할 방법이 없는데… 당직자들도 다 퇴근했구요… 네… 무조건 수정해야 한다구요…?
결국 여유 시간을 다 까먹고야 말았다. 어깨로 전화기를 받치며 표를 끊고 화장실을 들렀다가 객석에 앉으니 시작 2분 남았다. 무음 모드로 전환하고 본격적인 극이 시작할 때까지 카톡으로 업무를 봤다. 불안 소요가 많지만, 어떻게든 되겠거니… 아무튼 내일은 고된 하루가 되겠구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가슴 한 켠을 뻑지근하게 누른다. 이 마음은 가슴에 턱하니 세를 잡으면 좀체 빠져나가지를 않는다.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아니면 잊힐 때까지 자꾸 시큰거리는 것이, 아아, 내가 아직 프로 회사인이 되려면 멀었구나, 생각한다.
업무에 마음이 팔린 와중에도, 극장을 들어서는 순간에는 본의 아니게 객석의 사람들을 눈으로 훔치게 된다.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지는 않지만, 스윽 훔치는 눈결 마디 끝에 사람들의 실루엣이 실타래처럼 엮여 들곤 한다. 아뿔싸, 이거 어린이 연극인가? 대개가 중·고등학생이고, 더러 어린아이와 동행한 젊은 어머니들이 보인다. 객석을 가득 메운 까만 생머리들과 그들의 조잘거림에 섣부른 낭패감을 느끼며, 가만 제목을 다시 상기해보았다. 오즈, 그리고 의류수거함…? 이거 확실하다. 이건 청소년 뮤지컬이다. 속으로 진땀이 흘렀다.
그럴 것이, 나는 희망차고 밝은 것들이 더없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비단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어릴 때부터 어린이 동화나, 마당극 같은 것이 어려웠다. 그리 화목한 가정사를 갖고 있지는 않기에. 부모님은 내게 인생을 너무 빨리 가르쳤다고 이제 와 말씀하시곤 하지만, 여하간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다. 더구나 여러 글에서 밝혀온 것이지만, 부정편향적인 성향을 지녔기에 밝고 희망차고 긍정적이기만 한 서사에 마음은 쉽게 동조하지 않았다.
일부러 팔꿈치를 어깨높이까지, 발은 무릎높이까지 쳐들고 씩씩하고 양양하게 걷는 저 배우의 폼은 정말이지 어린아이를 위한 모양새이다. 노래하는 목소리는 맑고 투명했으며, 가사는 그야말로 명랑하다. 연극 초반에는 이 장면들 앞에서 홀로 시니컬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웃기지 않겠는가. 이런 연극의 객석에 혼자 앉아 비평하는 자세로 고개를 사선으로 빼 들고, 고독한 척, 점잔 빼고 있는 모습이야말로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테다. 그래서 속으로 나는 이 순간을 즐겨야만 한다고, 절박하게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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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괴도 도로시, 주인공의 별칭과 호칭을 종합하면 이런 신박한 단어가 나온다. 외고 입시에 실패 후 주변의 힐난하는 시선과 부정적인 평가에 크게 낙담한 주인공은 한국을 뜨기 위해 헌옷수거함을 서리하는 괴도가 되었단다. 언젠가 호주의 일상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 안에서, 그곳 청소년들이 태양이 내리쬐는 바다를 여유로이 유영하고 서핑을 즐기는 모습이 한없이 행복해 보였단다. 거기에는 평가나 경쟁이나 없겠지, 낙원인 호주로 넘어갈 자금을 모으는 때까지, 정의롭...지는 않지만 선량한 괴도가 된 그녀는 교복차림으로 밤을 활보하고 있다.
그녀는 헌옷수거함을 뒤지며 만나는 여러 사람과 친구가 된다. 어딘가 모르게 유식하고 시종 유쾌함과 유머를 잃지 않는 노숙자, 폐지 줍는 할머니, 헌 옷을 리폼해 판매하는 공정한 고용주 마녀, 그리고 그들이 식사하러 들르는 식당 포레스트의 주인장 마마까지, 만나는 누구나 하염이 없는 마음을 안고 있었고, 그들과 즉시 친구가 되어 한없이 선량한 마음으로 대면한 채, 화목하기 그지없는 미소만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도로시는 선창한다. 삶의 의지를 잃은 그 소년을 만나보고 싶어, 할머니의 집을 고쳐주고 싶어, 그러면 어른들은 답가 踏歌한다. 이건 어때~ 저 방법은 어떨까~?!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란 여과 없이 낙천적이라서 담대하기 짝없다. 자살 기도를 하는 어느 소년을 세상 바깥으로 끌어내 삶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보일러가 없는 할머니의 집을 수리해주기 위해 고급 아파트 단지의 의류수거함 사이를 누빈다. 비록 거기서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마음씨에 감화한 수리업체 사장님이 무상으로 추가 시공을 해주었단다. 이제 크리스마스 저녁에 모여 앉아, 켜둔 촛불 앞에 얼굴을 맞대는 그들의 모임새가 그 어떠할 텐가. 나는 자꾸만 한 켠 마음이 슬퍼지려 했다.
또, 그런 도로시의 곁을 지켜주는 어른들은 또 어떠한가. 노숙자는 자신의 생애에 대해 티끌만 한 힌트도 흘리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사연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아무런 부정한 기색도 없이 시종 유쾌한 인물이라니. 오히려 그는 자존심도 없는 양, 도로시의 천진함에 동화되어 동화의 주인공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고용주 마녀란 작자는 어떤가. 도로시에게 선량한 도둑질을 부추겨 불법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라지만, 마음에 아무런 죄악이 없다. 도로시를 착취하지도 않았고, 어린아이의 이타적이고도 이상적인 작전을 위해 얼마든지 조력하고, 아이들의 희노애락에 마찬가지 아이의 마음으로 공감하며 하나가 되는 저 모습이란.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내게 웃음의 자취가 스러진 지는 꽤 오래고 세상에 대한 기대, 낙천성은 그 기억을 찾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아무런 세상 홍진 紅塵이 찌들어 붙지 않은 마음과 탁성 濁聲 없는 목소리를 가진 도로시는 먼 구경거리가 된다. 쉬이 기대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내 마음, 이 고루함에 비친 도로시의 모습이란 그지없이 무구해 빛이 났고, 내 안에서는 질문이 응어리진다. 나는 지금 어떤 어른이 되어 있는가, 저들에 비쳐 되돌아오는 나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청소년 뮤지컬 리뷰로 그리 적합한 전개는 아니지만, 이것이 내 가장 솔직한 생각이다. 어른, 혹은 어른이로서의 리뷰. 이 글은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한 리뷰이다. 인간의 사특함이 모조리 멸균된 괴이한 세계, 한없이 동화적인 세계, 그러므로 존재치 않는 세계의 앞에서 나는 저항한 것 같다. 저 괴이한 세계로 저항도 없이 몰입해 들어가기에는 얼마간 늙고 살진 내 몸뚱어리가 방해됐거니와, 나의 좁쌀만 한 이지 理智 또한 불가 不可! 연이어 불가!를 외쳤기에. 그뿐일 텐가. 마음이 그것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 마음이 저들처럼 명랑하고 당돌하며 순백처럼 하얗고 긍정한 것을 솟구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저들을 하염 긍정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음악이 마음 반대편 귀퉁이를 칵, 거머쥐고는 그 안 동화의 세계를 향해 우격다짐으로 끌었다. 무대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점차로 그들의 목소리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 이끌려 들어간다. 배우들이 하나같이 노래를 잘한다. 합창부를 놓고 보자면 이중창을 하는 데도 가사가 씹히지 않았고, 화성은 이게 라이브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독창에서도 흠잡을 구간이 없다. 음정이 정확히 짚이는 것은 물론, 내실 있는 발성 덕분에 큰 소리에도 텐션 하나 서리는 것 없이 가사가 또박 전달된다. 얼마나 잘 벼려진 신체인지, 조용히 경탄했다.
음악의 힘에 휩쓸려, 최후까지 저항하는 나의 마지못한 마음이 못 이기는 척 해체되어간다. 비록 처음, 가사에는 동조할 수 없었으니 차치하고서라도, 그들이 발현하는 음율은 빼어났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이 끌리는 것 같다. 도로시의 독창이 무대와 객석이라는 두 가지 세계 사이의 벽을 지긋이 두드리니, 이윽고 그 두터운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저 순수하고 알찬 힘을 나는 놀라워했다. 그건 참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머리로 아무리 생각하여도, 가을밤 홀로, 이제 사라진 그 순수를 마음 안에 스스로 소생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순전히 음악의 덕택일 테다. 그 가사에서 소위 오글거리는 감각을 느끼던 나는, 어느 순간 그 앞에서 옳지- 잘한다- 하시는 내 할아버지의 그것과 같이, 그들을 응원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게 너무 이상해서 나는 자꾸만 내 안을 들여다보며 헤적였다. '내'가 분명하게 뿌리내려 있을수록, 내가 낯설어지는 모든 순간은 선물이 되기에. 연극이 나를 흔들어 놓았고, 나는 그 순간 예측과 판단이 어려울 만큼 낯설었으며, 그런 나를 즐거워했다.
가을이 퍽 깊다. 이젠 확연히 추워졌다. 그런 때면 매해, 동굴에 똬리를 틀고 싶어진다. 혼자 있고 싶은, 사실 무얼 하고 싶은지 알 수 없게 되는 이런 계절에는 그냥 그렇게 가만있고 싶어진다. 나는 나를 되게 분명한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어딘가 쓸쓸한 것은, 그것이 가슴에 매단 훈장 마냥 자랑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선보여 득의양 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이라기 보다는, 조금 무력하게, 또 조금은 체념하게 만드는 속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와 더불어 나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즈음에는 가슴팍을 침노하는 서늘한 바람을 피해, 지피이는 쓸쓸함을 피해 동그막 불 지펴둔 동굴 안을 가만 웅크려 있고 싶어진다. 이것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마음, 즉 소망이지만, 그 마음 자체의 모양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요는 바라건 대로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 곁에는 튼튼한 옹벽을 둘리어 있다. 그러니 이 성벽을 경계로 하여, 외침에도 그럭저럭 괜찮아져 가고 내분도 퍽 잠잠해진다. 그런 점이 썩 괜찮다고도 여기곤 하나, 무언가 갇혀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가끔씩 이 경계 너머 바깥을 꿈꾸는 의식은, 그에 아무런 동조도 없이 꿈적 않는 마음을 굽어보곤 체념하기도 한다.
마음이 단단해져 간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라고,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우왕좌왕하지도, 어느 낯선 상황에도 울고 싶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는 것을 뜻하기에, 그것을 성숙이라고 여기게 되어 최초엔 동경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단단함이었던가. 혹은 더욱 두터워지는 심실 벽 너머로 스며들어오는 감정이, 더뎌지는 것을 두고서 그렇게 느낀 것은 다 아닐는지 몰라. 이제와 이런 생각을 한다.
도로시의 모습에서 비판이 아닌 갸륵함을 느낄 즈음, 그러니까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있는 즈음부터 사람에게 '도로시 같은 마음'이 사라지는 연유에 대해 생각했다.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찬 마음이 언제 스러지고 잊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낀 세상이란 실망의 연속이었으며, 아름답기만 한 것, 밝기만 한 모든 것들은 채 며칠도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서 실패했다. 실패가 쌓여갈수록 행복과 이상,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될 거에요'와 같은 제목을 가진 시나리오는 가닿을 수 없는 피안의 저편 노스텔지어로 유배되고, 마음의 심지는 따라 굳어져 점차 둔감하고 시니컬 해져가는 것, 이것이 자연한 수순인가 지금에 다시 생각한다.
내가 어쩌다 고루한 어른이가 되었는가. 이제와 내 안에 서는 모든 것들은 곧잘 비판의 시험대에 올라, 그 즉시 생존 여부를 질문받았다. 이것이 가당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적격판정을 받고서 살아남은 것들만이 내 안에 자리하고, 또 기능한다. 그러니 내게 이 뮤지컬이 어려웠을밖에. 연극 안의 모습들은 최초에 불가 또 불가, 모조리 부적격 판정을 받기 십상인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게 다 무언가 나는 놀라워한다. 그만큼 내 생각의 습관은 오래된 것으로, 이미 그 형체와 틀을 완성해 뿌리 깊이 내려 있기에. 진정 음악의 힘인지 어떤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이 어려운 것, 그러니까 고루한 어른이의 마음에 동화 같은 성질의 것들이 싹트고 자리하는 일이란 너무도 귀한 일이라서, 나는 실컷 놀라워하면서 만끽했다. 그리고 잠시 기능이 정지된 자기비판을 가로 치워버리고, 이렇게 마련된 마음의 대지 위로 어떤 것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실험했다.
그러니까 대책 없는 희망과 기대, 그리고 그에 대한 긍정 같은 것. 어린 시절 내게서 일찍이 사라져버린 것들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실현 가능성, 다섯 자로 된 이 묵직한 사슬을 가로 치워버리고, 상상했다. 나는 저렇게 하냥 없는 마음을 가져 보고서, 바라건대 마찬가지의 사람들과 가로 모여 크리스마스 저녁을 지내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러고 싶다로 생각을 정정한다. 그러면서 한편 가슴 한 켠을 차지하던 뻑적지근함, 그러니까 고객사 팀장과의 전화, 내일 있을 회사에서의 고초와 걱정 등은 그쯤부터 무대가 끝날 때까지 기능하지 않았고 다음 주에 있을 예정된 고단함, 대학 동기놈의 결혼식과 그 앞에서 느낄 여러 가지 기우 杞憂 같은 것들은 희미해져 있었다.
그제서야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마음 깊숙이 와 닿는다. 저 하냥 모르고 해맑기만 한 얼굴, 다가올 두려움을 까막 모르고서야 지을 수 있는 아이 다운 얼굴이란 모름지기 이렇게나 깊깊은 마음벽을 풀어내고서야 몸소 사랑스러워지는구나. 나는 이 두터운 벽을 허물어뜨린 힘에 대해 경탄하고, 아직 내가 동화를 느낄 수 있음에 놀라워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 쉬이 사로잡히는 마음을 간만 다 귀찮은 듯이 내치고, 지금을 느껴본다. 지금은 살아있는 순간이지만, 산 내가 지금만을 생각하지는 않기에. 오히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사로잡혀 있기에.
그리고 언젠가 한 번 백지에 써두곤 말간 쳐다보다가 이내 지웠던 어느 경구, 카르페디엠에 대해 또 생각한다. 그래, 아직 오지 않은 것들에 사로잡혀 축제하는 사람들의 곁 멀리서, 말간 그것을 치어다보며 흘려보내기만 하는 것은 이제 지친다. 그것은 나의 젊음, 나의 20대였기에. 차라리 나는 이제부터 잔뜩 기대하고, 마구 실패하며, 실컷 우스꽝스러워지는 편이 더욱 좋지 않은가 다시금 생각한다. 이 오랜 생각 머리가 드디어 깨어나 고개를 들고, 무대 위의 도로시가 내뿜는 담빡 미소가 퍼부인다. 그녀는 행복해 보인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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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인사가 빠르게 지나갔고, 암전이 흩어진 객석에는 다시금 까만 생머리들의 하염 없을 조잘거림과 어린아이의 칭얼댐과 어머니, 그리고 내가 있었다. 가만 앉아서 여운을 즐기기엔 적당치 않아서 바로 일어났다. 무대가 끝나고 난 지금, 진정으로 이 연극이 필요한 사람은 개중 바로 나였으며,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무얼 얻어 온 걸까. '너무 근심하지 마', 아니, '해맑고 당차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거야', 이것도 아니, 그렇게 살아가는 누군가의 마음을 엿보고 나온 것 같다. 극장 밖은 곧 다시 비가 올 듯 어두웠고 잠시 꺼두었던 핸드폰 액정에는 연락과 소식을 울력하는 두려운 숫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대가 끝나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다시 돌아오고, 나도 너희들에게, 너희도 내게, 쉽사리 한 줄로 된 조언과 경구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너희에겐 너희의 삶이, 내겐 나의 삶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 대책 없고, 희망에 취하고, 밝고, 그래서 맑은 마음새가 참 보기에 좋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너희의 지나친 빛을 걱정하고, 너희가 나의 지나친 어둠을 몸서리친다면 나는 하나 알겠다. 네가 나를 조금은 밝게 비추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한갓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