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

사랑이 지나가면 언제나 긴 꿈을 꾼 기분이다.
글 입력 2022.10.17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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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숲 – 황인찬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누군가를 잃은 상실감과 실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단독성을 지우는것이 필요하다. 그 사람만의 특성과 특질을 N살 누구, 음악하던 그 사람, 컴퓨터학원에서 만났다던 그 애 같은 말로 포획해 흐려버리고, 특별했던 둘만의 사건을 진부한 로맨스서사로 치환해버리고, 나만의 인연이었던 누군가를 보편성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작업.


전여친, 전썸녀, 전에 만나던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여 지나간 인연을 정의하는 일과 세상에 여자는 많다는 위로의 말도 그것에 포함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며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는 일도 특별했던 그 사람을 ‘마음 줬던 사람들 중 하나’로 나란히 세우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내 인생에서 차지하고 있던 단독적인 자리에서 조금은 평범하고 견딜만한 자리로 재배치하는 거다.


사랑이 지나가면 길고 긴 서사를 짧은 문장과 단어로 단순화해 압축하고,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어를 진부한 클리세로 전락시키면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다. 상실과 슬픔이 찾아오면 깊게 굴을 파고 들어가서 그곳에 길고긴 추억을 모두 묻어두고 상투성 짙은 문장 몇개만 들고나와 현실을 산다.


그 사람을 메신저 즐겨찾기에서 해제했다. 한동안 맨 위에 올라와 있었는데 이제 다른 사람들의 연락이 쌓이면서 내 마음 아래 어딘가로 천천히 그리고 착실히 가라앉겠지. 그러다 핸드폰을 바꾸거나, 급한 일을 처리해야하는데 용량이 부족해 그간의 대화와 사진들을 지우면서 흔적들은 흩어질 것이다.


과거의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나의 습성이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니 행복을 떠올리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겠지만 자주 그 순간에 매인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인스타에 올리는 것은 편집된 순간의 나지만 지겹고 지난한 원본의 삶을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건 차라리 하나의 희망에 가깝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운동을 한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무작정 걷기도 하는데, 헬스는 좀 더 적극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이다. 땀을 한바탕 흘리며 눈앞의 쇳덩어리에 집중하다보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이 고통 속에서 뭘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과 자극을 느끼고 반복하면서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의심한다.


굴을 파고들어가 추억을 세고 있으면 비슷한 생각을 한다. 나는 이 고통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그렇지만 사실 알고 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꾸준하고 착실하게 변해간다는 것을. 한 달 전에 한 운동과 먹은 것들이 지금 내 몸을 이루는 것처럼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한 달 뒤의 나를 만들겠지. 헬스장에서는 몸의 근육을 만들지만 방에서는 또 하루를 살아갈 마음의 근육을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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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심장이 고장난 것 같았다. 마음이 마음 같지 않아서 힘들었다. 애플워치에 심박수나 심전도 앱을 켜놓고 멍하니 바라보거나 심호흡을 도와주는 앱을 켜놓고 떨리는 진동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는 일도 종종 했다.

 

몇 해 전 누군가에게 건넸던 편지에 ‘들어간 적 없는 세계에서 추방당한 기분’이라고 적었는데 이번에는 내 차례인줄 알고 들어갔더니 자리가 비어있지 않아 나 혼자 서성이다 나온 기분이었다. 안에서 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마음이 뺏겨버렸다.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데.


예전에 연애 때문에 힘들어하면 친구에게 이제니 시인의 글이 적혀있는 텀블러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문장이 듣고 싶어 판매처와 사이트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시인의 시집에서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아프지 않은 사랑도 있으리라.” 비슷한 문장이었던 것 같다.

 

상처받고 아프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마음 줄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내가 좋다. 왠지 저 문장을 다시 보면 그런 마음에 힘이 될 것 같았다.


‘아프지 않은 사랑’같은 말을 되뇌이며 마음을 달래면서도, 좋아하면 그 사람과 싸우고 싶어졌다. 이상한 버릇이다. 오래오래 짝사랑했던 어떤 사람으로 인해 처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나에게는 유독 관심이 없는 그 사람에게 나도 싸울만큼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그 사람의 세계에 속해있고 싶었다.


몇 번의 연애를 거치며 이제는 싸우고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요즘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거나 친구랑 친해지면 종종 묻는다. 우리는 나중에 뭐 때문에 싸우게 될까? 우리가 멀어진다면 어떤 일 때문일까? 만약 그럴 일이 생긴다면 나한테 꼭 말해달라고, 그 어떤 사소하고 어이없는 이유여도 괜찮다는 당부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좋아하는 마음을 주고받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면, 그 사람이 소중해지면 결국 그 크기만큼 아플 일도 생기게 된다. 이해와 오해가 자꾸만 어긋나는 세계에서 그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음 줄 곳이 필요한 것 같다. 상처받지 않고 내 마음을 다해도 되는 그런 곳은 아마 없겠지만, 그래서일까.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꾼다.

 

사랑이 지나가면 언제나 긴 꿈을 꾼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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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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