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피해자에게 자신의 얼굴을 돌려주는 일 - 소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전형적이지 않은 성폭행 피해자를 사회는 어떻게 대하는가?
글 입력 2022.10.20 05:0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화자가 바뀌는 소설에서 독자들은 조금 더 공을 들여 읽어야 한다. 지금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앞서 나왔던 화자와 어떤 식으로 접점이 생길지를 적극적으로 예측해야 한다. 능동적 독서가 잘되지 않아 속절없이 이야기에 끌려갔던 것 같다.


본 책은 처음에는 ‘판옌중’이라는 인물의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가 어느새 다른 이의 옛 기억을 전하다가 다시 원래의 화자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소설 속의 인물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며, 여러 인물의 입장 차이를 통해 나름의 판단을 내릴 기회를 얻는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_표1 띠지.jpg

 

 

어느 날 아내가 실종된다. 작은 보습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던 ‘우신핑’이다. 그녀의 변호사 남편과 크게 싸운 직후였다. 며칠이 지나도 아내가 돌아오지 않자 판옌중은 그녀의 직장에 찾아간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오빠와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고 들었으나, 학원 동료로부터 그녀가 그간 달에 한 번씩 휴가를 내고 아픈 엄마를 보러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짓을 발견하고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오른다.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과거 그녀가 심각한 무언가를 저질렀음을 깨닫는다. 여러 사람을 만나며 결국 진실이 쑹씨 집안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낸다. 우신핑이 쑹씨 집안의 아들로부터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하다가 돌연 말을 바꾸었던 것이다. 판옌중의 불안과 의심이 점점 커진다. 이에 명확하고 안정적인 세계에서 살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진실을 찾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는 무거운 범죄의 전말과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흡인력 있게 서술한다. 등장하는 관계들은 음습하고 어두운 감정들을 담고 있어 가끔은 부정해왔던 마음이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라게 했다. 그사이에 숨은 빛나는 관계들도 있었다. 그 중 인상 깊었던 두 지점을 공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잠시 스포일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책의 말미에서 밝혀진 진실은 우신핑은 사실 성폭행 당사자가 아니며, 쑹씨가의 딸, 화이쉬안이 그의 오빠로부터 오랜 시간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심각한 사실을 목격한다.

 

*

 

우리는 피해자에게 너무 가혹하단 것이다. 피해자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잣대를 발견한다. 성폭행이 벌어질 당시에 입은 옷, 당한 이후 가해자의 여동생과 만났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일, 왜 시간이 지나고서야 신고를 했는지 등. 피해자의 많은 것을 들춰내고 거짓의 기미를 찾아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순결한 피해자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모든 정황은 그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근거가 된다.


가해자의 가족은 자기 자녀가 얼마나 순수했는지, 악한 이의 꼬임에 넘어가거나 계략에 걸려들어 운 나쁜 무고의 대상이 되었음을 말한다. 우신핑의 남편 판옌중은 자기 아내에게 벌어진 사건을 알고나서도 '그래서 강간당했는지' 여부를 궁금해한다.


어쩌면 피해자는 완전무결하지 않을 수 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술을 마셨을 수도 있다. 여러 이성과 어울려 놀았을 수도, 가해자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건이 있고 나서도 가해자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고, 이전의 관계가 남아 있어 상대를 조금은 동정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입체적인 모습에 거부감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성폭행 피해자를 둘러싼 다층적인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드라마, <13 Reasons Why(루머의 루머의 루머)>가 생각나기도 했고 아내의 진실을 남편이 쫓는 것에서 영화 <화차>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건 너무 어렵지만, 그런데도 먼저 피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그에게 과한 잣대를 들이대지 말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어떤 일은 그저 바라보고 들어야 한다. 섣부른 판단은 상처가 된다. 성폭행 피해자는 쉽게 궁지에 몰리고 쉽게 공격받기 때문이다. 이에 실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한 발짝 물러나 있어야 한다.


*

 

성폭행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각도 있지만, 한편으로 이 책이 우정 이야기로 읽히기도 했다. 책의 가장 큰 줄기를 우신핑의 남편 판옌중이 끌고 가며 아내의 비밀을 밝혀가기에 기본적으로는 추리 소설의 성격을 띤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중요한 화자인 ‘화이쉬안’이라는 인물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는 그 어떤 책보다도 친구에 대한 애착과 정을 담고 있다.


화이쉬안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안고 있는 애였다. 온 마을에서 가장 부잣집에 살면서도 어쩐지 기가 죽어 억눌려 있어 보였지만 가끔은 나이에 비해 놀랍게 재치 있는 글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마음을 줄 수 있는 친구가 거의 없었지만 우신핑을 만나고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둘의 사이를 묘사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때 하루라도 물고기를 만나지 않으면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기운이 없었다. 물고기의 침대에 누워 있으면 물고기가 내 옆에 와서 눕곤 했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너와 친한 친구를 일등부터 오등까지 말해줘. 물고기의 일등은 나, 나의 일등은 물고기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면 희미한 전류 같은 것이 팔다리를 지나가는 듯했다. 그 기묘한 감각을 다시 느끼기 위해 이런 식의 질문으로 자주 물고기를 귀찮게 굴었다.

 


둘의 모습을 보면서 어렸을 적 나의 친구 관계를 떠올려 보았다. 저렇게 우정보다는 사랑에 가까울 법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적이 있었나? 그런데 사실 나는 방어적인 애였기에 말로는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솔직했어도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너도 날 아껴줬으면 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너무 많이 위하고 서로 기대하는 바람에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화이쉬안의 오빠의 생일파티에 놀러 갔던 우신핑은,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심각한 광경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를 자신이 대신 증언해주겠다며 나선다. 네가 피해자로 앞에 설 필요 없이 얼굴 팔릴 일은 다 내가 감당하겠다, 상황을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한다. 부모님의 반대, 주변 사람들의 시선, 가해자의 지위로 인한 직간접적인 압박이 오지만 우신핑은 굳게 버틴다. 너무 지쳐서 화이쉬안을 만나러 간 날, 화이쉬안이 가해자인 오빠를 안아주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건 뭘까, 하면서 허탈함과 배신감을 느낀 우신핑은 법정에서 자신이 거짓 주장을 했다고 말하고 모든 사건을 덮는다. 모든 일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신핑은 고향을 떠난다.


오해로 인해 마음이 떠난 둘은 서로를 죽어라 미워하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 워맨스와 서로를 아꼈던 마음이 빛났고 섬세하게 건드리는 표현들이 너무 좋았다. 여자애들 사이의 미묘한 애정을 다루는 점에서 김윤석 감독의 영화, <미성년>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


책을 끝까지 읽은 후 제목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역설적이게 다가왔던 건 ‘우리에게 비밀이 없다’고 말하는 책에 비밀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책 중 묘사되듯 부부간의 비밀은 관계를 편안하게 해주기도 하며 어떤 비밀은 너무나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기도 하다. 감춰진 세상에서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진실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실이 뒤엉키고 가려진 일. 모두 자신을 위한 변론이 있다. 그래서 비겁하지 않기 위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덜 비열해지고 더 귀 기울여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고승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