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피해자성’에서의 해방 -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도서]

글 입력 2022.10.15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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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11월, 난 경찰서에서 피해자 신분으로 있었다. 동네 도서관 여자 화장실에 숨어 있던 한 남성을 신고했기 때문이다.

 

신고하기 며칠 전부터 화장실에서 이상한 인기척이 있다고 느꼈고 여자 화장실 밖에서 구석에 숨어 있다가 한 남자가 화장실 안에서 나오는 모습을 붙잡았다. “왜 여자 화장실에 있어요?” 도망치는 남자를 따라 뛰었다. 유난히 야박했던 3년 전 겨울, 모든 기억이 흐린데 그날만의 기억은 선명하다.

 

나는 그와 합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피해자는 도서관에 있던 모든 여성이었는데 서류상 피해자는 신고자인 나뿐이었다. 그 일은 내게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고 한동안 도서관은 물론 공용 화장실에는 가지 못했다.

 

겨우 다시 외출을 할 수 있을 무렵 전화가 왔다. 가해자는 젊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무력감은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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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에서 ‘판옌중’은 아내 ‘우신핑’의 과거를 쫓는다. 그는 배우자의 성폭행 피해 사실도 몰랐다. 성폭력 피해를 호소했던 아내를 두고 "거짓말쟁이"라고, "돈을 노리고 그런 짓을 했다"고, "창창한 청년의 미래를 망쳤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과연 아내의 본심은 무엇이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마지막까지 괴로웠다. 특히나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서 ‘피해자다움’을 찾으려고 했던 내 모습이 가장 괴로웠다. 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자였음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는 가해자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은 피해를 호소하고 합당한 보상을 받으려고 하면 돈을 노린다는 말을 듣고, 처벌을 바란다면 한 청년의 삶을 망친다며 비난받기 쉽다. 경찰 조사에서 담담하게 진술하면 피해 자체를 의심하고 너무 울면 여자는 너무 감정적이고 상황을 과장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려면 최선을 다해 고민해야만 한다. 사소한 실수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죄상을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심성이 악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선량하고 정직한 일면에 미련을 버릴 수 없어 뻔뻔스레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131쪽)


 

위 문장이 유독 날카롭게 느껴진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 누군가는 피해자성을 내세워야만, 설령 그것이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사이에 개인은 철저히 지워진다.

 

원래 내성적이든 혹은 외향적이든, 당당하든 소심하든 모두가 ‘피해자다움’을 방패로 얼굴이 지워진다. “네가 조심했어야지.”와 같이 날카로운 말들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공격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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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술자리에서 도서관에서 겪은 일화를 푸념처럼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술에 취한 남자 지인은 내게 “네가 예뻐서 그래.”라는 말로 위로하려 했다.

 

그때 나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건 그날의 무수한 피해자를 모욕한 일이고 그 이전 비슷한 사건의 피해자들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날 테이블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는 나를 보며 누군가는 별것 아닌 걸로 예민하게 구는 사람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원래 잘 분노하는 사람이다.

 

우신핑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피해자의 여러 면을 목격한다. 그는 ‘순결한 피해자상’의 인물이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루던 성범죄 피해자의 가련함보다는 한 개인으로 그를 포착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지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다. ‘피해자’를 주목하지 말고 개인을 주목할 것.

 

유독 성범죄 피해자들에게만 집단화한 이미지를 덮어버린다. 인터넷 뉴스에는 울고 있는 순진무구한 여성을 보여준다. 범죄에 당당하게 항의하는 모습보다는 울고 있는, 순진한 이미지만 남아버린다. 그 속에는 수많은 소녀의 무덤이 숨어있음에도 말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피해자에게는 그 ‘진정성’에 의문을 품는 댓글이 달린다. 그러나 이 역시 우리가 피해자에게 갖는 편견이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로 우신핑의 과거를 함께 추적하면서 독자들이 그 편견을 완전히 망가뜨리길 바란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_표1 띠지.jpg

 

 

[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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