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로 했다 [사람]

글 입력 2022.10.15 10: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나에게 여름이란 시원한 민소매,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얇은 셔츠, 그리고 수영이다. 처서 매직과 추분을 맞이하면서도 여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나는 결국 환절기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코로나 재확진, 재재확진의 시대에서 감기 기운을 내비치는 인간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십상이다. 여기저기 결백함을 증명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정말 미뤄뒀던 여름을 보내줄 때가 되었다고.

 

옷장 정리를 하기 전, 마지막으로 여름을 즐길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이 분야의 전문가 친구에게 연락을 남겼다.

 

- 일요일 평냉 고?

- 고!

 

*

 

사실 나는 평냉의 매력을 완벽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저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기에 도장 깨기 하듯 서울 평냉 맛집을 하나하나 돌아보는 중이었다. 이날도 전문가인 친구의 추천을 받아 을지로의 유명한 평냉 집으로 향했다. 초심자 평냉으로 유명한 이 집은 어마어마한 웨이팅을 자랑하는 집이기도 하다.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이라 그런지 더 북적거리는 식당 앞을 보며 그냥 집이나 갈까 잠시 고민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웨이팅 접수부터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지만 “40팀 대기 중. 여유롭게 기다리세요^^!”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다시 한번 집으로 가는 차편을 확인했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니 다시금 평냉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랐다. 우리는 점점 추워지는 날씨를 떠올리며 올해 마지막 평냉을 고작 40팀 때문에 떠나보낼 수 없으니 의지의 한국인이 되어보기로 결정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좁은 로비와 야외 천막에는 대기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우린 근처 카페라도 가서 입에 뭘 넣어야 40팀을 견뎌낼 수 있겠다며 그 틈을 빠져나왔다.

 

 

KakaoTalk_20221014_235157126.jpg

 

 

한때 얼죽아 회원이었던 나는 날씨가 추워지면 따뜻한 음료만 찾게 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따뜻한 메뉴를 찾는 것, 이것 또한 여름을 떠나보내는 모습 중 하나이다. 도착한 카페에서 메뉴를 살피는데 더 이상 차가운 음료가 끌리지 않는 걸 보며 정말 추위가 성큼 다가왔음을 느꼈다. 얼죽아 친구가 차가운 커피를 벌컥 벌컥 마시는 동안 뜨거운 커피를 한숨 식혔다.

 

꽤 추웠던 날씨에 얼었던 몸을 풀며 오늘 본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겹치는 지인이 있어 함께 보게 된 연극이었고 둘 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날이었다. 사실 난 올 한해 극장을 멀리했다. 대학을 입학하면서부터 자의든 타의든 언제나 극장과 함께였고 그렇게 7년을 보냈다.

 

내가 보고 싶은 공연들을 찾아보고, 보고 싶지 않은 공연이어도 지인 혹은 학교에 의해 보러 다녔다. 보고 싶었던 공연이라고 해서 언제나 만족스럽게 봤던 것도 아니었고 보고 싶지 않았다고 해서 언제나 불만족스럽게 봤던 것도 아니었다. 극장이 주는 기운과 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오른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벅차오름과 편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극장에 와 누군가의 공연을 보는 게 피곤하게 다가왔다. 하나의 작품을 내 식대로 관찰하고 비평하고 판단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누군가의 연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연을 보고 나와 같이 본 사람들끼리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나누는 것조차도 당연한 절차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큰 의미 없이 나누던 이런 과정들이 일의 연장선처럼 느껴졌고 오로지 비평만을 위해 작품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극장을 찾으며 느꼈던 즐거움을 잃어버린 채 의무감만 남은 관극의 연속이었다.

 

여러 고민 끝에 환기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극장과 잠시 거리를 두고 한동안 공연을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늦겨울,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이 찾아왔다. 이 시간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고 다양한 걸 보고 읽고 쓰며 지냈다. 오래 곁에 있던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인연도 쌓았다. 공연이라는 공간을 덜어낸 자리에 새로운 것들을 채워 넣은 계절들이었다.

 


KakaoTalk_20221014_235157126_01.jpg

  

 

나와 비슷한 듯 다른 고민을 하는 친구와 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뜨거웠던 커피는 식어있었고 곧 우리 순번이니 대기하라는 알림이 울렸다. 자리를 정리한 뒤 식당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먹었던 삼삼한 평냉들과는 다르게 고기 향 진한 육수와 잔잔한 간을 가진 맛이었다. 이번 평냉도 맛있었지만 내심 삼삼했던 지난 평냉들이 떠올랐다. 미루고 미루던 여름을 보내주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에 완벽한 한 그릇이었다.

 

10월도 절반이 지나고 있는 지금, 멀리하던 것들을 다시 가까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 시간들이 만족스럽고 충분했느냐 묻는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삼삼한 평냉을 떠올리고 따뜻한 음료를 찾을 만큼의 시간은 보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태그.jpg

 

 

[송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