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욕망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파국 – 뮤지컬 '테레즈 라캥'

욕망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
글 입력 2022.10.1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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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뮤지컬 <테레즈 라캥>의

스포일러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의 욕망을 인지하고 이를 이루어갈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한 욕망에서부터, 자유롭게 스스로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추구해 가기 위한 욕망까지,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이자 ‘나’로 오롯이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한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며,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사회적 규율과 금기 등을 통해 욕망을 따르는 것을 제한당하기도 한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안전과 질서를 지키기 위함인 동시에, ‘어떤 욕망을 누구에게 허락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젠더와 계급, 인종, 장애 등 다양한 정체성의 정치가 교차하는 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스스로의 욕망을 제대로 마주하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스스로의 욕망 사이를 조율하며 이를 이뤄가는 과정은 ‘욕망하는 주체’로서 바로 서는 데에 꼭 필요하다. 만약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잃은 채, 과도하게 욕망을 제한당하거나 이에 이끌려 가기만 한다면 결국 자신과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망가뜨리는 파국에 치닫을 수 밖에 없다.

 

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이렇게 ‘욕망하는 주체’가 될 수 없도록 서로를 옭아맸던 네 인물이 결국 파국에 치닫는 이야기다. 어떠한 욕망도 드러내지 못한 채 억압된 삶을 살아온 ‘테레즈’, 수동적으로 학습된 방식으로만 욕망을 추구했던 ‘카미유’, 욕망에 이끌리는 삶만을 살아온 ‘로랑’, 그리고 ‘완벽한 집’을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해 온 ‘라캥 부인’까지. 그들은 모두 ‘욕망하는 주체’로 살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비록 이들의 이야기는 186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하지만 2022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전혀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테레즈 라캥>이 감히 인간의 본질 중 하나라 이야기할 수 있는 ‘욕망’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더욱 다양한 욕망이 가시화되고 다양한 이해관계에 얽힌 새로운 욕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메인 포스터.jpg

 

 

 

욕망이 만든 함정 : ‘누가 만든 지옥인가?’



뮤지컬 <테레즈 라캥>의 주인공 ‘테레즈’는 어렸을 때부터 고모인 ‘라캥 부인’의 집에 살며, 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오직 병약한 사촌 ‘카미유’의 ‘수호천사’로서 그를 돌보며 살아간다. 라캥 부인의 규칙만이 적용되는 집 안에서 ‘테레즈’는 어떤 욕망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카미유와 결혼하게 된다.

 

그렇게 모든 자유와 욕망을 억압당한 채 살던 ‘테레즈’는 카미유의 친구이자 화가인 ‘로랑’을 만나며, 자신의 욕망을 조금씩 인지하게 된다. 여기에는 극중에서 자세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과거 로랑과 어린 테레즈 사이에 있던 일과, 카미유와 비교되는 로랑의 외관과 성격 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로랑이 테레즈를 그리는 행위 그 자체는 극 안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테레즈에게도 의미있는 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테레즈 라캥_선민.jpg

 

 

극의 초반부 테레즈는 라캥 부인의 말을 계속해서 되뇌이며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정해진 일만 수행하는 ‘로봇’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의 테레즈는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고 어떤 것도 욕망할 수 없는 채로 그저 존재하기에, 비록 생존해 있으나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테레즈는 스스로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받지도 인지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로랑은 테레즈를 그리며 테레즈의 몸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테레즈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겨낸다. 이를 통해 그동안 수동적인 생활로 스스로에게도 지워졌던 테레즈의 몸이 눈으로 볼 수 있고 또 인지할 수 있는 것으로 테레즈 앞에 드러난 것이다. 즉 로랑을 만나기 전까지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자유’의 의미로서 ‘몸’을 가지지 못했던 테레즈는, 로랑이 그리는 대상이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자신(혹은 자신의 몸)’ 또 ‘욕망하는 자신(혹은 자신의 몸)’에 대해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조금씩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몸을 움직여 간다.

 

물론 이것은 로랑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었고, 로랑은 오로지 ‘아름다운 집’과 ‘아름다운 테레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채우고자 할 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부터 전혀 다른 곳을 향했던 테레즈와 로랑의 욕망이 점점 어긋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은 서로가 다른 욕망을 가진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채, 관계가 깊어질수록 오히려 서로를 각자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서만 탐닉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둘은 다른 사유나 성찰 없이 점점 욕망에 이끌려만 갔고, 결국 카미유를 죽이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둘이 처음으로 서로의 죄책감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시점이 서로의 생명, 즉 몸을 죽이는 시점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한편 카미유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여 라캥부인과 거의 집 안에서 생활했고, 라캥 부인을 통해서만 어던 욕망을 가져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추구하고 이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라캥부인은 카미유의 모든 욕망을 충족해주었지만, 그것 역시 오직 라캥부인에 의해 ‘욕망’으로 규정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비록 카미유는 테레즈를 자신의 ‘소유’라 여기고 테레즈의 자유를 억압하는 인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카미유 역시 수동적으로 욕망을 주입 받을 뿐 욕망하는 주체로서 진정으로 자신이 품은 욕망을 이뤄갈 수 없는 인물이었다. 테레즈와 사랑을 나누려 할 때마다 ‘사랑은 이렇게 숨막히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한탄하며 묻는 카미유의 대사를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라캥 부인_이혜경.jpg

 

 

이렇게 극 중에서 테레즈와 카미유의 욕망을 억압하는 인물로 라캥 부인이 지목되지만, 라캥 부인 역시 극의 후반부에서는 ‘지옥’이라고까지 표현되는 ‘집’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인물이다. 또한 라캥 부인이 테레즈에게 강제했던 규율과 라캥부인이 만들고자 했던 ‘완벽한 집’은 극단적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당시의 또 지금의 수많은 ‘테레즈’와 ‘라캥 부인’의 삶과 욕망을 재편했던 젠더 규범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결국 라캥 부인 역시 젠더규범을 체현한 자신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억압했지만, 그 욕망은 라캥 부인 스스로를 집 안에 마지막까지 가둬두는 창살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라캥 부인은 극 중에서 누구보다 열렬히 욕망을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 역시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스스로와 타인 모두를 망가뜨렸을 뿐이다.

 

이렇게 테레즈, 카미유, 로랑, 라캥 부인, 네 인물 중 누구의 입장에서 극을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극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네 인물 모두 욕망에 이끌릴 뿐, 사유와 성찰을 통해 욕망을 제대로 인지하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물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 밖에 떠올릴 수 없었던 테레즈의 상황이 안타까웠고, 다른 인물들도 주체적으로 욕망을 추구하는 방식과 자신의 욕망에 대해 성찰하는 방법을 제대로 습득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각자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를 가질 수는 없다.

 

끝내 이들은 스스로의 욕망으로 인해 타인을 해치고 억압했으며, 이로 인해 타인은 물론 스스로까지 파국으로 이끌었다. 따라서 과도하게 욕망을 억압하고 절제하는 것도 스스로의 삶을 온전히 꾸려가는 것이라 할 수 없겠지만, 어떠한 성찰 없이 그저 욕망만을 좇는 것은 그저 욕망에 이끌리는 것일 뿐 욕망을 위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보기 어렵다. 이것이 욕망을 충족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욕망 앞에 주체로서 바로 설 수 없다면, 결국 그것은 자유와 행복과 같은 가치를 이룰 수 있는 욕망이 아닌 그저 파국으로 이끄는 함정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극 중의 네 인물은 모두 성찰 없는 욕망에 이끌려 욕망의 함정에 빠졌고, 스스로 만든 지옥속에서 파국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극을 통해 단지 어리석거나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진 사람들의 비극으로 다뤄지지도,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뮤지컬 <테레즈 라캥> 속 인물들이 빠졌던 욕망의 함정은 우리 누구라도 빠질 수 있고, 인물들의 갈등 소재가 되는 사회적 규범과 스스로의 욕망 사이를 조율하는 문제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몇 세기를 뛰어넘어 다양한 장르로 변주해 온 <테레즈 라캥> 속 다양한 인물들의 입장과 배경을 살펴보며, 우리 스스로의 욕망과 이를 추구하는 방식도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또 이것이 욕망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의 욕망을 제대로 인지하고 돌아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반이 모두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논의들을 이어가야 할 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이 되기를 바라본다.

 

 


김효중 컬쳐리스트 태그.jpg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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