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로 다른 시공간 가운데 사라지지 않는 것들 - 디어 마이 라이카

글 입력 2022.10.0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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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에 한 순간 머물다 사라지는 존재다. 각자가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언정 범우주적 관점에서는 티끌만도 못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긴 시간에 걸쳐 일구어낸 과학기술로 대기권 너머의 세상을 탐색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그곳에 끝이란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 우주라는 공간을 향한 지적 호기심과 무한한 상상력을 허락한다.


지난 9월에 개막한 초연 뮤지컬 <디어 마이 라이카>의 주인공 역시도 우주를 향한 탐구욕과 인류 구원의 미션으로 무장한 우주비행사들이다. 지구 생태계가 붕괴된 먼 미래를 배경으로, 지구인들의 거처가 될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탐사하는 긴 여정을 보여준다. 김연미 작가와 김치영 작곡가, 박경찬 연출가, 이선태 현대무용가가 기획에 참여했으며 강정우와 김지철(라이카役), 장민수와 김지훈(벨카役), 류제윤과 김도현(K박사役)이 연기한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무대의 벽면에는 가로형의 긴 3채널 스크린이, 바닥에는 경사진 구조물과 단순한 박스 형태의 설치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보기 드문 우주 소재의 공연이니만큼 단출한 무대로 어떻게 우주 한복판을 구현할 것인지 작은 우려감이 들었지만, 걱정보다는 기대감을 앞세우며 객석에 앉았다. 이내 공연은 암전 가운데 희미한 모스 부호의 신호음이 울려퍼지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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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어 시간을 넘어 너를 만나러 왔어."

 

 

이 공연은 각기 다른 이유로 우주선에 오른 3인의 이야기를 엇갈린 시간 구조로 표현한다. 지구를 닮은 행성 야사B를 탐사하는 ‘휴머노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엔지니어 ‘라이카’, 신경학 전문의 출신의 파일럿 ‘K박사’, 우주비행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주선에 오른 ‘벨카’가 극의 주역이다.


라이카는 이유 모를 동면 상태에서 깨어난다. 흐려진 기억 탓에 극심한 두통과 혼란에 시달리다 K박사의 도움으로 본인이 설계한 우주선에 대한 전문 지식을 차츰차츰 기억해 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자꾸만 머릿속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형상이다.


기억 회복을 위해 과거 우주선에 오르면서 챙긴 프리즘 목걸이와 빛바랜 사진이 끼워진 액자를 더듬어 보아도 머릿속의 기억은 어렴풋할 뿐이다. 반면 K박사가 챙긴 물건은 그가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았던 날을 떠올리게 하는 빗소리가 담긴 녹음기다. 세상이 관심을 가져주었던 것은 그라는 존재가 아닌 그가 발표한 논문이었고, 누구에게도 진정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던 지구를 떠나 새로운 별을 찾아 떠나게 되었다는 박사의 짧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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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임무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들의 훈련 과정이 묘사된다. 체력 훈련을 표현한 군무가 인상적인 대목이다. 이때 라이카, K박사와 함께 등장하는 벨카는 오래 전 탐사 미션에 실패해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 나서기 위해 우주비행사가 된 인물이다. 돌아오지 못한 최초의 우주견 '라이카', 그리고 지구 귀환에 성공한 우주견 '벨카'의 이름에서 극중 인물들의 미션명이 차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라이카가 지구에서 가져온 프리즘 목걸이를 벨카 역시 목에 걸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 자신을 남겨둔 채 떠나가 버린 아버지는 벨카에게 그리운 존재인 동시에 야속한 존재다. 그래서 벨카는 아버지의 선택을 따라 그의 감정을 이해해 보려 한다. 우주 비행을 앞두고 아버지를 ‘나의 로켓맨’이라 외치는 벨카의 노랫소리는 아버지가 있는 어딘가를 향해 희망차게 울려 퍼지지만, 도전 정신과 기대감 이면의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 행성 탐사가 가능해질 정도로 상태를 회복한 라이카는 K박사와 함께 우주선 밖으로 나서 야사B의 땅을 밟는다. 그러나 이 행성은 지금껏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임에도 이미 태극기 표식과 함께 이미 지어진 기지가 세워져 있었다. 동시에 이들은 방사선으로 인해 이곳이 지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대체 이들보다 앞서 찾아온 사람은 누구며, 또 인간이 숨쉴 수 없는 행성임에도 기지를 지은 것은 어떤 까닭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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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라이카는 사라졌던 기억과 선명히 마주한다. 만날 수 없지만 한 몸처럼 느껴졌던 누군가의 이름이 ‘벨카’이며, 그 아이는 자신이 지구에 두고 온 어린 아들이라는 점을 말이다. 프리즘 목걸이만 있다면 어디서든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아들과의 약속이 기억에서 되살아나자, 지금껏 목걸이를 움켜쥘 때마다 미지의 목소리가 느껴진 이유를 알게 된다. 라이카는 드디어 기억에서 또렷해진 벨카와 함께 노래하지만,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각자의 궤도를 돌며 서로를 그저 맴돌 뿐이다.


라이카는 행성에 지어진 기지에서 휴머노스 프로젝트의 진실을 담은 문서를 발견한다. 민간기업의 자본이 대규모 투입된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순수한 대안행성 탐사가 아니었다. 바로 냉동인간으로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냉동 상태에서의 기억을 실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K박사의 주도 하에 자발적 실험체로 우주선에 오른 것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라이카는 아들이 있는 지구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오열한다. 하지만 라이카와 달리 모든 기억을 온전히 지닌 채 동면했던 K박사는 이미 200년의 시간이 흘러 지구에는 당신의 아들을 비롯한 그 누구도 살아 있지 않다고 차갑게 말한다.


라이카와 벨카는 서로의 존재를 직감했지만, 이들 사이에는 두 세기에 달하는 간극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벨카는 아버지의 행방을 파헤치기 위해 우주비행사가 되어 기밀 정보에 접근했고, 그 결과 아버지가 여전히 우주에 머무르고 있으며 200년 뒤 야사B에 착륙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인류 최초로 웜홀을 통과해 지구에서 야사B까지 걸리는 200년의 시간을 4년으로 단축하는 데 성공한다. 벨카 역시도 이곳이 대안행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오직 아버지를 위해 기지 건설을 강행한 것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라이카를 지켜보며 K박사는 라이카가 지녔던 정보와 지식은 되살아났지만 감정은 곧바로 기억해내지 못했기에 인간의 감정은 화학적 상호작용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가설이 맞았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극 초반부에 우주비행을 앞둔 세 비행사가 부르는 ‘휴머노스 프로젝트’ 넘버와 동일하지만,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과학자의 광기 어린 기쁨으로 변주되어 그의 비인간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극의 결말부에서 박사는 가설을 수정하게 되고, 자신이 늘 부정했던 사랑과 그리움, 후회와 분노 등의 생생한 감정을 마주하면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라이카의 현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공연은 벨카가 아버지에게 남긴 음성기록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막을 내린다. 나이가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뤘던 순간, 자녀를 품에 안았던 순간, 새로운 대안행성을 발견해 지구인을 이주시키는 마지막 우주선을 떠나보냈던 순간까지. 200년 뒤에 자신의 흔적을 발견할 아버지 한 사람을 위해 그가 기록한 순간들이 관객 앞에 재생된다. 벨카의 독백은 배우들의 커튼콜과 무대인사가 끝난 뒤 울려 퍼졌는데, 일어서려는 관객들을 다시금 극중의 서사로 불러들이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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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라이카>는 크게 신선하지 않은 부성애라는 소재를 다룬다. 그럼에도 그 소재를 SF 장르와 결합한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작품 전반에서 드러내는 인륜적인 가치는 인간적인 감정과는 대치되는 이성과 논리의 장, 즉 과학자들의 우주 비행선이라는 공간적 배경 안에서 효과적으로 배가된다. 원소 주기율표를 읊으며 아들을 향한 애정을 원소의 특성에 빗대는 넘버에서도 알 수 있듯, 흔한 상황에서도 장르의 특성상 독특한 표현으로 묘사된 부분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라이카가 임상실험에 동의해 우주선에 오른 이유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을 남긴다.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기억마저 포기하면서 비행선에 오른 것은, 학자로서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인류를 위해 희생한 역사적 인물로 기록되고자 하는 야욕으로 가족을 등졌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적인 고민은 극중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기에, 그의 세밀한 심리적 갈등을 관람객의 상상에 맡기는 것은 무리한 책임 전가로 여겨졌다. 이 부분의 묘사에 더 긴 시간을 투자했다면 극의 내러티브에 깊이감이 한층 더해졌을 듯하다.

 

또한 SF 장르에서는 특별함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무대 연출의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공연을 감상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작은 장치나 트릭만으로도 무대를 또 다른 세계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의 무대미술은 그러한 관객의 기대에 부응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특히나 디테일의 측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던 스크린 영상과 의상 및 소품, 그리고 공간적 역동성이 큰 공연임에도 기억에 크게 남지 않았던 조명 활용이 더 발전된 모습으로 찾아올 재연을 기대하게 했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열연이 무대와 서사의 빈 자리를 메웠다. 오로지 세 명의 배우가 무대를 채웠지만, 가족을 등지고 우주로 향했지만 가족을 향한 사랑을 차마 잊지 못한 라이카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도전 정신으로 극복한 벨카, 그리고 인간적인 나약함과 잔인한 냉철함이 공존하는 K박사까지 각자의 색채가 뚜렷한 캐릭터 간의 조합 덕분에 단조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감정을 섬세한 손동작으로 표현한 안무나 우주복을 착용한 채 내딛는 걸음걸이 등의 세세한 움직임들도 감명 깊었다. 매 순간마다, 관객석에서 예기치 못한 소음이 발생했을 때마저도 흔들림 없는 무대를 선보인 배우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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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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