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보충적 사건과 사소한 일상의 소중함 - 포기 [격주의 문학]

글 입력 2022.10.0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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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작가의 소설 「포기」(《현대문학》 2022년 1월호, 『소설 보다 : 여름 2022』)는 갑자기 연락이 끊기고 사라져버린 민재와 그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미선과 호두를 둘러싼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민재와 미선은 한때 연인 사이였고, 미선의 사촌인 호두는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 민재에게 2천만 원을 빌려주었다. 헤어지고 나서 민재는 잠적해 버렸고, 호두는 돈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호두는 이따금 미선에게 연락을 해오곤 하고, 그 연락을 바탕으로 미선과 호두는 민재를 찾고자 하지만 쉽사리 그를 찾지 못한다.


소설은 외대 근처의 양꼬치집에서의 장면으로 시작하고 미선과 호두는 민재를 찾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내 호두는 취하게 되고 미선은 과음한 호두를 데리고 외대 운동장과 의릉 일대를 함께 산책하고 잔디밭에 함께 눕기도 한다. 둘은 가까스로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술에 취해 잃어버린 물건들을 떠올린다. 물건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서 그들은 함께 웃는다. 시간이 지나 호두는 미선의 집에서 독립하여 여자친구 보미와 동거를 시작하고 민재와도 연락이 닿지만, 이내 보미와 헤어지게 되고 민재와의 연락도 다시 두절된다. 호두는 다시는 민재를 찾지 않는다.


*


소설이 진행되는 시간, 그러니까 미선이 소설을 서술하고 있는 시간은 민재가 떠난 이후의 시간이고 민재의 행적을 추적하려는 미선과 호두의 노력은 계속 실패하고 있다, 따라서 추리극과 같은 박진감이 소설 속에 느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소설의 진행 중에 새로운 국면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민재를 찾지 못해 신세를 한탄하고, 술에 취해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또 물건을 잃어버려 체념하는 이들의 현재가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면서 둘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들, 그리고 그로부터 떠오른 단상들이 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어릴 적부터 한집에 자란 사촌지간 두 사람의 이야기와 각자 경험한 성장과 사랑의 경험들이 소설 전반에 걸쳐 이야기된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호두의 입장에서 요약하자면, 사촌의 전남자친구에게 큰돈을 빌려주었다가 그들의 이별과 연락두절로 인해 돈을 돌려받지 못한 이야기,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연락이 닿아 돈을 돌려 받기로 약속을 받기로 했다는 기적적인 이야기, 그리고 이내 다시 연락두절이 되지만 더 이상 그 돈을 돌려받을 마음이 없어진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 중에 호두가 들인 노력들은 민재를 찾는 결실로 이어지지 않았다. 매 차례 좌절 속에서 호두는 미선이나 보미와 함께 일상적인 시간들을 보냈고, 민재가 다시 사라졌을 때는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는 현실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지점을 직접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내다 보면 다른 경위를 통해 그 문제가 자연히 해결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것은 아마 현실보다도 그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관련한 문제일 수도 있고, 그런 문제는 일상 중에 다양한 상황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점검하다 보면 답이 나오기도 한다. 작품에는 호두와 민재가 함께 나타나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 민재를 애타게 찾다가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게 되기까지 그 사이의 과정들만이 드러난다. 그 과정에는 호두의 성장환경, 호두와 보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호두는 직접 상대를 대면하여 상황을 뜯어고치지 않고서도 문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서를 일상에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소설의 사건을 분류하는 개념의 하나로 구성적 사건과 보충적 사건이라는 개념이 있다. 구성적 사건은 소설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사건이다. 예를 들어 민재와 미선, 민재와 호두가 관계를 맺고 끊은 과정들, 호두가 민재에게 돈을 빌려주고 사라진 민재를 찾기 위해 벌인 일들은 모두 구성적 사건에 해당할 것이다. 한편 호두와 미선이 함께 양꼬치를 먹고 술에 취해 돌아다닌 이야기, 혹은 호두가 보미와 동거를 시작한 이야기는 모두 보충적 사건에 해당한다. 돈을 빌려주고 이를 추적하는 소설의 커다란 흐름과 무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고서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평가를 할 때, 경우에 따라서는 구성적 사건보다 보충적 사건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술에 취한 호두가 어린 아이마냥 뛰어다니다 풀밭에 눕는 모습이라든가 외삼촌의 집에 맡겨지면서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들은 채권-채무의 사건과는 무관하지만, 이 소설의 분위기나 호두라는 인물의 매력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한편 보충적 사건들 때문에 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런 보충적 사건들이 작품에서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비슷하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한편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면,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고, 흥미와 적성에 대한 끝없는 고민을 통해 취업을 하여 커다란 업무에 투입이 되는 것, 혹은 연애 과정에서 반복된 사랑과 상처를 경험하고 한 사람과 약속을 통해 가정을 이루는 것은 모두 구성적 사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굵직한 사건들이 아닌,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만남과 대화들, 내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 가끔씩 멍때리며 하는 엉뚱한 생각들이 나를 더 잘 설명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이나 타인의 삶을 이해할 때, 그 구성적 사건으로 각각의 인생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있는 것은 보충적 사건의 연속이다.


소설, 특히 단편소설에서는 이러한 보충적 사건들을 잘 음미하고 감상할 때 더욱 풍부한 독서가 가능하다. 그리고 삶에서도 거대한 서사나 사건들에 가려진 사소한 일상이 더욱 풍부한 생활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김지연 작가의 「포기」는 소중한 일상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더욱 값진 소설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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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작가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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