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을에 그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영화]

가을에 찾게되는 영화 <레옹>
글 입력 2022.10.0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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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을 루틴



휴일 아침,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가을이 온 거다. 계절에는 냄새가 있다. 그래서 계절이 바뀌면 전과는 다른 향이 희미하게 코끝을 스민다.

 

밖으로 나가 걷다 보면 쾌청한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살갗을 어루만진다. 붉은 낙엽이 바스라지기 시작하면 향은 더욱 강해진다. 바람은 땅 위의 변화를 한데 섞어서 냄새를 전한다. 계절의 변화는 감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바람 타고 콧속으로 들어온 가을 향은 나를 순식간에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데려다 놓는다. 이유 없이 울적해지거나 공허한 마음도 든다. 가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우울하고 쓸쓸한 감정이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가을에 덮쳐오는 감정 쓰나미에는 저항하고 싶지 않다. 곧 겨울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을 타는 것는 온탕에서 냉탕으로 옮겨 가기 전 몸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와 비슷하다. 일종의 마음 준비다. 그래서 나는 가을이 되면 으레 하는 의식을 치르듯 ‘레옹’을 틀고 그 속에 퐁당 빠진다. 그리워할 대상이 없어도 이 영화를 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겨울을 나기 위해 가을 타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젠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그리워하기 위해 영화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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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가 순수한 사람


  

군더더기 없는 행동에 적은 말수, 무표정한 얼굴에 동그란 안경. 삶 전체가 감정 없는 회색빛으로 물들어있을 것 같은 킬러에게도 평온한 일상이 있다. 레옹의 ‘온앤오프’는 반전 그 자체다. 집으로 돌아와 ‘클리너’로의 시간을 오프하고 나면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굽은 등을 하고 앉아서 우유를 마시고, 햇살을 받으며 정성스레 반려 식물의 잎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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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너가 아닌 ‘레옹’이라는 사람 자체의 모습이 모든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동네 꼬마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동그란 안경 뒤에 감추어져 있던 사려 깊은 눈동자는 그의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내가 레옹에게 마음을 빼앗기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마틸다가 온 가족을 잃고 그의 문 앞을 두들겼을 때, 집에 들어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할 때, 그리고 마틸다가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레옹은 마틸다를 구하고 시종일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위로한다.

 

표정이 굳지 않은 킬러라니. 그는 생각보다 다채로운 표정을 보인다. 무장 해제된 모습에 순순히 거짓 없는 진실을 털어놓기까지.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빠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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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레옹의 미소가 좋다. 그의 미소에는 순수함이 묻어있다. 어린 아이처럼 활짝 피어나는 웃음이 꾸밈 없어서 자꾸만 시선이 간다. 찰나의 미소는 일 년에 한 번 피우는 꽃 같아서 더 매력적이다. 그는 몸만 큰 어른,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사람이다.

 

 

마틸다 : 난 다 컸어요, 레옹. 나이만 먹는 거지.

레옹 : 나하고는 반대로구나. 난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어. 아직 애라 그렇지.

 

 

'순수한 킬러'라는 캐릭터성은 한편으로 넌센스다. 그런데도 그런 성격이 영화와 이질감 없이 어우러질 수 있던 건 레옹을 연기한 배우 ‘장 르노’의 타고난 마스크와 섬세한 표정 연기 덕이 아닌가 싶다. 그가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인상은 보통 사람의 것보다 더 상반된다. 무표정하면 한없이 차갑고, 웃으면 순박하기 그지없다. 누와르와 코믹을 넘나드는 배우의 표정이 레옹을 만들었다.

 

그의 순수함은 때때로 어리숙함으로 변한다.앞날을 고민할 시기에 제대로 시간을 갖지 못하고 토니의 밑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토니를 보스 이상의 존재로 생각하는 듯 하다. 토니의 말 한마디에 표정을 바꾸니 말이다. 레옹은 토니의 눈치를 보며 웃다가도 충고를 들으면 싸하게 식어버린다. 그런 걸 보면 레옹이 토니에게 감정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그가 원하는 삶을 소망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사는 이유는 토니에게 정신적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쓸 줄도 모르는 상황에서 재정관리까지 보스에게 맡겨버렸으니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토니는 레옹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편의대로 레옹을 이용할 뿐이었다.

 

 

 

해방시키고 싶은 사람


  

레옹은 정해진 운명 외에는 다른 것을 꿈꾸지 않았다. 알지 못해서 꿈꿀 수도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새로운 세상을 조금씩 스미게 한 것은 마틸다였다. 마틸다는 레옹의 진면목을 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강단 있는 캐릭터다. 집도 가족도 모두 잃고, 애초에 세상에 갖고 있던 욕심도 없던 마틸다가 애정을 준 사람은 다섯 살짜리 동생뿐 이었다. 동생마저 잃은 마틸다를 보며 ‘잃을 게 없으면 무서운 것도 없다’는 이야기는 마틸다 같은 사람을 두고 나온 말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목숨을 담보로 ‘LOVE OR DEATH’를 외치고, 창밖을 향해 총을 난사하며 레옹이 자신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도록 압도하는 그녀의 강단을 보고 있다보면 ‘12살이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건가?’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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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은 다행히 마틸다를 만나고 삶의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허를 찌르는 명대사를 주고 받는 한편 장난을 치거나 귀여운 연기 놀이를 하며 그들만의 즐거운 일상을 만들어간다. 늘 의자에 앉아 선잠을 자던 레옹은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기까지 한다. 그는 소중히 지키고 싶은 대상을 만나 뜻대로 행동하고, 원하는 바를 입 밖으로 꺼내기도 한다. 레옹은 자신의 결핍을 애써 부정하며 보지 않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마틸다를 만나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죽음이 코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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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잠도 자고, 뿌리도 내릴 거야."
 

 

나는 그를 해방시키고 싶었다. 마틸다가 레옹의 화분을 학교의 넓은 화단에 심은 것처럼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넓은 땅 위에서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도 괜찮다고. 나는 모든 이야기를 알면서도 매번 같은 장면에서 마음 아파하고, 마지막에서는 절절히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는 것처럼 커다란 상실감을 느낀다. 화룡점정으로 Sting의 'Shape Of My Heart'는 마음에 불을 붙인다.

 

내 감정은 녹슨 수도꼭지에 힘을 주면 팍 하고 물이 터지는 것처럼 무방비 상태가 된다. 이번에도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꼭지를 잠그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했던 그의 모습을 짚어가며 기억할 수 있어 좋다. 앨범을 보며 실제 누군가와의 추억을 상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음은 아파도 알게되어 좋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가을이 되면 그가 떠날 것을 알면서도 그를 보고 싶고,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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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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