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부를 담은 숨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9.29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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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행위에는 영양분 섭취나 최소한의 수면 등과 같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근본이 되는 행위는 단연 호흡일 것이다. 우리가 매분, 매초 인지하고 있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이 행위는 생존에 대한 본능이며 삶 그 자체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호흡’이나 ‘숨’은 정의 그대로의 의미만큼이나 다양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약 7개월간, 이곳에 기고할 오피니언을 써 내려가며 나 역시 적어도 한 번쯤은 사용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용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글을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괴로운 일이고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Control+F라는 유용한 단축키를 사용하여 내 글 안에 숨어 있는 ‘호흡’과 ‘숨’을 찾아보기로 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리고 기억이 말해주었던 대로 그 표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 몇 가지를 써 보자면, 생동감과 현실감 넘치는 사진을 표현하기 위해 ‘그 속에 살아 숨 쉬었던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각자의 소유품을 통해 그들에게 캐릭터성을 부여하는 소설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인물들에게 숨을 불어 넣는다’와 같은 구절을 적었다. 영생을 사는 인물이 소멸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춤을 추는 사람을 보며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으리라 추측해보기도 했다. 문자 그대로 죽음을 경험해보았다는 의미와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동시에 담고 싶었다.


비유적 표현의 영역에서 벗어나, 본래 호흡과 숨이 속해있는 과학의 영역도 언급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과목들을 공부했던 같은 학년의 학생들이 두 갈래로 분리되기 전, 정규 교육과정에서 분명히 다루었을 테지만, 과학과 수학에 담을 쌓고 살아왔던 지난 몇 년간을 되돌아보니 호흡의 정확한 정의와 원리를 떠올리기엔 무리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번엔 검색 엔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호흡은 생리학적, 거시적인 의미로서의 호흡과 생화학적, 미시적인 의미로서의 호흡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흔히 외호흡이라고 불리는 생리학적 호흡은 ‘세포와 외부 환경 사이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운반하는 호흡’이며 산소를 섭취하고 배출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이와 다르게 내호흡, 즉 생화학적 호흡은 ‘생물의 세포가 영양물질을 물과 이산화탄소로 산화시켜 에너지를 얻는 화학적 과정’이다. 이렇게 생성된 에너지는 인간의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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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설 ‘숨’에서는 비유적 표현으로서의 숨보다 과학적 영역에서의 숨이 더 중요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숨’의 작가인 ‘테드 창’은 SF 장르, 그중에서도 과학적 사실과 논리성에 초점을 맞춘 ‘하드 SF’ 소설의 대표자이다. 현재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허구의 세계관과 기술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법칙적인 연관성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숨’의 세계는 어떠한가? 화자와 그의 종족은 모든 생물과 같이 호흡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이들의 공기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소모된다는 것이다. 허공에 가득 차 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 대신, 그들은 공기 충전소에서 두 개의 허파를 충전한다. 하루에 한 번, 비어있는 두 개의 허파를 새로운 허파로 교체하는 과정을 통해 삶을 이어간다. 회색빛으로 가득해 보이는 세상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충전되고 있는 허파들로 가득 차 그 어느 곳보다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그 장소는 사람들 간의 소통을 책임지고 있다.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자신의 숨이 채워지기까지 걸리는 짧지 않은 시간을 공기 충전소에서 직접 기다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기계적인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뜻밖에도 아주 인간적인 활동이었다. 같은 원천에서 나오는 공기로 모두가 숨을 쉰다는 것, 우리의 목숨은 하나의 같은 곳에 달려있다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타인과의 교류는 충전식 허파만큼 중요했다.


필수적인 육체 에너지와 심리적 만족감, 정서적 안정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공기 충전소에 모인 사람들은 소식의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다른 지역의 공기 충전소로 전파되는 허파 덕분에 먼 지역까지 나가지 않아도 전 세계의 소식을 파악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정해진 반경 내에서 크게 다칠 일도, 아플 일도 없는 안온한 생활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해부학자인 화자 ‘나’가 직업적 성취를 이루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허파만 제시간에 교체한다면 오랜 시간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나’는 자신의 팔 덮개를 열었다. 세월이 지나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해부학 강의를 들었던 과거의 기억처럼 말이다. 심지어 지금 상태에 안도하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열망 없는 기조의 사회 속에서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정체되어있는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와 다소 동떨어져 있는 그의 탐험가적 면모는 오랜 불가사의였던 기억의 문제와 최근 들어 관찰된 이상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무모한 시도로 이어졌다. 그는 12개의 허파와 몇 가지의 장치를 준비한 후,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뇌를 직접 해부하기 시작했다.


전방 180도 정도의 시야를 가진 인간은 그 이상을 직접 볼 수 없다. 한계가 정해진 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네 개의 프리즘을 이용해 뇌를 관찰할 수 있게 된 ‘나’는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그들의 기억이 불완전한 이유, 항상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울리는 시계탑의 오류 원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공기는 곧 생명의 원천이다." 진리라고 믿어왔던 문장이 무너지고, 사실 그들 종족을 유지해 왔던 것은 ‘기압 차이’라는 발견. 이 발견은 오랜 시간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의 열쇠로서 많은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부여했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문명의 미래를 순식간에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공기가 밀도가 높은 공간에서 낮은 공간으로 흐르는 현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움직임을 책임지고 있었다. 땅속에 자리 잡는 식물의 뿌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 계절의 변화와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매번 이루어지는 충전소로 향하는 수많은 발걸음까지. "각기 다른 압력들이 서로 균형을 맞추려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바로 그 힘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외부와 내부의 공기 압력이 같아지는 순간, 눈에 보이고 머리로 알고 있는 모든 생명과 사물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종족의 소멸이 확정된 순간,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동시에 대기 농도가 짙어지는 것을 최소화하거나, 압력의 균등화를 역전 시키자는, 종말에 대응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그러나 불가능을 깨닫고 떠나거나 삶을 체념하는 이들이 생겨났으며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희망의 가닥을 찾는 끈질긴 ‘역전 주의자’ 집단만이 남아 그들의 낙관론적 믿음을 이어갔다.


‘나’는 압축이니, 무한 동력이니 하는 역전 주의자들의 노력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그의 종족이 겪게 될 일을 알고 있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산물을 통해 기압 균등화 과정의 속도를 늦춘다고 할지라도 완벽한 평형 상태를 막을 수는 없다. 뇌의 사고 속도가 저하되어 외부 세계는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느껴질 것이며, 몸의 기능도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 남아 있는 얕은 희망 한 겹을 놓치지 않는다.


그 희망을 바탕으로 ‘나’는 기록을 남기기로 한다. 자기 종족과 문화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디에 머물렀는지. 후에 이 기록을 읽은 이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에 숨 쉬었던 존재들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기억은 보존되고 숨은 이어진다.


  

하지만 내게는 실현 가능성이 한층 더 희박할지언정, 또 다른 희망이 있다. 이웃하는 우주의 주민들이 우리의 우주를 단지 공기 저장고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통로를 뚫어 직접 탐험하러 오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다. 탐험자들은 우리의 거리를 거닐며 우리의 미동 없는 몸을 보고, 우리가 소유했던 물건들을 살피고, 우리가 살았던 삶을 상상할 것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이 기록을 남긴다. 이 기록을 읽는 당신이 바로 그런 탐험자이기를 희망한다. 이 동판을 발견해 그 표면에 각인된 글을 당신이 해독해주기를 희망한다. 그러면 당신의 뇌가 일찍이 내 뇌를 움직였던 공기에 의해 작동하든 그렇지 않든, 내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당신의 사고를 형성하는 패턴들은 한때 나의 사고를 형성했던 패턴들을 복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나는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당신을 통해서.

 

당신의 동료 탐험자들은 우리가 남긴 다른 책들을 발견해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의 협동적 사고를 통해 우리 문명 전체는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정적에 감싸인 우리의 거주 지역들을 거닐며 과거 그곳의 모습을 상상해주시길. 탑시계들이 시보를 울리고, 이웃끼리 공기 충전소에 모여 얘기를 나누고, 포고꾼들이 광장에서 시를 낭독하고, 해부학자들이 교실에서 강의하는 모습을. 다음번에 당신들을 에워싼 이 얼어붙은 세계를 보게 된다면 이런 것들을 떠올려주시길. 그러면 우리 세계는 당신들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다시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p.85

 


미지의 존재에게 이 기록이 전해질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마주하는 순간, 대한민국의 평범한 독자는 현재의 인간 문명이 시작되기 전, 행성을 가득 채웠던 낯선 숨결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 행성의 유일한 주인이 아니며, 그저 다른 존재가 일구어낸 공동체의 흔적을 탐험하고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대의 광활한 유적지를 발견한 고고학자처럼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탐구하고 널리 알려 기억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낄 수도 있다.


과거 사진전에서 보았던,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던 사람들처럼 공기 충전소에서 서로의 호흡을 공유했던 존재들의 숨결을 종이 몇 장의 기록에서 발견한다. 또한 언젠가 이 기록을 마주하게 될 탐험가의 삶이 평형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는 ‘나’의 우려도 함께 찾아낸다.


그리고 이 기록을 읽은 탐험가로서 그가 우려했던 현상이 조금은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왔음을 이해한다. 기압의 균형이 맞춰지고 있는 대신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고, 허파를 충전하기 위해 공기 충전소에 가는 대신 미세먼지와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마스크를 구매한다. 일정한 시간마다 울리는 탑의 규칙이 붕괴되는 대신 계절의 길이가 변화한다.


종말의 도래를 인지한 후, ‘숨’의 세상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의 반응들은 무섭도록 현실의 세상과 닮아있다. 물리적 갈등과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기후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반대로 역전 주의자들과 같이 종말을 막기 위해 환경 보호를 위한 행동을 실천하는 단체와 개인들도 존재한다. 기후 위기에 침묵하는 언론을 비판하며 영국의 사제(Tim Hewes)는 스스로 입을 꿰맸고 미국의 기후운동가(Wynn Alan Bruce)는 경각심을 촉구하기 위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 “This is not humor. IT is all about breathing.” 결국 모든 것은 숨 쉬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돔 모양의 벽에 봉인된 세계. 복잡한 부품으로 구성된 뇌를 가지고 있으며 가슴을 열어 허파를 교체하는 존재들. 이들의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장르 그대로 픽션일 뿐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현실적이다. 우리는 ‘숨’을 재미를 위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한 사람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을 읽음으로써 그가 가졌던 한 겹의 희망을 전달받는 것이다.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교환, 타인과의 교류, 문명의 역사와 현재의 사랑을 모두 담은 숨을 지켜내기 위해서.

 

 

탐험자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무렵 나는 죽은 지 오래겠지만,

나는 당신에게 고별의 말을 남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글을 각인하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묵상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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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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