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평생 짝사랑할 영화, 패왕별희 [영화]

Farewell my concubine
글 입력 2022.09.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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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숙취도 할 일도 없는 주말, 개운하면서도 조금 긴장되는 마음으로 패왕별희를 재생했다. 벌써 십수 번을 본 영화지만 그 러닝타임과 무거움에 볼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영화를 보기 전, 지난 관람에서 메모장에 써둔 감상 몇 편을 찬찬히 읽었다. 패왕별희를 볼 때마다 공개적인 플랫폼에 나의 감상을 공유할까 고심하지만, 패왕별희를 평생 짝사랑할 것 같은 마음에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다. 이렇게 근사하고 훌륭한 영화를 리뷰할 자격이나 능력이 나에게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게 된 경위는 누적 관람 횟수로 자신감이 생겨서가 아니라, 영화를 볼 때마다 생겨나는 새로운 의문에 끊임없이 답을 찾아가며 큰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냥 별안간 벅차오른 오타쿠의 투 머치 설명이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다.


패왕별희는 1993년 작품으로 천카이거 감독과 장국영, 공리 주연의 미친 라인업을 자랑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인 경극이 영화의 핵심 제재 중 하나이며, 그중에서도 동명의 경극 작품 '패왕별희'의 내용에 따라 영화 전반을 이끌어 간다.


패왕별희란 경극의 내용부터 설명하자면, 초나라가 한나라에 항복하기 직전, 초패왕 항우와 그의 연인 우희가 마지막 사랑을 속삭인다. 항우는 우희에게 혼자서라도 도망치라 말하고, 우희는 자신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영화 <패왕별희>에서는 항우를 연기하는 단샬로와 우희를 연기하는 청데이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은 유튜브나 포털 사이트만 찾아봐도 쉽게 알 수 있으니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장면과 대사를 중심으로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1. 청데이(장국영 役)의 성적 정체성 거세


패왕별희를 여러 번 보면, 청데이가 성적 정체성을 부정 당하는 장면이 몇 차례 나온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발견한 장면은 총 세 개다. 하나는 처음 경극 학교에 버려질 때 육손이(손가락이 여섯 개인 사람)라 거부당한 뒤 어머니에 의해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잘리는 장면이다.

 

두 번째는 대사를 자꾸 틀리자 샬로가 담뱃대를 들고 입안을 쑤시는 장면인데, 나는 여기에서 목젖을 떼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장면은 장내관에게 강간을 당하는 장면인데, 청데이(아역)가 오줌이 마렵다며 장내시에게 서서 오줌을 싸는 것을 보여주며 자신이 남성임을 일깨워주지만 그럼에도 장내관은 강간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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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손가락이 잘린 어린 청데이

 

 

특히 두 번째 장면은 대사를 통해 남성성이 거세당하는 것을 적나라하고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청데이는 “我本是女娇娥,又不是男儿郎(나는 본래 계집애로, 사내아이도 아닌데)”라는 대사를 “我本是男儿郎,又不是女娇娥(나는 본래 사내아이로, 계집애도 아닌데)”라고 반복적으로 틀린다. 단샬로가 담뱃대로 입안을 쑤시자, 대사를 더이상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청데이는 다시 틀린 대사를 내뱉는다. 평생 삶과 경극을 동일시했던 청데이는 틀린 대사를 내뱉음으로써 우희의 역할을 끝내고 자신의 경극도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패왕별희 그리고 귀비취주와 목단정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이야기는 동명 경극 패왕별희지만, 영화 중간중간 다른 극이 등장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극의 상황은 청데이와 단샬로의 관계를 보여주면서 이젠 디테일만 파는 패왕별희 팬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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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비취주를 부르는 청데이

 

 

경극 귀비취주의 내용은 양귀비가 다른 비빈의 처소를 찾아가 밤을 보내는 당 현종을 기다리다 혼자 술에 취해 한탄하는 내용인데,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는 샬로와 쥬샨의 결혼식 날 일본군 앞에서 귀비취주를 공연한다. 오지 않을 사람을 그리워하는 양귀비와 청데이의 모습이 겹쳐 보이면서 청데이의 쓸쓸함을 부각시킨다.


패왕별희에서 청데이는 쥬샨의 부탁으로 일본군에 잡혀간 단샬로를 구하기 위해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한다. 그 때 선택한 작품은 목단정이다. '꽃이 피던 곳은 폐허가 되었고 태양만은 그 자리에 있는데, 태양을 즐기는 자는 어디 가고 없구나'라는 대목을 부르는데 혼자 자리를 지키는 청데이와 어디 가고 없는 단샬로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천카이거 감독의 변태같은 디테일에 덕후는 그저 눈물만 흘린다.

 

 

3. 장내관으로 보는 청나라의 몰락


위에서 언급했던 장내관은 청나라 시대 큰 권력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궁으로 경극단을 불러 공연을 시키고 변태 같은 취향을 감출 노력도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늙고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권력을 갖고 있는 장내관은 어린 황제의 즉위와 부패한 관료로 병들어 버린 청나라의 말미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 말미, 국공 내전이 끝난 직후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장내관은 거지꼴을 한 담배 장수로 전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좋아하던 경극 배우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 노인이 되어 담배를 팔며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이 문화대혁명 직전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완전히 끝나버린 청나라의 몰락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쓸쓸했다.

 


4. 격동하는 중국 현대사와 당시 사람들의 불안감

 

장국영이 연기한 청데이 다음으로 좋아하는 역할을 꼽으라면 공리가 연기한 쥬샨이다. 쥬산은 작품에서 다른 어떤 배우보다도 다층적인 면을 보여준다. 술집에서 몸을 팔지만 자존심은 팔지 않는 창녀, 샬로와 결혼하기 위해 가진 모든 걸 버리는 승부사, 아이를 잃은 어미, 샬로에게 버림받은 여인 등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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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가 연기한 쥬샨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주목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격동의 역사에서 혼란과 불안을 느끼는 보통 국민의 모습이다. 문화대혁명 전야, 쥬샨은 구시대의 유물을 모두 태우고 버린다. 그러면서 샬로에게 계속해서 무섭다, 두렵다는 말을 한다.

 

그 당시 중국 국민들의 불안함을 쥬샨을 통해 보여주는데, 쥬샨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는 구시대의 옷을 입고 목을 멘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을 목도하고 그 원인이 된 문화대혁명에 대해 반발하는 마음을 처연하게 보여준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다.

 

 

끝으로

 

사실 좋아하는 장면과 인상 깊은 대사를 하나하나 꼽자면 끝도 없겠지만, 그러다간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정말 꼭 언급하고 싶은 장면만 추려 내 생각을 전개했다.


많은 사람들이 패왕별희와 장국영이란 배우의 삶 자체를 비교하고 닮아있다고 말한다. 청데이와 장국영의 삶이 비슷하게 끝났기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장국영과 패왕별희를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함부로 그들의 삶을 재단하고 함부로 닮았다 평가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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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데이의 죽음은 경극에 대한 애정을 끝내고 단샬로에 대한 사랑을 해방으로써 완성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감정이 피곤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라는 장국영의 유서와의 일치점을 찾지 못했다.


내가 평생 짝사랑할 영화 패왕별희. 감독의 최근 작품 때문에 그의 사상이나 역량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자주 들리지만, 장국영과 공리를 캐스팅해 패왕별희라는 걸작을 세상에 남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천카이거를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

 

 

[오영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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