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결핍을 채우는 방법 [미술/전시]

글 입력 2022.09.2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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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나는 심심한 소리를 잘 한다. 방금도 글이 안 ‘써진다’고 했더니 그러면 안경을 ‘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안 되면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쓰고, 마지막에 인상을 쓰란다. 그렇게 인상 쓰며 글감을 고민한 지 벌써 두 시간 째다. 조금 이따 뮤직 페스티벌 가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다. 놀러 가는 마당에 좀 웃기는 소리지만 이 스케줄은 살짝 무리다.

 

전공과목 수업을 듣고 있는데 아빠에게 발라드 페스티벌 공연을 보러 가자는 문자가 왔다. 감히 추측건대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연락이 제일 잘 될 거다. 페스티벌 장소는 승용차를 이용해도 가는 데만 3시간이 걸린다. 날짜도 문자를 받은 날로부터 3일 후. 해야 할 일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하루를 통째로 써야 하는 스케줄이 생긴 것이다.

 

천성이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지만 동시에 일이 우선인 사람이라 고민 없이 ‘그래, 가자!’를 외쳤다고 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늘 되새기는 나가오카 겐메이의 문장이 있다.

 

 

“추억이라는 것은 ‘자신이 인생에서 무리한 일을 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뮤직 페스티벌 하나 가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유난을 떤다, 싶겠지만 내가 이렇다. 할 일을 미뤄두고 일단 노는 게 내겐 무리다.

 

특히 올해는 무리해서 일을 많이 했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힐링 하러 간 한강에서 혼자 사진 찍다 쓰러져서 응급실도 갔다 왔다. 그 와중에 ‘쉬어야 되는 제대로 된 명분이 생겼군’하며 구급차에서 변태같이 좋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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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지기 5분 전에 찍은 사진


 

원래도 불면증이 심한데 이것저것 하는 게 많으니 일주일에 10시간도 채 못 자며 시간을 보냈다. 잠을 못 자니 당연히 밥도 안 들어갔다.

 

스트레스와 폭풍 같은 업무로 몸도 마음도 쇠약해지니 자꾸만 어딘가 기대고 싶어졌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사실은 지금 힘들다고 할 판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나와 함께하는 건 나 자신 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혼자서도 온전할 수 있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병이 나서 꼬박 3주를 누워있었지만.

 

몸이 시위해서 얻어낸 휴식 기간 동안 책을 많이 읽었다. 그때 만난 작품이 바로 대만계 미국 작가 리 밍웨이의 《움직이는 정원》이다. 싱그러운 생화가 화강암으로 제작된 구불구불한 수반(水盤)에 가득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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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밍웨이, ‘움직이는 정원’, 2014년, 화강암과 꽃, 1200×134×60㎝, 도쿄 모리 미술관 설치 장면

 

 

일정한 거리가 필수인 대부분의 작품들과는 달리 직접 만져도 되고 심지어 가지고 나갈 수도 있다. 단, 작가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꽃을 뽑아 갈 때는 익숙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서 갈 것.

둘째, 길을 가는 도중에 만나는 누군가에게 반드시 그 꽃을 건네줄 것.

 

그래서 제목이 《움직이는 정원》이다. 전시 기간은 100일 정도였다. 하루에 약 1000송이의 꽃이 미술관 밖으로 나갔으니 총 10만 송이의 꽃이 세상을 여행하다 낯선 이에게 선물이 된 셈이다.

 

결국 리 밍웨이의 작품은 꽃이 꽂혀 있는 수반이 아니라 작품의 일부를 가지고 나가 새로운 길을 걷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에게 꽃을 건네며 대화하는 그 ‘경험’이다. 꽃을 받는 사람에게도 선물이 되는 이 경험은 예술과 사람, 그리고 나눔이 있는 진정한 정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늘 시야가 닿는 곳에 꽃을 둘 정도로 꽃을 좋아해서 이 작품에 더 눈길이 갔던 것도 있지만 경험을 나누는 것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게 내겐 일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힘들 때는 곁을 내주지 않음으로써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기도 한다. 힘든 일도 하나의 경험이고 일상인데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을 조금 고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생명은 누구나 결핍을 품고 있고, 이 결핍을 채우는 방법은 때에 따라 내가 아닌 타자에게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결핍’이라는 것이 결국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니 내 정원을 남에게 조금 더 보여줄 수 있겠다.

 

 

[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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