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상한 독자의 책에 관한 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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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와 관계없이 내가 꾸준히 하는 거의 유일한 것은 바로 독서다. 책이 필요해서 읽기도 하고, 재밌어서 읽기도 하고, 어떤 날은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묘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읽기도 한다.
어쨌든 늘 무언가를 읽는다. 하루에 한 페이지 혹은 일주일에 한 페이지라도 읽는다. 아주, 아주 느리더라도.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늘 어떤 책의 표지를 가까이 둔다. 마치 내가 그 책을 완독이라도 한 것처럼, 여러 차례 다시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익숙해질 때쯤 표지를 바꾸기 위해 다시 종잇장을 넘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책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또 어느 정도 이상은 실제로 그렇다. 욕심이 넘치고, 궁금한 게 많을 때면 여러 책을 동시에 읽으려 시도해보기도 하지만 사실 그건 나와 맞는 방법은 아니다. 요즘에는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를 붙잡고 있다. 이 한권으로도 충분히 무겁다.
책은 얇고 가벼울수록 좋다. 밖에 나갈 땐 두 손을 활짝 펼쳐야 겨우 가려질 만한 크기의 가방 속에 얇고 가벼운 책 한 권을 넣는다. 그러나 정작 밖에서 책을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책보다 더 작고, 책만큼 가벼운 스마트폰 속에는 더 재밌는 이야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웬만하면 책을 꼭 챙긴다. 이 산만하고 유쾌한 것들을 뒤로한 채 인내심 많은 활자를 탐독하고 싶은 어느 날을 위한 나의 작은 배려다.
그래서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부끄럽지만, 책이 없는 세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독자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간단하고도 줏대 없다. 나의 흥미를 자극하면 된다. 이걸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같은 이유로 좋아하는 장르가 바뀌어 왔다. 요즘은 문학에 빠져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드를 긁는다. 소설은 내 책일 때 가장 맛있다. 이런 이유로 자꾸만 바닥에 책이 쌓인다.
독서 편식이 있는 편 같다. 그래서 고민 끝에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다운 더 래빗홀. 우리는 한달에 한 번,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토끼굴 속으로 빠져든다. 이 모임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메모하는 습관을 만들고, 내 생각을 정리해 말로 전달하는 연습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럴수록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나의 빈틈을 발견한다. 그러나 기쁜 일이다. 책 한 권 읽었다고 꽉 차는 작디 작은 세상 속에선 살고 싶지 않다. 부족해도 넓은 우주가 더 좋다. 조금은 우울하고, 공허하지만 무엇이든 가능한 나의 작은 우주!
가장 최근에 완독한 책은 연인인 이브 생 로랑에게 보내는 피에르 베르제의 편지를 엮은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이다. 너무나도 밑줄 치고 싶은 문장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이라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이곳에 옮겨 적어본다.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두 잊어버려야 해.
그게 내가 끝없이 행한 일이었어.’
아주 느려도 계속해서 읽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일생의 한 문장을 찾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자꾸만 내게 말을 걸어오는 스마트폰 속의 어떤 소란보다, 무시할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 무심한 활자들이 마음에 더욱 깊이 박힌다. 아주 날카롭게 벼려진, 나와 내 삶 그리고 내 모든 것을 꿰뚫고 중심이 되어줄 단 한 문장.
그러나 평소에는 이렇게 유난스러운 이유를 구태여 떠올리지 않는다. 그냥 읽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며. 쓰고 보니 우정을 나누는 것과 얼추 비슷해 보인다.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한 번쯤은 나의 책 읽기에 대해 어떤 말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지금 붙잡고 있는 책을 다 읽고 나면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를 펼쳐볼 예정이다. 묘하게 들뜨는 기분이다.
책 읽기 좋은 가을이 왔기 때문인가?
[고민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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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라떼36a
- 2022.09.17 14: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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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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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 2022.09.17 16: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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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되는 글이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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