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의는 강요하지만, 존중은 강요하지 않는 사회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9.0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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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캐릭터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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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에 들어간 개인은 타인과 비교되어 상대적인 특성으로 어떤 캐릭터를 부여받는다. 누군가는 입담이 좋아서 '분위기 메이커'가 되고, 누군가는 말이 많아 '투머치 토커'가, 누군가는 얼굴이 예쁘고 잘생겨서 '여신', '남신'이 된다. 나는 대체로 '착한 아이'로 통했다. '착하다'라는 단어보다 화려하고 멋진 수식어들이 많지만, 나는 그 수식어에 만족했다. 착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고, 착하게 살아서 손해 볼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착한 아이'로 불리는 것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한 개인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권리를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나만의 고유한 영역을 지킬 수 없었다. 착한 사람이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면 졸지에 천하의 나쁜 사람이 되었고, 착한 사람이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면 뻔뻔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 배려가 자신보다 서열이 아래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라고 여겨 사람을 무시하거나 하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줄 알았지만, 현실에서 나쁜 사람은 눈치를 보게 만드는 강한 사람이 되었고, 착한 사람은 마음대로 대해도 되는 우스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야만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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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자연스레 '착한 아이' 캐릭터를 벗어던졌다. 집에서 '착한'이 어울리는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늘 착한 사람이어야 했다. 엄마에게는 별 선택권이 없었다. 엄마는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오로지 '착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엄마만이 좋은 엄마였고, 개인의 욕심을 추구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면 나쁜 엄마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해 놓은 모성상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세상의 비난을 당연히 받아야 했다.

 

엄마는 늘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노력만큼 존중받지 못했다. 엄마가 하는 일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어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드라마나 영화 속에 구현되는 완벽한 어머니의 모습과 비교하며 그들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가장 가깝고 편안한 사람이라는 명분을 붙이며 밖의 사람들에게는 하지 못할 말을 가볍게 내뱉고, 쉽게 상처를 주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혐오 표현의 대상이 되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다양한 언어적 형태로 변환되어 타인을 조롱하고 모욕하기 위해 쓰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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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은 이러한 현실을 날카롭게 동시에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철저히 엄마인 '당신'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녀는 작품의 주인공이지만, 독자는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작품에서 그녀의 이름, 취향, 기호, 장점 등 살아온 시간의 궤적이 담긴 그녀만의 정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알 수 있는 정보라고는 그녀는 아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것과,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녀의 일과는 아들로 시작해서 아들로 끝이 난다.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아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학교에 다녀와 울분을 터트리는 아들을 어르고 달랜다. 체중 때문에 놀림을 당한다는 아이를 위해 성장 클리닉에 다니고, 칼로리가 낮은 재료들을 이용해 손수 간식도 만든다. 아이들끼리 엄마 얼굴을 평가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 때문에 아들이 해를 입을까 젊은 엄마처럼 보이기 위해 관리도 열심히 받는다.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의 동기는 오직 '아들'이었다.

 

체중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니 아들은 게임을 못 해서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들에게 게임 과외 선생님을 붙여 주려고 했으나, 선생님이 엄마가 직접 배워 아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그녀는 직접 게임까지 배운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오직 아들을 위해 게임 스킬을 배우고 경험치를 쌓는다. 학교에 돌아온 아이는 어김없이 또 울고 있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 '경헌'이 게임으로 한판 뜨자고 경고장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녀는 마치 그날을 위해 살았다는 듯 호기롭게 자신이 경헌이와 게임을 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아들 대신 게임에서 이겨 경헌이의 콧대를 꺾고 아들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함이었다. 매일과 같은 연습이 빛을 발하여, 그녀는 경헌이와 게임에서 족족 승리했다. 자신만만하던 경헌은 속수무책으로 패배했고,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욕설이 담긴 채팅을 보낸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밝혀 경헌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기로 한다.

   

 

나는 지승이 xx거든

왜 이러지 xx


당신은 분명히 엄마라고 쳤는데 화면에는 자꾸 그 단어가 지워져서 올라간다.

이거 왜 이러지?

당신의 말에 아이는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대꾸한다.

채팅창에 욕 치면 블라인드 처리되잖아.

그건 엄마도 아는데, 엄마가 욕이니?

욕으로 쓰이니까 블라인드 되지.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중>

 

 

게임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엄마'를 블라인드 처리하기까지 '엄마'를 이용한 욕설은 얼마나 조악하게 다양했을까. 그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녀는 승리했지만, 패배감을 느꼈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은 존경도 감사도 아닌 '혐오'였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험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좋은 엄마가 되어도 혐오를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더한 혐오를 받을 것을 은연중에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성은 그 지점에서 더 숭고하게 그려지질 모른다. 배려와 존중을 받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무한한 사랑을 품고, 끊임없이 인내하는 존재로서 말이다. 하지만 숭고한 사랑이라는 포장 이면에는 그들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채 덧나고 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거창한 수식어를 이용한 순간적인 감탄이 아니라, 잔잔하고 끊임없는 존중과 배려이다.

 

*

 

배려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호의를 베푸는 존재에 대해서는 혐오가 넘치는 세상. 선의에 감사와 사랑이 따르지 않고, 혐오가 뒤따른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시작하려 할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복수의 흔한 공식처럼 '호의에는 호의로, 사랑에는 사랑으로, 배려에는 배려로' 과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그 정도. 그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어 미처 보지 못한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 사회로, 세상으로 넓게 퍼져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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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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