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침잠하는 푸름, 생동하는 은유 - 여름의 피부

이현아 작가의 예술 산문집 『여름의 피부』
글 입력 2022.09.0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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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피부』는 잡지사 에디터로 다양한 글쓰기를 해온 이현아 작가의 첫 예술 산문집이다.

 

저자는 노트 한 면엔 그림을 오려 붙이고 나머지 한 면엔 그림에 대한 글을 쓰는 그림일기를 쓰며 문득 자신이 모은 그림들에서 ‘푸른 기운’을 발견했다. 고유한 시선으로 세계 각국의 화가 스물네 명의 ‘푸른 그림’을 관찰하며 유년과 여름과 우울과 고독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를 이 책에 기록했다.


 

나는 늘 글을 쓰고 싶었다.

 


인용한 문장은 이 책의 가장 앞부분에 실린 「써 내려간다는 것」의 첫 문장이다.

 

늘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쓰고 싶은 글을 찾지 못했던 저자가 그림일기를 통해 세상에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발견한 기억에 대한 글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간결하고 단순한 또 소망이면서 욕망이기도 한 첫 문장으로 저자를 각인하게 되었다.

 

말하기이든 글쓰기든, 떠도는 생각을 정돈하고 표현할 적합한 단어들을 선별해 단어를 적절히 배열하는 일련의 과정은 자갈밭 위를 걷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흐릿한 상을 선명하게 읽으려 애를 쓰고, 생각이 발에 채고, 질퍽이는 의심에 붙잡혀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든 어려움을 말과 글을 만드는 일 안에서 경험한다. 저자 또한 이렇게 말한다.


 

노트 속 그림들은 나라는 먼 곳을, 타인이라는 심연을 횡단할 수 있도록 길을 냈다. 나는 길고 검은 터널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꺼이 읽고 듣고 쓰고자 한다. 아주 더딘 속도라 할지라도 멈추지만은 않는다. 말과 글은 가보지 않은 나와 타인의 세계를 디뎌보도록 하는 통로이고, 인간에겐 미지의 것을 향한 본능적인 호기심에서 비롯한 탐험과 모험의 자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겐 오랫동안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인내심이 있다. 또 타고나지 못한 민첩함으로 말버릇과 표정에 별 수없이 모든 내가 드러나는 어설픈 말하기를 감추기 위한 대안으로 정제된 글쓰기를 한다.

 

글은 섬세하고, 섬세한 건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문장을 쓰고 또 지우며 계속 쓴다.

 

나는 늘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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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의자에 앉아 글을 쓰는 여인」, 1929, 가브리엘레 뮌터

 

 

저자는 가브리엘레 뮌터의 그림 「안락의자에 앉아 글을 쓰는 여인」에서 글을 써 ‘내려가는’ 여인이 배경처럼 ‘짙푸른’ 내면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저자가 텍스트로 번역한 그림을 읽어 ‘내려가는’ 나는, 정말로 이 여인이 가라앉는 중인 듯 착각한다.

 

내가 상상하는 움직임은 오로지 수직의 방향이다. 다리를 곧게 모아 붙인 자세 그대로, 여인은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곳까지 침잠한다. 고요와 고독이 들리는 듯하지만 그가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더불어 그림에서 하나씩 생각을 길어 올리는 저자를 생각한다. 여인이 더 깊게 하강할수록 은유는 생동하고 저자는 튀어 오르는 것들을 낚아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방 안의 ‘푸른 어둠’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저자는 본문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시인 폴 발레리의 문장을 인용했다.

 

피부는 가장 깊은 것이라는 역설에서 초등학교 시절의 여름 오후를 떠올린다. 학교에 남아 청소를 한 뒤 홀로 하교를 한 날이었다. 왠지 넓은 운동장 위에 선 작은 존재로서의 감각이 생경했다.

 

무대 위 핀 조명 아래 선 사람이 된 것처럼 내리쬐는 볕이 온몸을 빠짐없이 비추는 듯했고, 그늘 한 뼘 없는 사막 같은 운동장이 마법처럼 길어지는 상상을 했다.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그래픽처럼 수놓아진 반짝이는 오후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금세 집 안이 어둠에 잠기고 손을 뻗으면 빗줄기가 촉각을 깨우는 장마철이 되면 지구는 한 번도 같은 날씨였던 적이 없었다는 노랫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선풍기의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밤이 찾아오면 지난날은 반짝이고 마는 한순간이라는 허무감에 잠겼다.

 

여름은 감각이 살아나는 계절이다. ‘새파랗게 어렸던, 덜 익은’ 유년의 푸름과 ‘사람의 몸이 파랗게 변하는’ 시퍼런 우울, ‘비밀과 은둔과 침잠’하는 짙푸른 고독 사이의 차이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푸르게 물들어가는 계절’을 통과하는 생명은 어느 계절에서보다도 빠르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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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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