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뜨거운 러시안 피아니즘을 만나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

글 입력 2022.09.04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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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페예프_리사이틀_포스터 최종.jpg



공연장의 연간 공연일정들을 살펴보다 보면, 눈에 띄는 공연들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꼭 그 공연의 기획사를 확인해보곤 한다. 익히 알고 있는 아티스트라면 보통 아티스트의 소속사에서 기획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와 다르게 다른 기획사에서 공연을 주최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살펴보는 게 습관이 됐다. 그 경험이 누적되다 보면 공연기획사의 특징 같은 것이 점차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톰프 뮤직은 나에게 항상 톡톡 튀는 이미지였다. 스톰프뮤직이 선보였던 공연들은 보편적인 클래식 공연들도 있었지만 클래식 음악을 아직 접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진입장벽을 낮추는 다양한 시도를 동반한 공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스톰프뮤직에서, 이번에는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이번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은 스톰프뮤직의 프레스티지 클래식 시리즈 공연으로, 정통 클래식을 선보이고자 기획한 시리즈다. 공연 소식을 알게 된 순간부터 기대감이 컸다. 2014년에 차이코프스키 영 아티스트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던 그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여는 리사이틀이기 때문이다. 유튜브로 보았을 때에도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그의 연주가, 실제 콘서트홀에서는 어떻게 와닿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첫 내한 리사이틀을 다 보고 난 감상은,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점이다. 음원과 영상으로도 만나볼 수 있지만, 역시 연주를 콘서트홀에서 듣는 것만큼 생생한 것은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의 연주는 영상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눈부셧다. 더군다나 이번 그의 리사이틀만큼, 러시아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리사이틀도 그렇게 흔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번 무대는 그야말로 러시안 피아니즘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베토벤도 있지만 말이다. 자신의 근원을 이루는 러시안 감성과 피아니즘을 뛰어난 기교로 선보인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첫 내한 리사이틀은 그야말로 뜨거운 순간이었다.


 



Program


L.v.Beethoven - Piano Sonata No.17 Op.31 No.2 'The Tempest'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I. Largo - Allegro

II. Adagio

III. Allegretto

 

N.Medtner - Piano Sonata in G minor, Op. 22

메트너 - 피아노 소나타 사단조, 작품번호 22


INTERMISSION

 

A.Scriabin - 5 Preludes, Op.16

스크리아빈 - 다섯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16

No.1 in B Major

No.2 in G-sharp minor

No.3 in G-flat Major

No.4 in E-flat minor

No.5 in F-sharp Major

 

A.Scriabin - 2 Impromptus, Op.12

스크리아빈 - 두개의 즉흥곡, 작품번호 12

No.1 in F-sharp Major

No.2 in B-flat minor


S.Rachmaninoff - Etudes-Tableaux Op.33

라흐마니노프 - 회화적 연습곡, 작품번호 33

I. Allegro non troppo in F minor

II. Allegro in C major

III. Grave - Meno mosso in C minor

IV. Allegro in A minor (withdrawn, reused as Op. 39/6)

V. Moderato in D minor

VI. Non allegro - Presto in E flat minor

VII. Allegro con fuoco in E flat major

VIII. Moderato in G minor

IX. Grave in C sharp minor

 




이번 공연의 프로그램 구성은 다소 흥미롭다. 처음에 프로그램을 보지 않고 그의 공연 소식만 접했을 때에는 알렉산더 말로페예프가 첫 내한을 하는 만큼, 그가 러시아 피아니즘을 본격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프로그램을 러시아 작곡가들로 구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의 선곡은 내 예상을 조금 빗나갔다.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리아빈, 메트너는 러시아 작곡가다. 물론 그가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나 프로코피에프의 작품을 선곡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소 의외긴 하지만 그래도 러시아 작곡가인 만큼 선곡이유가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이번 공연의 시작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로 하겠다고 밝혔다. 왜 이런 선곡을 한 것일까.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1부의 두 작곡가들을 좋아한다고 스톰프 뮤직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가 프로그램 전반의 구성에 대해 소회를 모두 밝히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이라 추측하기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마 그가 관객들에게 익숙한 베토벤의 템페스트로 시작하여 러시아의 낭만이 다양하고 아름답게 만개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부에서는 고전의 시기이면서도 낭만을 예견케 하는 고전주의 베토벤의 소나타 그리고 그 이후 세대로서 러시아적인 감성과 전통적인 형식에의 존중 그리고 기교의 정수들을 담은 신고전주의 메트너의 소나타를 통해 러시아 피아니즘의 구조적 완결성과 기교적 난이도 그리고 감성의 충만함을 한 번에 선보인다. 그리고 2부에서는 스크리아빈과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통해 러시아 낭만의 풍부한 색채감을 여지없이 선보이는 구조다. 베토벤으로 시작하지만 메트너, 스크리아빈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를 거치면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자신의 뿌리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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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는 이번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리사이틀의 포문을 열 첫 곡으로 선곡되었다. 템페스트의 1악장의 비장미가 넘치는 선율이 담겨 있어 마치 표제같은 폭풍이 금방이라도 몰려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다 모든 것이 사라지듯이 조용하게 끝난 후 이어지는 2악장은 잔잔하다. 사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멜랑콜리한 감정이 얼핏 느껴지기도 하는 2악장은 마치 3악장을 위한 숨고르기와도 같다. 템페스트의 3악장은 가장 유명한 악장이다. 역동적이고 화려한 선율의 연속으로, 이름처럼 폭풍같은 대목이다.


그리고 롯데콘서트홀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의 1악장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생각보다 부드러운 터치 그리고 깊은 페달링을 보여주었다. 공연을 앞두고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템페스트에 대해 예상한 것과는 다른 템페스트여서 놀랐다.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은 좀 더 담백하면서 굳건한 스타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훨씬 소프트하고 내밀한 느낌의 베토벤이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로페예프에 대해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방향의 해석이어서 의외였지만 흥미로웠다.


그가 페달을 활용하는 방식이나 피아노, 피아니시모를 잘 살리는 방식이 2악장에서는 오히려 아다지오다운 분위기를 아름답게 뒷받침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기에 감미로운 베토벤의 서정성과 잘 어우러졌다. 그렇지만 3악장에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연주는 다시 한 번 생각보다 부드러움이 두드러지는 인상을 받았다. 그 템포감 그대로, 그렇지만 조금 더 페달링을 얕게 해서 울림을 조금만 덜어냈다면 개인적인 취향에 잘 맞을 것 같았는데, 그의 취향은 나와는 달랐다. 좀 더 단단한 알레그레토를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연주는 안식이 필요했던 베토벤을 연상하게 만들어서 감상하기에 흥미로웠다.


*


이어서 두 번째 작품, 메트너의 소나타 사단조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메트너의 피아노 소나타 사단조는 기교적인 어려움과 폭발적인 감수성이 요구된다. 즉 감수성과 테크닉이 양립해야 하는 난곡인 것이다. 그런데 메트너의 소나타를 연주하면서 비로소 내 눈에는 말로페예프가 자유로워보였다. 베토벤이 그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자신한테 잘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메트너의 소나타는 신고전과 낭만이 섞여 있어 형식적인 틀은 유지되면서도 러시아 피아니즘 특유의 폭발적인 감수성과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터치와 잘 부합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히려 베토벤 템페스트보다 더 폭풍(템페스트) 같았던 메트너의 소나타에서, 말로페예프는 마치 행성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 같은 강렬함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테크닉적인 뛰어남에 더해 그의 감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풍부한 낭만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는 베토벤에서는 비교적 절제해서 보여주었던 감성을 메트너에 이르러 터뜨렸다. 베토벤과 메트너를 연이어 들으니,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억누르거나 절제한 표현보다 감정을 더 드러내는 방식의 표현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뇌우처럼 내리치는 마지막 터치가 끝나자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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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미션 후 맞이한 2부의 첫 번째 작품은 스크리아빈의 5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16이었다. 프렐류드라 짧은 곡들의 모음이지만, 이 작품은 스크리아빈의 작품세계를 잘 알 수 있는 중요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아주 짧은 곡 속에 자유로운 방식으로 스크리아빈이 담아낸 감성은 감성을 어루만지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스크리아빈의 5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16 중 1곡은 마치 봄을 노래하는 듯한 안단테다. 부드럽게 메조포르테와 피아니시모를 넘나들면서 칸타빌레로 연주하는 말로페예프의 연주는 따뜻했다. 피아니시모가 극대화된 1곡에서 그의 부드러운 터치는 날개를 단 듯 활강했다. 2곡 역시 피아니시모로 시작하며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부드러운 타건의 매력을 드러냈다. 다만 2곡은 점차 크레센도가 되면서 강렬한 드라마를 써간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여기서 강한 타건과 깊은 페달링으로 역동성을 부여하며 2곡만의 감성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다.


3곡은 왼손 화음 반주 말고 오른손은 거의 단선부로 연주되면서 코랄풍으로 전개되었다. 다시금 피아노와 메조포르테를 오가는 이 서정적이고 우아한 대목에서, 말로페예프는 부드러우면서도 경건한 느낌을 잘 살렸다. 개인적으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가 연주한 스크리아빈 프렐류드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4곡은 이별을 노래하는 듯한 분위기다. 소토 보체인 4곡은 매우 짧지만 3곡과는 또 다른 의미로 말로페예프의 감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여기서 환기하는 5곡 역시 짧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이 말로페예프를 만나 환상적이게 홀을 채웠다. 짧은 곡들이지만 스크리아빈의 탁월함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는데, 말로페예프도 1부에서보다 더 자유롭게 표현해주었다. 스크리아빈의 감성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연주였다.


*


스크리아빈의 프렐류드 다음 작품은 바로 스크리아빈의 즉흥곡이다. 이 작품은 스크리아빈의 초기 작품으로 엇박자 리듬이 많이 나타난다. 부드러운 듯한 느낌이 전반적으로 깔려있지만 중반부에 강렬한 화음이 등장하면서 반전되는 매력이 있다. 이 강렬한 화음은 훗날 스크리아빈이 이후에 보일 신비화음을 예견하는 듯하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런 차원에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가 스크리아빈의 프렐류드와 즉흥곡을 연이어 선곡한 것은, 적어도 이번 리사이틀을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스크리아빈의 음악 세계 그리고 이를 전달할 수 있는 자신의 표현력을 확실히 각인시키고자 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프렐류드에서 즉흥곡으로 넘어갈 때에 별도의 휴지기 없이 이어서 연주했다. 프렐류드에서 보여주었던 스크리아빈의 매력이 즉흥곡에서는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형식과 분량에 구애를 받지 않으니, 전주곡에서보다 더욱 눈부시게 자신의 감성을 드러내는 스크리아빈이 여실히 보인다. 그래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도 프렐류드에서는 감질나게 그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다면, 즉흥곡에서는 확실한 러시안 피아니즘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즉흥곡은 왼손의 아르페지오 음형이 끝없이 일렁이는 듯하면서 오른손으로 아름다운 주선율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부드러운 타건과 적절한 페달링 덕에 홀 전체가 마치 흐드러지게 꽃이 핀 들판이 된 것 같았다. 그는 모든 음표를 바람으로 만들었고, 그 바람이 객석으로 끝없이 불어오는 듯했다. 두 번째 즉흥곡은 첫 곡에서 분위기를 전환하여 단조로서 긴박한 정서를 전개해나간다. 부드러운 시작에서 강렬하게 변모하며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스트레토와 포르티시시모를 극대화시켜 좌중을 강렬하게 휘어잡았다. 그리고 심장을 치는 것 같은 마지막 세 음의 타건으로 객석을 뜨겁게 달구었다.


*


이번 공연의 마지막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이었다. 이 작품은 라흐마니노프가 휴가 차 갔던 이바노브카의 자연경관을 보고 작곡했던 곡이다. 라흐마니노프가 보았던 그 아름다운 풍경을 피아노만 가지고 회화적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관객에게는 듣기 아름답고 감상하기 즐거운 작품이지만 연주자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연습곡이다. 그러나 표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단순 연습곡을 넘어서 내용이 명확하고 표현의 다양성이 담겨 있어 작품성이 뛰어나다.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은 이번 리사이틀 2부의 작품 중에서 규모로 보나 구성으로보나 가장 압도적인 작품이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베토벤보다 메트너, 스크리아빈에서 더 자유롭게 연주하는 듯했지만 라흐마니노프에서는 자유를 넘어 거의 날아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라흐마니노프가 휴양지의 아름다움에 영감을 받아 작곡했지만, 이 작품은 휴양지다운 고즈넉함과 잔잔함보다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단순히 회화적인 작품에서 그치지 않고 에튀드로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로페예프의 비르투오소적인 면모가 강조되는 작품이기도 했다.


라흐마니노프가 에튀드로서 요구하는 기교와 회화적이라는 표제를 통해 지시하는 감성 모두를,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아울렀다. 아홉 곡이 연주되는 동안, 매곡마다 말로페예프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갔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1악장의 마지막 패시지의 피아노 왼손 파트를 연상시키는 첫 곡에서부터, 추격하는 듯한 프레스토로 유명한 여섯 번째 곡 그리고 역동적으로 감정의 격동을 쌓아나가는 9곡에 이르기까지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스크리아빈을 통해서도 러시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지만 피날레를 장식한 라흐마니노프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자신의 근간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풍부한 감성, 이를 빛내주는 기교, 그리고 적절한 표현력까지 아주 인상적인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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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인상적인 연주에 감화된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그래서 그는 관객들을 위해서 앵콜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앵콜이 그냥 앵콜이 아니라, 사실상 이번 공연의 3부나 다름없었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이번 공연에서 총 여섯 곡의 앵콜곡을 연주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앵콜곡은 플레트네프가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한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 7번(The nutcracker suite no.7)이었다. 아름답게 퍼지는 오른손 아르페지오와 왼손의 화음으로 부드럽게 일렁이는 연주였다. 어쩐지, 왜 말로페예프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곡가로 손꼽았던 차이코프스키 작품을 하나도 프로그램에 넣지 않았을까 했는데 이렇게 앵콜로 연주하기 위해서였나보다. 프로그램에 구애받지 않는 앵콜로 처음 고른 곡이 차이코프스키의 서정성이 극대화되는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 7번이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아무래도 두 번째까지는 기본적으로 앵콜을 할 것 같았는데 역시나,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피아노 앞으로 다시금 빠르게 앉았다. 두 번째 앵콜곡은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대범함이 선보이는 작품이었다.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가 아니고서야 연주하기 어려운, 밀리 발라키레프(M. Balakirev)의 이슬라메이(Islamey)를 선곡했기 때문이다. 발라키레프가 여행 중에 터키 민속 음악에 영향을 받아 작곡한 이슬라메이는 시작부터 엄청난 춤곡 리듬이 강렬하다. 이국적인 선율과 거칠게 질주하는 리듬, 그 사이를 고요히 누비는 무곡조에 이어 다시금 화려하게 빛나는 코다까지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테크닉으로 강렬하게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이 즈음 하고 앵콜이 끝이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세 번째 앵콜까지 선보였다. 무슨 곡인가 했는데, 메트너의 회상 소나타(Sonata Reminiscenza, Op.38 No.1)였다. 앵콜로 소나타 한 곡을 완주해주다니. 소나타 치고 분량이 긴 작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너무 고마운 선곡이었다. 아마도 본 프로그램에서 다뤘던 메트너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앵콜에서라도 메트너의 소나타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이 작품을 관객들에게 들려주려고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첫 번째 앵콜곡과는 또 다른 의미의 시적인 감성과 서정성이 담겨 있어,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그의 감수성과 표현력을 원없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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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앵콜까지야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네 번째로 그가 피아노 앞에 다시금 앉는 것을 보고 객석에서 즐거운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예상 외의 즐거움에 네 번째 선곡을 기다렸다. 그리고 네 번째 곡이 연주되는 순간, 그가 왜 다시 앉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이 작곡가가 나오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네 번째 앵콜곡은 말로페예프가 좋아하는 작곡가인 프로코피에프의 토카타(Toccata, Op.11)였다. 본 프로그램에 프로코피에프가 없는 건 차이코프스키 작품이 없는 것보다도 더욱 의외였는데, 이렇게 앵콜의 말미에 깜짝 선물로 연주해주다니 그야말로 짜릿했다. 짤막한 곡 속에 담긴 무수히 많은 반음계의 도약 속에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원천과 테크닉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또 한 곡의 앵콜곡을 연주했다. 이번에는 다시금 메트너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들으면서 정말 초면이었는데, 메트너의 동화(Fairy tales) 중 2번 곡 엘프 이야기(Elf tale in g minor, Op.48 No.2)였다. 이 쯤 되니, 알렉산더 말로페예프가 앵콜곡에서 러시아 피아니즘의 서정과 기교를 번갈아가며 충분히 관객들에게 선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이코프스키와 프로코피에프의 경우 알렉산더 말로페예프가 좋아하는 작곡가이므로 앵콜에서 다룬 것이 충분히 예상 가능했는데, 메트너의 작품을 두 곡이나 선보이며 소개한 것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더군다나 앵콜에서 다룬 메트너의 회상 소나타와 엘프 이야기는 본 프로그램의 피아노 소나타 사단조의 폭발적인 감성과 대조되는 시적인 감수성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러시아 작곡가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메트너에 대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애정이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런 애정을 담아서 연주하기 때문인지,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메트너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렇게 다섯 곡의 앵콜곡을 연주했는데도 뜨겁게 박수가 이어지자 말로페예프는 기어코 다시 나와 여섯번째 곡으로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의 5번(The nutcracker suite no.5)을 짧게 연주했다. 사실상 이제 가라는 뜻이 다분히 담긴 선곡이라 할 수 있겠다. 연주자가 말 없이 표현한 그 의미를 잘 받아들인 관객들도 마지막 환호를 원없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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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내한이어서 그런지 연주자가 앵콜까지 신경을 많이 쓴 게 느껴졌다. 과연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에게는 첫 한국 무대가 어땠을지 궁금하다. 비록 공연 중에 휴대폰 소리도 울리고 물건 떨어지는 소리들이 꽤 많이 나기는 했지만, 그런 것보다는 관객들이 보냈던 뜨거운 환호가 그의 기억에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 연주하는 내내 그의 귀가 아주 빨갛게 달아오른 게 2층에서도 선명히 보였는데 모쪼록 그것이 당황으로 인한 게 아니었기를 바란다.


올 한 해 동안 세계 각지를 누비며 연주를 이어오기도 했지만,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는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이다보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연유로 올 한 해 여러 공연을 취소당하기도 했다. 그 스스로는 이 전쟁에 반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한국에서의 첫 리사이틀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다. 그의 다음 내한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모쪼록 전쟁이 끝나고 평온한 상태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때 다시금,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와 같이 호흡하며 그의 뜨거운 피아노에 흠뻑 빠지고 싶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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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강인수
    • 에디터님께서 글을 너무 잘 써주셔서 마치 한 번의 공연을 더 본 느낌이네요... 저도 이번에 인천에서 그의 리사이틀을 관람했는데. 부드러움으로 시작해서 폭발적인 감정을 휘몰아치다 마지막에 깊게 스며드는 그의 다채로움에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심장이 쫄깃해지기도 하고 어깨가 들썩 거리기도 하고 너무 좋은 경험이었네요. 그의 다음 공연도 기다려지네요!
    • 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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