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단 한번으로 충분할 연애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8.3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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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순간 서사의 저력이 극대화 된다는, 이제는 다소 뻔하기까지 한 주장에 다시금 힘을 싣는다. 예술 공부에 앞서 선행한 것은 나를 이해하는 작업들이었다. 학부에 입학했을 때도 많은 전공 수업들이 그에 비중을 두고 진행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에는 나의 이야기 중 서사화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을 발전시키고, 이것이 개인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뻗어나갈 수 있도록 특정 예술 문법에 가둬내는 과정을 거쳤다. 성석제 작가의 <단 한번의 연애>를 읽고 문득 기억이 과거를 걷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터이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내밀하기에 도리어 그 때문에 광장의 특성을 지닌, 그런 신묘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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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연애>는 특색 없는 것이 특색인 인물이 그의 세상에서 가장 특출난 인물을 온 생을 걸쳐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이세길의 일대기는 다사다난한 사건들로 채워져있지만, 그 길목마다 빠짐없이 민현이 서 있다. 결국 결말 역시 민현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자칫 아주 개인적이고 지난한 사랑 서사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을, 작가는 약 50여년에 걸친 한국 현대사를 인물의 배경에 적당한 두께로 펴발라 담론적 가치로 이어질 가능성을 마련했다. 이세길의 삶일 뿐인데, 모두의 삶의 경험이 건들여지는 기적이 발휘된다. <단 한 번의 연애>는 한 개인의 삶이 정치·사회적 절대력에 의해 어떻게 좌우되는지, 또 개인은 어떻게 그에 저항하고 때로는 뛰어 넘는 저력을 보여주는지, 이 가운데에서 ‘사랑’이라는 낭만화된 가치가 어떤 영향력을 지니는지 관조하기에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작품이 무엇보다 ‘폭력’에 대해 발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각 삶의 단계마다 인물들은 수많은 종류의 폭력을 마주하는데, 이를 극복하거나 혹은 그 여파를 수용하게 만드는 것은 항시 사랑이라는 점이 뻔하지만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바다를 누비던 포수는 자신의 아내와 딸을 고래처럼 잡으려 들고, 여성을 끝없이 대상화하던 남성들은 민현을 소문의 중심으로 내몰고, 군부 독재와 그로 인한 억압 기제들은 개개인의 의지와 능력을 파괴하며, 경찰과 군인들은 독재자의 하수인이 되어 실적에만 눈이 먼 채 민간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군대에서는 후임을 죽일듯 패는 일이 뻔뻔하게 자행된다.

 

어촌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세길에게 피로 물든 바다는 인간이 어떻게 다른 종을 착취함으로써 스스로의 생명권을 보존하는지 가르쳐준 그 무엇보다 확실한 학습의 장이었을 것이다. 비록 비판적으로 관조하지는 못했더라도, 세길에게 근본적인 폭력에 대한 감각이 자연스레 스며든 계기였다 생각한다. 또한 어린 나이에도 서슬이 퍼랬던 사내 놈들과의 해프닝과 민현의 가정사 등을 통해서 인간은 비사피엔스종뿐만 아니라 같은 인간에게까지도 기꺼이 폭력을 뻗치는 존재임을 경험으로써 수용했다고 느꼈다. 이 폭력성은 성장함에 따라 좀 더 극단적으로 형상화되는데, 군부 독재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저항하는 학생 시위를 경험하며 세길은 그 재난 속에서 역설적으로 민현의 아름다움과 자신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한다.

 

민현은 언제나 그의 목적이자 결론이었다. 그리고 폭력이 가장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난 때에 무엇보다도 민현으로 인한 사랑의 가치를 극적으로 실감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세길은 민현에 비해 자의식이 희미하고 시류에 휩쓸리는 인물이다. 순응적이기까지 한 탓에 독자로서 큰 호감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나 역시 이 점을 부정할 수는 없고, 작가 역시 민현과의 대비를 위해 이를 의도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는 누구나 가질 수 없는 능력이 하나 있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고, 그 아우라는 자꾸만 흐려지며 마음을 태워 사랑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좌절되는 시기에도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세길의 저력이자 그 모든 역사의 파도를 헤엄치면서도 포수의 작살에 끝내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결말부에 세길은 민현에게 자신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묻는다. 민현의 대답은 “나를 해치지 않고 나를 독점하거나 내게서 뭘 빼앗아 가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준 건 네가 처음이야.(p.267)”였다. 사실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누군가를 향한 애정이 심지어 그를 부양하고 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으로까지 이어질 만큼 채도가 짙어지더라도, 사랑은 필시 상대의 생을 일정 부분 소유하고픈 욕구로 귀결된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사랑은 항시 폭력을 내제하고 있는데, 세길이 이 부분에서 민현의 신뢰를 산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돌아보면 세길은 민현의 외양이 어떻게 바뀌었든, 그가 어떤 위치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일을 하든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민현의 역사와 존재를 사랑했다. 행동하기 보다는 항시 수동적으로 관조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미지근한 항상성 덕분에 민현에게 있어 고향으로서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느낀다. 실제로 민현에게 고향이 그리 긍정적인 공간은 아니지만, 세길은 고향의 일반적인 이미지 (항상 돌아갈 수 있는 곳, 어딘가 그리운 곳)를 뒤집어 쓴 채 민현의 삶에서 나름의 작용을 해나간다 느꼈다. 세길은 사랑을 빌미로 타인의 삶을 소유하기 보다는 오히려 원한다면 제 삶을 소유하지 않겠나며 내어주는 일에 능했다. 현실에서는 물론, 그 어떤 서사 콘텐츠 속에서도 쉽사리 볼 수 없는 사랑의 형태라 느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작살이 주어진다면 누구나 포수가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고래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이다. 고래는 온 바다를 무대 삼을 줄 알지만, 그렇기에 춥고 막막하고 외로운 기분 또한 동반자 삼아 살아간다. 사랑의 빌미로 작살을 던지기 보다는 사랑해서 공생하기를 꿈꾸는 것이 철없는 낭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고래로서의 우리가 포수가 아닌 파도를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단 한 번의 연애>는 내게 그런 삶을, 그런 사랑을 꿈이라도 꿔볼 수 있지 않겠냐는 용기를 준 것 같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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