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찮은 예술은 없다,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 [도서]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
글 입력 2022.08.2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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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향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이다.

 

사람마다 다른 시각과 시야의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은 세상에서 사라진 화가들과 미술사가 기록하지 않은 작품들을 내 곁으로 불러내었다. 그럼 점에서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의 작가는 보다 깊고 너른 눈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난 ‘주목’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쓰이곤 한다. 세상에 주목받아야 빛나는 삶? 주목받지 못한다면 인생의 끝에서 스러지고야 마는 인생? 예술가에게 있어 ‘주목’은 자신을 옥죄이나 차마 버릴 수 없는 의미였을 것이다. 결국 세상이 주목하지 않았던 예술가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다. 진심으로.

 

요즘 신세대 용어 중 외향적인 성격은 ‘인사이더’, 내향적인 성격은 ‘아웃사이더’라는 단어가 있다. 세상에서 잊힌 예술가들의 작품을 ‘아웃사이더 아트’라 하는데,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작품을 지칭했으나, 점점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현상 즉 외침이 되는 모호한 개념으로 바뀌었다. 작가는 의문을 던진다. 과연 ‘아웃사이더’라고 이름표를 달아 분류하는 것이 공평한 것인가?

 

작가는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을 쓰기까지 많은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유명하지 않은 화가들에 왜 마음이 끌렸을까. 작가는 말한다. 사라지는 화가들을 소개하는 일은 나 자신도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다시 말해, 사라졌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삶도 감동적이거나 흥미로울 것이며 소멸되는 것이 아쉬울 뿐이라 했다.

 

 

 

카임 수틴


 

좋은 그림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의 시간을 흠뻑 쓰고 싶은 그림이 아닐까. 사람은 소중한 것에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카임 수틴의 작품이 그렇다. 내 시간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

 

수틴의 삶은 고되어 보였다. 무일푼으로 프랑스 파리로 가 무슨 일이든 했다. 힘든 와중에도 그는 화가의 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일이 없는 날이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을 관람하고, 힘들게 모은 돈으로 마련한 작업실에서 그린 것은 동물의 시체였다.

 

작품을 보면 마치 그가 난폭한 횡포를 부린 듯이 보인다. 우리 모두가 스트레스 받았을 때의 내면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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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임 수틴 ⓒMOMA

 

 

그가 동물의 시체, 고깃덩어리를 그린 것은 어렸을 때의 굶주림 때문이라고 한다. 동물의 피를 캔버스에 뿌리는 기괴한 행위도 했는데, 이로 인한 악취로 아웃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아마도 수틴은 고깃덩어리와 피를 보면서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받았던 학대와 차별의 고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수틴은 모든 대상을 뒤틀리게 그렸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간성이 추락하는 시기였는데, 광기로 가득한 유렵의 표정을 캔버스에 담은 것 같다. 그가 그린 인물들은 매우 불안해 보이고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세상이 그들을 피하고 그들도 세상을 피하는 모습 같다. 나치의 감시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수틴은 결국 적막한 죽음을 맞는다. 자신이 그리던 고깃덩어리와는 달리 눈에 띄지 않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사람들은 카임 수틴의 그림이 나쁜 그림이라고 지칭한다. 부족하거나 완벽하지 않은, 훌륭하지 못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나쁜 그림이라 분류하더라도 앞서 말했듯, 수틴의 삶과 그의 내면을 이해한다면 ‘나쁜’이 좋은‘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그림이 끌린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이를 유쾌하게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진실되고 냉소적으로 보는 태도 말이다.

 

 

 

윌리엄 에드먼슨


 

’최초‘는 누구에게나 감사하고 소중한 존재다. 예술가에게도 ’최초‘는 그를 빛내는 수식어로 오랜 시간 훈장이 된다.

 

윌리엄 에드먼슨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 흑인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 타이틀은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 많은 흑인 동료 예술가들에게는 희망을, 백인 예술가들에게는 경쟁을 해야 한다는 긴장감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에드먼슨은 노예였던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마당이 작업실이었으며, 굴러다니는 석회암 조각이 영감이 되어주었다. 그렇다면 왜 ‘돌’이었을까. 수많은 예술의 재료 가운데에서도 돌은 수천년의 시간을 우직하게 버틴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정으로 모서리를 툭툭 내려쳐 깎아낸 조각의 형상은 무심하면서도 꾸밈없는 형태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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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에드먼슨 ⓒMOMA

 

 

사실 그의 작품을 보았을 때 큰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마치 아이가 만든 듯하면서도 상당히 고도의 숙련자가 만들어낸 듯한 모순되는 느낌.

 

다만 에드먼슨의 조각은 반복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중독성이 있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가는 현대에서 세련함과 모던을 중요하게 여기는 요즘,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더욱 자연스럽고 원시적으로 느껴진다.

 

그가 만든 조각들은 돌덩어리 형태 그대로에서 아주 조금씩만 덜어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조약돌처럼 말이다. 가공되지 않은 돌처럼 우리도 잔뜩 뭉친 어깨에 힘을 빼고 살아가야겠다.

 

 

어떤 예술은 소리를 크게 지르고 춤을 추지만
어떤 예술은 늘 그 자리에 우직하게 존재하듯이.

 

  

하찮은 예술도 없고, 하찮은 삶도 없다.

 

작가의 마지막 말이다. 그리고 매우 공감이 되는 말이다.

 

<서랍에서 꺼낸 미술관>은 담아낸 예술가가 많았으며, 이보다 더 무한할 것이라는 여운을 준다. 그래서 그런가. 나도 작가처럼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잊힌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쩌면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예술가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나와 닮은 점을 하나 둘 발견할 때마다 따뜻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웃사이더로 분류되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들을 틀에서 끄집어내어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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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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