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퇴사할 결심 [영화]

박찬욱, <헤어질 결심>(2022) 만큼 단단한 결심
글 입력 2022.08.0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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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아주 작은 배신을 해보려 합니다. 평생 이곳에서 적은 월급을 받고, 제법 많은 일을, 점점 능숙하게 처리해줄 거라 믿고 있을 당신들의 믿음을 멋지게 저버릴까 합니다. 이 배신을 꿈이라든가 도전이라든가 하는 멋진 말로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제가 너무 아까워서, 저는 이제 그만 가아겠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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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실하게 할머니를 보살피고 집안일을 한다.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잠에 든다. 아이스크림이 녹는다. 죽은 새를 정성껏 묻는다. 그 모든 장면을 응시한다.
 
형사인 해준(박해일)은 한 남자가 산에서 추락한 사건 조사를 맡게 되면서 사망한 남자의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를 만나게 된다. 해준은 남편의 사고사 소식에도 감정의 동요 없이 침착하고 ‘꼿꼿한’ 모습을 보이는 서래에게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한국말, 저보다 잘하시는데요.”) 유력한 용의자인 서래를 의심해야 하는 직업적 의무감과 동시에 인간적 호기심과 연민을 품기 시작한 해준은 잠복수사를 하며 서래의 일상을 관찰(관음)하고 동화된다.
 
서래는 자신에 대한 해준의 관음적 시선을 받아들이고 호응한다. 둘의 거리는 돌이킬 수 없이 가까워져간다.


 

#1-1.
 
다 쓴 커피캡슐을 버리고 커피머신에 물을 채운다. 대표실에 들어간다. 두 대표가 먹다가 남긴 아메리카노가 말라붙은 컵을 치우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휴지뭉치가 담긴 쓰레기통을 비운다. 창문을 열어 답답한 회사에 신선한 공기를 불러들인다. 탕비실 낡은 냉장고의 냉동칸에서 플라스틱 얼음 트레이를 꺼내 물을 새로 얼린다.
 
에어컨 필터를 꺼내 먼지를 닦아낸 뒤 손을 씻고, 아이스커피 한 잔을 구수하게 말아 그제야 자리에 앉는다. 모니터 전원표시등은 멍청하게 깜빡거리고 있다. 깜깜한 모니터 화면에 언뜻 비친 나는 더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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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범죄와 싸운다. 미결 사건 시신의 사진을 집안에 붙여놓고, 범인을 쫓는다. 다정하면서도 품위 있게 말을 건넨다. 볶음밥을 만들어 먹는다. 위로하는 목소리 덕에 깊은 잠에 빠진다.
 
호기심, 연민, 그리고 이어지는 감정 변화의 길목에서 엇갈린 둘은 그들의 본분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두 사람의 관계의 시작은 형사와 용의자. 형사인 해준은 용의자 서래의 알리바이를 꿰뚫어 그녀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감추고 싶었던 진실과 (서로를 혹은 사실을) 알고자 했던 진심이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해준은 결국 서래를 보내주고, 스스로도 부산을 떠난다.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떠난 그들은 안개가 자욱한 도시 이포에서, 살인 사건 담당하게 된 형사와 살해된 남편의 미망인이자 용의자로, 다시 조우한다.

 

 

#2-2.
 
거의 매일 매출과 싸운다. 거래처 번호를 붙여놓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걸걸한 목소리를 최대한 정돈한 뒤 한층 높고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건넨다.
 
“차장님 잘 지내시죠? 다름 아니라 오늘 주문이 너무 없어서 그런데 혹시...”
 
온갖 아쉬운 소리. 구걸에 가까운 부탁. 영혼 없는 감사의 말. 이렇게 겸손하고 다정한 싸움 끝에 얻어내는 전리품은 누군가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오전 매출을 겨우 맞추는 데 성공한다. 불이 나던 전화기가 식고 나면 깊은 한숨만 남는다. 매일 비슷한 메뉴로 점심을 먹는다. 이런 싸움의 상흔은 주로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쌓인다.
 
잠이 잘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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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한 것은 없다. 남편을 죽인 사람이 다시 남편을 죽이고 나타났다. 멍한 정신으로 수사에 착수한다. 사랑했습니다, 메시지를 남기며 떠난다.
 
해준은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난 서래를 보며 혼란스러워한다. 서래 때문에 경찰로서의 자부심과 품위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한 해준은 서래를 새로운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확신하며 집착에 가까운 수사를 한다. 그러나 서래는 다시 만난 해준에게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었음을 전한 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해준을 위해, 사라진다.

 

 

#3-3.
 
마지막 날. 변한 것은 없다. 마지막으로 인수인계 자료를 정리하고, 멍한 상태로 업무를 조금 처리하고, 시간을 좀 때우고, 6시가 되어 칼같이 정시 퇴근을 한다.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그동안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연락처를 찾는다. 선물을 여러 번 결제한다. 돈은 얼마 못 벌었는데 꽤 많은 빚을 졌다. 약소하나마 하나 둘 갚기로 한다. 감사했습니다, 메시지로 진심을 전하며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나를 위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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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헤어짐’은 ‘만남’을 전제로 성립되는 것. 대체로 우리는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짐으로 향한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우연히 만나서 반드시 헤어져야 했던 흔한 이별 이야기의 세련된 변주곡이다. 만남부터 이별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의 사고는 점차 변해간다. “우리 만나도 될까요”에서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로. 조금 더 확고한 고집으로 생각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만남과 이별의 생리라면, 박찬욱은 그런 확신을 경계하면서 이별의 여운을 더 길게 늘어뜨린다. <헤어질 결심>은 좋음/나쁨으로 명징하게 구분될 수 없는 만남과 이별의 모호함에 대하여 ‘마침내’ 내린 박찬욱식 결론이다.
 
퇴사는 우연히 들어가 반드시 떠나야 함을 알게 된 회사에 대한 정직한 장송곡이다. 입사부터 퇴사에 이르는 여정에서 우리의 사고는 곪아간다. “이곳에서 열심히 해봐야지”에서 “애초에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로. 그렇게 확고한 아집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 직장인의 생애라면, 그런 확신이 후회를 늘어뜨리지 않도록 벌써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슬픔이다. 퇴사란 좋음/나쁨을 알 수 없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무릅쓰고 ‘마침내’ 내리게 된 돌이킬 수 없는 결론이다.
 
해준은 사랑을 말한 적이 없으므로, (사랑한다고 언제 말했어요) ‘헤어질 결심’은 사랑을 시작해버린 서래의 몫으로 남는다.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회사는 나를 사랑한다는 성의를 표한 적이 없으므로, 퇴사할 결심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혼자서 이별로 향하는 그 모든 결심은 단단하다. 물론 나도 결코 회사를 사랑했던 적이 없으므로, 어쩌면 내 결심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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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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