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가난을 구분하는 수십 가지 방법들 -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

빈곤은 어디서부터 문제인 걸까?
글 입력 2022.08.0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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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다양성에 대해 관심 가져본 적 있던가? 가난이 얼마나 세분화 되고 복잡한 유기체인지 알게 된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이것’이 파생하는 사회적·정치적·심리적 효과는 방대 하하고, 그 파괴력은 계급과 차별, 그리고 혐오를 제조하기까지 한다.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는 이 다양성에 대해 얘기한다. 가난에 대한 수십 가지 논의를 취합하고 각개의 원인과 문제점을 살핀다.


책을 소개하기 앞서 선수 치자면 쉽고 가벼운 책은 아니다. 처절한 가난 경험을 전달하며 연민을 자아내는 책도 아니다. 노련한 연구가가 학자적 관점에서 쓴 치밀한 논문이다. 개념과 정의를 중요시하고 사회 과학적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게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감정적 동조를 자제해 최대한 객관적이고 학문적으로 접근하여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예상보다 전문가적인 글에 잠시 낯설 수는 있지만 저자의 문체가 아닌 ‘태도’를 이해하고 나면 술술 읽힐 글이다.


가난을 마음이 아닌 머리로 이해해보는 시간. 그 거대한 규모의 전반을 훑어보고 나면 내 주위의 가난이 ‘어떤 종류의’ 가난인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진정으로’ 돕는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정의를 내린다는 건 정치적인 행동이다.


 

루스 리스터, 1949년에 태어난 노년의 여성 빈곤 연구가는 [빈곤의 정의]와 [빈곤의 측정]으로 책을 시작한다. ‘빈곤’이란 단어가 무엇을 함의하는지, 그것을 측정할 가장 정확한 방법은 무엇일지에 대해 ‘엄격하게’ 논의한다. 그 신중함의 이유는 ‘정의’를 내릴 때 ‘가치 판단’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학자들이 빈곤을 어떻게 정의 ‘내리냐’에 따라 빈민이 받을 수 있는 복지는 제한되거나 확대된다.

 

 
빈곤 당사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집단이 빈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서 그 사회의 지배적인 빈곤 개념 구성, 즉 개념화conceptualization가 이루어진다.
 


루스 리스터는 선배 학자들의 주장을 취합해 가장 정확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방법을 찾아나간다. 예컨대 영국의 사회학자 피터 타운센드는 빈곤을 “사회참여 불능”으로 정의한다. 그의 핵심 개념은 ‘참여’인데 그것을 ‘상대적 박탈’ 당했을 때 빈민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주변과 걸맞은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면 그 결함이 곧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던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도 자주 등장한다. 센은 ‘역량capabilities’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한 사람이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것. 즉 그 사람에게 열려 있는 일련의 선택.”을 말한다. 특히 “존재나 행위의 가치를 스스로 매길 수 있는 상태”로서 “이 행위를 해야 할지 저 존재가 되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한다.


때문에 센에게 빈곤이란 “최소한으로 용인 가능한 [생활]수준에 도달할 기본 역량의 상실”이다. 앞서 타운센드가 사회에서 ‘박탈’ 당했을 때,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상태를 빈곤으로 본다면, 센은 행위주체성이란 귀중한 역량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없을 때,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빈곤이라 표현한다.


비슷하지만 미세한 차이를 가진 정의들. 만약 타운센드의 개념을 토대로 빈곤 구제 정책을 펼친다면 빈민의 일자리 확대와 심리 치료에 집중할 수 있고, 센의 개념을 위주로 하면 개인의 직업 및 진로 기술 강화에 더 중점을 둘 수 있다. 이 ‘정책’이란 것은 학자들의 논의를 토대로 정치인들이 예산 분배하는 것이므로 정의에 대한 작은 간극이 복지의 성향을 아예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빈곤층이 사용할 임금, 급여, 서비스, 기회를 통제하는 쪽은 더 큰 권력을 가진 행위자들이다. 이들은 언어, 이미지, 행동을 통해 ‘빈민’을 타자로 구성할 권력도 갖고 있다.
 

 

루스 리스터는 이 ‘학자’ 단계에 있는 이로서 그 책임감을 엄중히 느끼는 사람이다. 정의와 측정법을 간주하는 것에 대해 (이 글에서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시와 ‘딴지’를 거는 것은, 편협한 시선으로 인해 복지 대상에서 제외될 단 한 명의 누군가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빈곤에도 종류가 있다.


 

빈곤을 겪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한 순간의 실수, 나태함과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타고난 정체성’으로 인한 ‘필연적 빈곤’일 수도 있다. 불행히도, 슬프게도, 안타깝게도 그렇다.


저자는 [불평등, 사회적 범주, 서로 다른 빈곤 경험]에서 빈민의 정체성과 그로 인한 집단의 동일점을 살펴본다. 성별, 인종, 장애, 연령, 지리를 구실로 누군가는 평등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여성] - 루스 리스터는 “빈곤 자체가 성별화 되어 있다”는 말을 인용한다. 남성중심 사회에선 여성이 지속빈곤과 반복빈곤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것이다. 특정성별에 대한 편파적인 빈곤은 생각보다 일상적이다. 남편이 아내보다 비싼 물건을 사는 것(자원 통제권 부족)과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자신이 사고 싶었던 물건을 내려놓는 것(자기희생).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행위가 쌓여 여성을 빈곤케 한다.


부부 혹은 동거 중인 남녀 관계에서 아내는 공동 소득임에도 돈을 분배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같은 돈을 쓰더라도 남자는 개인의 취미를 위한 ‘바이크’를 사는 반면, 여자는 가구 구성원을 위한 ‘세탁기’를 선택한다. 불공평한 상황에도 여성은 대개 반항하지 않고 복종한다. 남성 권력으로 인한 여성 빈곤의 구조적 요소가 이에 해당된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빈곤을 선택하기도 한다. 가족, 특히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의식주를 포기할 때다. 많은 빈곤여성들―엄마들―은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자녀가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음식, 의복, 난방 등을 포기한다. 또 시간과 체력을 할애해 살림을 도맡으며 ‘돌봄 노동’을 한다. ‘엄마들’은 자녀를 위해 희생하며 스스로를 빈곤의 늪에 빠트린다. 사회적으로 학습(강요)당한 아내상과 모성애를 이행하기 위해, 여성은 ‘빈곤의 성별화’의 피해자가 돼버린다.


[연령] - 늙어간다는 이유로 피할 수 없는 빈곤도 있다. 영국의 사회문제 연구가 시봄 라운트리는 유년기, 양육기, 노년기를 저점으로 하는 ‘빈곤 생애 주기’ 도식을 만들었다. “인생의 시작과 끝부분에는 특별한 형태의 빈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년기에는 노동력을 소실했기 때문에 수입원이 적어지지만 신체의 쇠약에 따라 의료비 부담이 높아진다. 유년기에는 아동 본인이 직접 돈을 벌 수 없고 보호자인 어머니 또한 노동시장에서 활동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입이 부족하다. 모두 가장 돈이 필요할 시기에 노동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다. 아직 여물지 않았거나 벌써 진이 빠져버린 신체는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신체 능력 부족’으로 인해 빈곤을 겪을 확률이 높아지는 게 바로 ‘연령’이라는 범주다. 나이 듦은 막을 수 없기에 어쩌면 가장 공평한 빈곤처럼 보이지만, 부유한 보호자를 두거나 다른 빈곤 정체성엔 해당하지 않아 원활히 부를 축적했을 경우 누군가는 가뿐하게 탈출할 수 있다.


루스 리스터가 나눈 범주는 왜 빈곤을 세분화하고 집단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요성을 말해준다. 사회적 관습과 정체성, 혹은 자연의 이치로 인한 빈곤은 ‘개인의―개인이 애쓴다고 극복할 수 있는― 빈곤’이 아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질 못할’ 빈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빈민의 복지와 처우를 개선할 수 있다.




비천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 수치심과 굴욕.


 

빈곤의 가장 큰 문제는 놀랍게도 생활비 부족이 아니다. 배를 곪거나 아파도 참을지언정 ‘이것’만큼 중요한 논점은 없다. 바로 빈민들이 느끼는 ‘심리현상’, 수치심과 굴욕에 대해서다.

 

 

빈곤 상태로 살기에 가장 괴로운 점은 주위에서 우리를 무시해도 되는 존재로 취급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거예요.

 

- 빈곤에관한범정당의원모임에서 저소득 양육자의 발언

 


빈민, ‘복지 수급자’들을 뻔뻔하고 게으르고 무능력한 ‘세금 도둑’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빈민을 불가촉천민처럼 여기는 사회적 ‘낙인’ 때문에 이들은 무시 받고 모욕당한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지 못했다는 데서 터진 수치심은 스스로를 부적합하고 무가치하다 느끼게 한다.


수치심은 굴욕을 동반한다. 굴욕은 “단순히 결핍을 개인이나 집단의 탓으로 돌리는 행위만이 아니라, 이러한 열등감을 공개적으로 단언하는 행위에 의해 발생”한다. 특히 굴욕은 “빈민을 실패자로 규정하는 만연한 소비주의와 결합”해 “일상적인 만남과 구조적인 불평등”을 자아낼 수 있다.


이 수치심과 굴욕을 피하기 위해 빈민은 스스로를 빈민이라 정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심각한 빈곤 상태에 있음에도 자신을 표현할 때 ‘빈곤’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심리적 굴욕감 때문에 빈곤 상태를 인정하는 것을 회피하다 보면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복지기관 담당자가 심판하는 듯한 태도로 급여를 진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수급을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런 심리적 고통 때문에 빈곤을 극복할 의지가 약화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빈곤 극복의 핵심은 이들의 주체성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빈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것, 그 중요성은 이후 빈곤에 대한 해결책과 이어진다.

 

 


규칙을 안 지키는 것도 빈곤 저항의 일종


 

이상적인 반빈곤 정책을 내놓기 앞서, 루스 리스터는 빈민이 빈곤을 각자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저임금 노동이나 지하 노동(마약거래와 같은 불법적 노동)을 하기도 하고, 조직을 만들어 정치적 참여를 시도하기도 한다.


독특한 건 그가 정리한 빈곤 극복에 ‘견뎌 내기’와 ‘일상 저항’이 있다는 점이다. 견뎌 내기는 저소득 상태로 ‘돈을 아끼는 것’을 말한다. 100원이라도 더 싼 물건을 찾고, 가계부를 쓰며 불필요한 지출을 막는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시되어 노력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계속적 투쟁”이다. 저자는 빈민이 ‘돈 관리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부족한 예산을 어떻게 활용할지 쉼 없이 결정해야 하는 “복잡한 자산 운용 관리자”에 가깝다고 말한다. 절약 또한 빈민에겐 과중한 스트레스로부터 ‘생존’하기 위한 끝없는 투쟁인 것이다.


‘일상 저항’은 빈곤 극복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꽤 의외의 것이다. “늑장 부리기, 시치미 떼기, 규칙 지키는 척 하기, 빼돌리기, 모르는 척하기, 비방하기, 불 지르기, 방해하기, 겉으로만 규칙을 지키는 척 하거나 복지 체계 거부하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반사회적 행동들은 빈민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을 견고히 하는데 더 일조하지만, 오히려 당사자들에겐 일종의 행위주체성을 가진 ‘저항’이 된다. 저항은 “부정적 재현과 망신주기에 맞서 긍정적 정체성과 자아감을 지키려는 투쟁”을 의미하며, 가난한 사람이 취하는 저돌적인 태도는 사회의 모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갑옷”과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피곤합니다. 
그러니까… 가난하다는 것은 평생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한다는 거예요.”
 

 

빈곤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미국의 사회학자 사라 하펀-미킨은 “[빈곤은] 장기적 이익에 ‘쏟아 낼’ 관심이 너무나 부족하고, 자기 통제 ‘근력’이 한계에 달한 절박한 상태”라고 말한다. 빈곤을 경험하는 건 상상 이상으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푼돈을 아끼고 억하심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빈민은 이미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개인은 이미 모든 경우의 가짓수로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책임을 지어야 할 차례가 온다.




빈곤의 전문가는 빈민이다.


 

정부는 학자들의 학문적 의견과 사회 활동가들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빈곤 정책을 제정한다. 루스 리스터는 여기에 ‘빈곤 당사자’들의 고견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누구보다 빈곤을 뼛속 깊이 이해하는 ‘전문가’는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소거된 채 빈곤에 대한 공감 없이 발행된 빈곤 정책은 실질성이 떨어져 근본적인 빈곤 구제를 돕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빈곤 정책을 위해선 빈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것은 수치심으로 훼손된 존엄성을 회복하고, 비주류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정치 참여 기회를 주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 분노, 고통을 외칠 기회를 주고 무엇보다 그것을 잘 ‘들어주어야’ 한다. “타인의 지식 [생산에 쓰일] 대상”이 아니라 “고유의 견해와 목소리를 지닌 사람”으로 대우 받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신뢰와 존중, 경청이다.”


빈민은 자기 경험을 분석하고 문제로 제기할 역량이 있다. 사회와 정책 기관은 “경험에서 우러난 이해와 전문성을 기존에 특권을 누리던 지식 및 전문성과 동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생생한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의 타당성과 가치를 받아 들여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지식의 병합”이다. “극도의 빈곤과 배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빈민)의 지식”과 “빈민과 함께 일하는 데 헌신한 사람들(사회 활동가, 봉사자)의 지식”과 “학문적 지식” 세 가지가 결합되면 그 지식이 더욱 고양될 수 있다. 전문가의 일원으로 대하고 그것을 해결할 권력을 나눠주어야만 실효성 있는 빈곤 복지가 발휘될 수 있다.

 

 

아무도 우리 생각을 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지닌 희망과 열망에 대한 진정한 전문가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미래와 국가의 미래에 대한 동반자로서 참여할 수 있도록, 당신들이 약간의 권력을 우리에게 넘겨줄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는 기여할 수 있습니다.

 

- 모레인 로버츠, 전국빈곤공청회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줄곧 건조한 문체로 쓰인 글을 다 읽고 나서야 저자의 심정이 보인다. 이토록 집요하고 치밀하게 빈곤 연구를 한 데에는 그만큼의 관심과 애정, 이타심이 서려있다. “북반구, 1세계, 백인, 엘리트 등 기득권”으로서 빈곤과 동떨어진 삶을 산 저자는, 그렇기에 자신이 쉽게 빈민을 타자화하고 속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긴장감을 놓지 않은 채 스스로를 검열한다. 이 자아성찰적인 태도가 곧 빈민에 대한 배려와 존중으로 이어진다.


빈곤의 정의에서부터 미래지향적인 해결책까지,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는 빈곤을 다루는데 있어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내놓는 책이다. 막연히 ‘가난’이라 생각했던 물질적·심리적 고통을 ‘빈곤’이란 차원에서 재정립할 수 있다. 저자의 헌신적인 학자적 태도, 다시 말해 객관적인 태도에 기대 빈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대신 존중으로 대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박태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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