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이 영화가 되고 영화는 삶이 되는 곳 -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

글 입력 2022.08.02 17:3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메인 포스터.jpg

 

 

영화에나 나올 법한 스웨덴의 아름다운 섬 포뢰. 이곳은 스웨덴의 전설적인 영화감독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죽기 전까지 살았던 섬으로, 실제로 이곳에서 <페르소나>를 비롯한 베르히만의 몇몇 영화가 촬영되기도 했다. 포뢰는 베르히만의 흔적으로 가득한, 이른바 ‘베르히만 아일랜드’이다. 이곳에 영화감독 커플인 토니와 크리스가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찾아온다.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액자식 구성으로, 영화 속 영화가 존재한다. 액자 바깥에는 크리스와 토니 커플이 있다. 크리스가 쓴 시나리오, 즉 액자 안에는 에이미와 조셉 커플이 있다. 영화는 액자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영화 만드는 사람-영화 속 인물, 창조주-피조물, 현실-영화의 관계를 생각해보게끔 관객을 이끈다.

 

 

2.jpg

 

 

액자 밖, 즉 현실에서 크리스는 토니는 ‘영화 속 커플’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토니는 선글라스를 비행기에 놓고 왔다는 크리스에게 선뜻 자신의 것을 내어줄 만큼 여유롭고 안정적인 사람이다. 그렇기에 좀 더 아이 같고 덤벙거리는 크리스와는 주파수가 맞지 않는 순간이 종종 생긴다. 같은 영화감독이지만 자신보다 더 인지도 높고 팬들도 많은 토니에게 크리스는 묘한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한편 액자 속, 즉 크리스의 시나리오 속 커플 에이미와 조셉은 몇 차례 사귀다 헤어지길 반복한 끝에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다. 각자 다른 사람과 만나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꾸만 끌린다.


중후반부까지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액자 밖과 액자 속 경계는 비교적 뚜렷하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이 경계는 급속히 무너진다. 영화는 삶을, 삶은 영화를 침범한다. 아이를 데리러 토니가 며칠간 섬을 나가고 홀로 남은 크리스는 베르히만의 서재에서 낮잠을 자는데, 이때 그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 속 에이미와 같은 옷을 입음 모습이다.

 

낮잠에서 깬 그는 에이미의 옷을 입은 채 별안간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액자 속 등장인물들은 액자 밖으로 나와 배우로 등장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는 크리스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현장으로, 액자 밖 이야기의 연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에이미의 옷을 입은 크리스가 조셉 역을 맡은 배우와 애틋한 눈길을 주고받을 때면 반대로 크리스가 액자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닌가 갸웃하게 된다.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은 크리스인가, 크리스의 모습을 한 에이미인가.

 

 

7.jpg

 

 

액자 속 에이미는 친구 결혼식에서 흰색 옷을 입어도 될지 고민한다. 어느 정도 흰색이냐는 친구의 질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미색인데, 그냥 봐서는 별 차이가 안 난다고 말한다. 같은 섬을 배경으로 하는 두 쌍의 닮은 듯 다른 커플. 액자 박 세계와 안 세계는 액자 속 에이미가 말하는 흰색과 미색만큼 다르고 또 같다.

 

두 세계의 유사성, 그리고 크리스에게서 에이미가 겹쳐 보이는 장면은 영화가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삶이 없으면 영화는 탄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때때로 삶을 압도하고, 그 자체로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 인물들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결말까지 나아갔다고 말하는 창작자들, 자신이 만든 영화로 삶이 정의되는 영화감독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비슷한 일을 창작자 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 역시 경험한다. 너무나 좋은 영화 또는 충격적인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그 잔상이 하루종일 남아 있다가 꿈까지 꾸게 되는 일, 한 편의 영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을 심심치 않게 본다.

 

 

8.jpg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영화만의 방식으로 이처럼 영화와 삶이 뒤섞이고 서로가 서로의 창조자가 되는 신비로운 현상을 펼쳐 보인다. 그러므로 크리스가 에이미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그 순간부터 둘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창작자와 창작물을 물과 기름처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지점은 액자 안 이야기가 나오기 전, 영화 초반부에서부터 계속 제시된다. 크리스와 토니가 섬에 도착한 직후 그들은 안내한 호스트는 부부의 방이 베르히만의 영화 <결혼의 풍경>을 촬영한 곳인데, 이 영화가 실제로 많은 부부를 이혼시켰다는 이야기를 한다.

 

또한 훌륭한 감독이었지만 동시에 책임감 없는 아버지였던 베르히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야기 나누기도 한다. 베르히만 버스 투어가 있을 정도로 베르히만으로 알려진 섬이지만 정작 베르히만에 그다지 긍정적인 감정이 없어 보이는 주민들의 모습도 비친다.

 

이처럼 영화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 또한 영화에 영향을 준다. 포뢰라는 배경 전체가 영화가 삶이 되고, 삶이 영화가 되는 현장이다.

 

 

5.jpg

 

 

여담으로, 액자 바깥과 안 말고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크게 또 다른 두 차원으로 나눠볼 수 있다면 ‘토니의 세계’와 ‘크리스의 세계’가 있을 것이다. 토니는 분명한 현실에 속한 사람이다. 그 현실에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성공과 그 결과로 받는 박수갈채가 있고, 척척 완성되는 시나리오가 있고, 딸 ‘준’이 있고 가이드와 떠나는 베르히만 버스 투어가 있다.

 

반면 크리스가 발을 걸친 영화와 환상의 세계는 뚜렷한 게 별로 없다. 크리스의 시나리오는 진도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버스 투어 대신 처음 본 청년과 함께 경로를 이탈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로 다니며 베르히만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크리스가 혼자 있을 때에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는 단발머리 청년은 그래서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그는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크리스에게 힌트를 주고 사라지곤 한다. 영화 앞뒤에 베르히만이 죽기 전 내세를 믿었다는 언급이나 유령에 대한 언급을 떠올릴 때, 이 남자는 베르히만의 유령이 아닐까. 현실과 환상, 액자의 안쪽과 바깥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문법에서 벗어난 존재.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기에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 영화를 사랑해서 영화가 삶 속으로 깊이 들어오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영화다. 더불어, 잉그마르 베르히만을 잘 아는 관객이라면 영화 곳곳에서 보이는 그의 흔적을 발견하며 좀 더 깊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의 정점을 넘어선 8월, <베르히만 아일랜드>을 보며 여름 풍경으로 가득 찬 포뢰로 가보자.


 

[김소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62674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2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