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픽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 베르히만 아일랜드 [영화]

때로 어떤 현실의 고백은 픽션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글 입력 2022.08.0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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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신작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8월 4일 개봉한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은 <다가오는 것들>로 201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 신작 <베르히만 아일랜드>에는 박찬욱, 쿠엔틴 타란티노를 비롯한 거장 감독들이 선택한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팀 로스, 미아 와시코브스카, 빅키 크리앱스, 앤더슨 다니엘슨 리와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만남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증폭시킨다.


2021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된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뉴욕 타임즈’와 ‘인디와이어’에서 극찬을 받으며 <스펜서>, <파워 오브 도그> 등과 함께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로써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입증한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미아 한센-러브 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지적이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가득 담고 있다.


 

영화감독 커플인 크리스와 토니는 각자 새로운 작품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기 위해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포뢰섬으로 향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운 토니와 달리 크리스는 좀처럼 결말로 나아가지 못하고 방황한다.


“오랜 연인의 마지막 장을 쓰고 싶어. 실패와 배신, 흥분의 연속이면서 가끔 찬란히 행복했던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그녀 자신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닿을 듯 닿지 않는 이 이야기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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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꿈을 꾸듯 아름다운 섬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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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섬으로 불리는 스웨덴의 포뢰섬에서 펼쳐진다. 바다를 가로질러 도착한 포뢰섬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바람이 살풋 불어오는 길을 자전거로 누비고, 풀밭 위에 놓인 자그마한 집에서는 명화에서나 볼 것 같은 풍차가 보인다. 장대비가 내리는 순간마저 시원하게만 느껴지는 포뢰섬은 진한 물감으로 그린 유화 같았다.


이 풍경들이 너무, 그러니까 지극히 아름다워서 슬펐다. 크리스는 머물게 된 집을 구경하며 ‘너무 아름다워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영화가 중반까지 진행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런 풍파도 없을 것만 같은 조용한 풍경은 외로움을 증폭시킨다.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아서 째깍거리는 시계의 소리가 거슬리게 만든다. 그렇게 몸집을 불린 외로움은 고독함이 되고, 끝내 불안함에 침잠되고야 만다.


반면 포뢰섬의 아름다움은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베르히만 감독은 포뢰섬을 배경으로 많은 영화를 제작했고, 다수의 예술가들도 이곳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언급했다. 극 중에서 토니 역시 포뢰섬을 배경으로 극본을 완성해가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는 창문 앞에 앉아서 분명 외로움을 느꼈다. 그 풍경과 크리스의 고독이 대비된다고 느낄 수도 있고, 어쩌면 같은 외로움을 담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어떤 쪽의 해석이든 포뢰섬의 아름다움이 이 영화의 몰입을 돕고, 관객들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바람에 넘실거리는 풀이, 언제든 몸을 던져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푸른 바다가, 푸르른 녹음이 가득한 숲이 있어서 관객들은 크리스의 감정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아름다운 포뢰섬의 풍경과 주인공들의 심경이 잘 어우러지도록 돕는 배경음악이 더해져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한껏 풍성하게 만든다.

 

 


픽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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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화와 소설 등은 결국 픽션이다. <베르히만 아일랜드> 역시 픽션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액자식 구성이라는 특이한 구성을 통해 보다 현실감 있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마치 현실과 환상을 오가게 했던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처럼 말이다.


영화는 주인공 크리스와 토니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영화가 중반까지 진행되고 나면, 크리스의 각본인 에이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즉, 픽션 안의 픽션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에이미라는 새로운 픽션을 제시하면서, 크리스의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라 현실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러한 액자식 구성은 관객들이 영화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크리스와 토니의 이야기도 포뢰섬에서 진행되고, 에이미와 조지프의 이야기도 같은 배경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야기의 전개가 헷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관객들은 더욱 집중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더불어, 크리스가 에이미의 이야기를 토니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액자 속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화자인 크리스에게만 집중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이미와 조지프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들은 에이미의 이야기에도 쉽게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도 중간 중간 크리스와 토니의 상황을 보여주어 관객들은 에이미의 이야기가 크리스의 각본임을 다시금 자각하게 되고, 이를 통해 에이미의 이야기를 크리스의 픽션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관객들이 크리스의 이야기에 조금 더 현실감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된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각본 속 크리스, 영화감독 크리스의 각본 속 에이미.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이 이야기가 마치 현실처럼 살아 숨 쉬게 만든다.

 

 

 

현실의 어떤 고백은 픽션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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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크리스의 감정선이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은 <베르히만 아일랜드> 속에서 크리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연출했고, 덕분에 관객들은 크리스가 포뢰섬에서 느낀 모든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사람은 언제 외로움을 느끼는가? 또, 사람은 어떻게 마음을 치유하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외로울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도 괴로울 수 있다. 내가 그랬고, 당신이 그랬을 것이고, 크리스가 그랬으니까.


가장 좋아하는 감독의 섬에서 영감을 받고 싶었던 크리스는 그곳에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집필의 고통 속에서 압박을 느끼는 그녀와 달리 배우자 겸 동료 감독 토니의 각본 작업이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존경하는 감독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기도 하고, 토니와 함께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는 모든 걸 해결해주지 못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그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될 때는 더욱 그렇다. 내가 직면한 문제에 공감해주고 이를 타개할 방법을 함께 고민해주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욱 많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같은 곳을 향하는 일은 정말 어렵고 또 드문 일이다. 그렇기에 크리스는 토니의 옆에서도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글을 쓰는 건 너무 어렵다. 결말이 안개 속에 가려진 글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알 수 없을 때, 이에 대해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다는 건 끝없는 고독을 불러일으킨다. 집필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외롭고, 끝없이 절망하며, 쉽게 방황한다.


집필은 자해와도 같다. 크리스의 대사 중 하나다. 집필을 피 말리는 일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크리스는 각본 작업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배우자이자 동료인 토니는 크리스와 각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토니와 배우자로서, 동료로서 대화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고, 관계 속 감정의 결여로 인한 허탈함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크리스의 각본 속에서 고스란히 표현된다.


그리고 크리스는 자신의 각본 이야기를 토니에게 들려준다.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감정을 토니에게 전달한 부분이다. 어떤 고백은 픽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크리스 역시 토니에게 픽션을 통한 고백을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실로 영화감독다운 행동이라고 느껴졌다.


크리스의 각본은 또렷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았다. 토니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크리스의 고백이 그에게 잘 전해졌을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전달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리스는 분명 이를 통해 하나의 인격체로서, 영화감독으로서 독립하게 된다. 그의 단단한 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기뻤고, 나 역시 그렇게 단단해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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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히만 아일랜드>는 곱씹을수록 여운이 남는 영화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섬의 풍경에 매혹되고, 섬이 그려내는 잔잔한 분위기 뒤에 깔린 불안감에 한없이 잠식된다. 크리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픽션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다가 끝내 크리스의 환한 웃음 하나에 나도 함께 미소 짓게 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마치 폭풍 전야 같은 느낌을 준다. 고요하고 잔잔하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하게 되는 불안감이 전체적으로 느껴진다. 극 중에서 스산한 분위기의 영화 장면이 가끔 등장할 때 불안감은 배가 된다. 얼핏 보면 평화로운 섬의 분위기가 그 긴장감을 상쇄시켜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렇지만 불쾌하지는 않을 정도라 오히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몰입력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야 긴장감이 풀리면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극장을 나서며 크리스에게 이입했던 감정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게 된다.


그런데 여운은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자꾸만 크리스를 곱씹게 된다. 크리스가 봤을 섬의 풍경, 자전거를 타고 갈랐을 바람, 구식 영사기로 봤을 영화의 한 장면, 시원한 바다를 헤엄치며 느꼈을 해방감, 그리고 텅 빈 방에 혼자 누워서 느꼈을 감정 같은 것들을 곱씹게 된다. 크리스가 느꼈을 외로움과 무력감을 곱씹다 보면 어김없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다.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생각해볼 점이 많은 영화다. 관계에 대해, 감정에 대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볼 부분이 정말 많은 영화다. 물론 영화를 감상하는 것에서 그쳐도 좋다. 분명 포뢰섬에서의 이야기는 아름답고, 흥미로우며, 아주 잠깐 슬플 테니까 그것으로 영화 감상의 순기능을 다할 테니.


여러분들이 꼭 영화관에서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보고 나와 같은 여운을 느끼길 바란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괴로움과 무력감은 어떤 사람도 분명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은 위안을 얻게 된다. 그리고 나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그 세상의 플롯을 구축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통해 한 감독이 어떻게 픽션을 품에 안고 영화를 만들어 나가는지 관찰해보길 바란다. 그를 통해 우리가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8월 4일부터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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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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