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망각의 아름다움, '기억: 지속과 소멸의 이중주'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8.01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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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존과 정체에 필수적인 기억의 날실과 그것을 가로지르는 망각의 씨줄이 적절하게 교차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정체와 세계의 옷감이 알맞게 짜일 수 있을 것이다." (137p.)
 


지난 6월 1일부터 5일까지 진행된 2022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나의 눈길을 가장 끌었던 책들은 대개 유독 작고 얇은 인문학책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인 ‘스낵컬처’처럼 쉽게 파고들기 어려운 인문학을 손가락으로 살짝 찍어 맛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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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지속과 소멸의 이중주> 또한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한 번 읽으면 결코 배신하지 않는 반려 인문학’을 슬로건으로 하여 선보이고 있는 <배반인문학> 시리즈 중 하나이다.


매대에 놓인 수많은 책 사이에서, 좁게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배반인문학> 시리즈 중에서 <기억: 지속과 소멸의 이중주>가 가장 눈에 띄었던 이유는 바로 글 서두의 문구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잊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곤 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잊어야만 또 다른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니, 게다가 이를 옷감에 비유하여 이렇게 멋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니! 이 책은 과연 우리의 기억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져 곧장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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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전자기기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기억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전화번호도, 생일도, 심지어는 이름마저도 종종 외우지 않고 살아간다. 예전 같았으면 우리의 뇌 또는 손에 맡겼을 기억을 24시간 내내 나와 꼭 붙어 떨어지지 않는 네모난 기계에 모두 줘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이제 와 이야기 하기에는 썩 흥미롭지 않은 주제일지도 모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천재적으로 기억해 주는 기계가 주변에 널렸으니 말이다.


20세기 기억 이론의 대가라고 불리는 알라이다 아스만에 따르면, 이러한 기억의 위기를 주제로 발굴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는 것은 바로 예술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기억’에 관심이 있던 차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니 머리에 남은 것은 오히려 ‘망각’이었다.


 
“살아가면서 갑자기 망각하는 일이 늘어났다면 현재 일상을 스트레스로 여기고 빨리 과거 일로 만들려는 망각 유전자들의 활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 과거에 일어난 경험들이 시간에 따라 정돈되지 못하고 현실 세계를 지배한다. 현재의 기억을 빨리 정리해서 망각하는 것도 뇌의 고등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93p.)
 


이에 따르면 망각은 결국 우리가 현실을 살게 해주는 요소이면서도 현실 도피의 증거라는 것 아닐까?

 

하루하루 굴러가는 일상이 힘겨워 이 모든 걸 과거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 제발 머릿속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기억을 지워버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이미 잊어버린 것, 그리고 잊고 싶어하는 것을 잘 잊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삶을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억과 기계의 기억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나에게 들어오는 기억을 전부 받아들이고, 또 알맞은 칸에 분류하여 필요할 때 완벽히 그 기억을 꺼내오는 일은 인간의 몫이 아니었을 테다. 앞으로는 기억에 집착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잘 잊을 방법에 초점을 맞춰보는 것은 어떨까.

 

 

[유소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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