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타인의 삶이 나에게 서서히 물들 때, 비로소 그를 이해하고 공감한다. [영화]

영화 <문라이트>가 보여 주고자 하는 것
글 입력 2022.07.31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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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이란 현시대의 맥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우리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또 그것이 올바를 때 '공정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현실의 사회에서 공정이라는 기준은 허상처럼 들릴 때가 많으며 때로는 공정이란 탈을 쓴 혐오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양 극단의 논리에서 모두 공정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뭐가 공정한 거야?”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수자', '약자'의 권리가 지켜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정만 주장하는 납작한 시각으로는 놓치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소수자들이 매일 마주해야 하는 진짜 그들의 삶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오래도록 이어진 구조적 차별로 인한 그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단편적인 공정함만 바라보게 될 수 있다.

 

한편,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하면 그들을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데 소수자라는 특수성만을 앞세우는 외침은 더욱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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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약자가 아니라 샤이론


 

영화 <문라이트>는 미국 마이애미의 한 소년이 성장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주인공 샤이론은 빈민가에 사는 흑인이자 동성애자이며 마약 중독자 어머니와 살고 있고 학교에서는 폭력의 피해자다. PC한 요소를 거의 모두 갖춘 주인공이지만 영화는 이를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잣대로 활용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어린 샤이론이 리틀이라 불리던 시절, 그에게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던 '후안'은 샤이론의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나 샤이론의 어머니에게 마약을 파는 마약상이었다. 샤이론을 가장 힘들게 한 원인 제공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샤이론이 유일하게 의지했던 친구이자 사랑한 상대인 케빈은 처음으로 샤이론을 어루만져 준 인물이다. 그러나 평소 샤이론을 괴롭히던 터렐의 지시에 따라 케빈이 샤이론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샤이론은 참을 수 없이 분노하고 결국 터렐을 폭행해 감옥으로 끌려간다. 이후 샤이론은 출소 후 본래 자신의 내면을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감추고 마약 거래상이 되기에 이른다. 어머니의 마약 복용으로 괴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샤이론이 끝내 마약상이 된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 샤이론이 사랑하는 인물들은 곧 그를 괴롭게 하기도 하고 또다시 위로를 주기도 하며 샤이론을 다면적으로 성장하게 한다. 영화는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보다는 한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 여정에 더욱 집중한다. 이로써 샤이론이 소수자라는 사실은 분명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그의 삶과 그가 느끼는 감정에 샤이론과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도 공감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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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빛이 마음에 새겨질 때


 

영화는 세 챕터로 나누어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그리고 성인이 된 샤이론을 보여준다. 각 챕터마다 리틀, 샤이론, 블랙 등 당시 주인공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름이 소제목처럼 등장하며 이는 색채로도 표현된다.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색채는 푸른색으로 이 영화의 명대사로 꼽히는 “달빛 아래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라는 대사와도 맞닿아 있다. 푸른색은 곧 평등과 자유를 상징하는 색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세 챕터마다 샤이론은 성장해 가며 외형이 크게 바뀌지만 줄곧 깊고 슬픈 눈동자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 챕터에서 마약상이 된 샤이론은 몸을 키우고 거칠어졌음에도 유약한 눈빛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과묵한 성격처럼 고요한 푸른빛을 담은 눈은 말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미국 흑인 동성애자의 삶과 전혀 접점이 없는 내가 샤이론의 감정에 동요될 수 있었던 것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게 만든 그 눈빛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성장통을 겪는다. 일련의 아픈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방황의 시기를 거쳐야 한다. 소수자라는 특수한 소재에 매몰되기보단 샤이론의 방황과 그로 인한 감정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살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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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


 

내가 아닌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도 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니 말이다. 사실 내가 살면서 제일 이해하기 힘들었던 사람은 아빠였다. 과묵하고 무뚝뚝한 아빠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이라고는 베란다에서 담배나 태우던 뒷모습이다.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는 아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상처를 받기도 했었다.

 

영화 <문라이트>에서 마약상이 된 샤이론이 오랜 세월 자신을 괴롭혀 온 어머니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장면처럼 나도 아빠를 이해하고 오해를 풀게 된 경험이 있다. 전 직장에서 매일같이 이어지는 야근에 정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던 시기였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새벽까지 일하고 돌아와 혼자 술을 마셨는데 전에 하지도 않던 담배 생각이 났다. 호기심에 곧장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서 딱 한 개비를 피웠는데 괜스레 아빠가 담배 피우던 뒷모습이 떠올랐다. 금방 털고 돌아와 손을 씻었는데 손톱 밑에서도 아빠 냄새가 났다. 그날, 나는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오해를 무너뜨리고 조금은 아빠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니까,' '딸이니까'라는 관계를 벗어나 같은 인간과 인간으로 아빠를 바라볼 수 있었다. 마치 '흑인', '동성애자'라는 소수자로서가 아닌 '샤이론'이라는 한 인물의 삶에 인간적인 공감을 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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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기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개인들이 모인 곳에서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분열을 막고 차별과 폭력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사회적 합의다. 이때 공정만큼이나 필요한 가치가 공감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그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나에게서 그들을 비추어 봄으로써 공감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각자는 더욱 넓은 포용력을 타인 그리고 또 자신에게 발휘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이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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