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과거는 못 바꿔도, 과거의 '의미'는 바꿀 수 있죠." - '실비아, 살다' 조윤지 작·연출

글 입력 2022.07.29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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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내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또는 너무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걸 다 이겨낸 미래의 내가 뿅 하고 나타나 다 잘 풀릴 터이니 걱정 말라고 말해준다거나, 좀 더 지혜롭게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비법을 전수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다.


물론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의 여성 시인이자 소설가인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그린 뮤지컬 <실비아, 살다>에서도 마찬가지다. 극 중 미래의 실비아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 여기저기 개입하지만, 일어날 일은 모두 일어나 버린다. 미래의 나라고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그냥 조금 더 많은 걸 경험한 나일 뿐이다.


지난 7월 21일 만난 <실비아, 살다>의 조윤지 작·연출에게 과거의 자신에게 갈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고 물었다. 과거로 간다고 해도 과거는 바꿀 수 없을 것이고, 특별히 해줄 말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과거의 ‘의미’는 바꿀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질문을 오래 곱씹어봤을 것 같은 사람의 대답이었다.


조윤지 작·연출은 깊은 우울에서 빠져나오던 시기에 실비아 플라스를 만났다. 실비아의 일기를 읽은 그는 미래의 내가 모든 걸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함께 살아보자고 말하는 이야기,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렇게 싹을 틔운 <실비아, 살다>는 3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

 

 

 

무대 위의 이야기:

“실비아 플라스를 살리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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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살다>는 어떤 뮤지컬인지 소개해주세요.


미국의 작가이자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삶과 작품, 그리고 죽음을 담은 뮤지컬이에요. 거기에 작가인 제 생각과 고민이 많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왜 실비아 플라스였나요? 창작자로서 어떤 부분에 매료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세 여자가 나오는 극을 구상 중이었어요. 사실 세 여자는 한 여자의 시기별로 다른 모습을 표현한 거고, 신경쇠약에 시달려 인생을 끝내려고 했던 과거의 자신을 미래의 여자가 살리는 줄거리였어요. 그때 우연히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정말 신기하게 시대도, 배경도 다른데 제가 쓰는 극에서 하려는 이야기, 담으려는 고민이 실비아의 일기 내용과도 맞닿아 있었어요.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구하는 이야기는 유지하되, 여기에 실비아를 데려와 이 여자를 살리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요. 실비아 플라스를 들여다보고,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싶었죠. 실비아의 이야기지만 여성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문제를 해결해 줄 순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한번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실비아, 살다>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여성들이 일상에서 하는 고민을 솔직하게 담아냈는데, 그러다 보니 다른 뮤지컬보다 좀 더 현실적인 분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취향이 반영된 거기도 해요. 저는 제 삶과 연결이 되고 제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좋아하거든요. 그런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음악과 환상적인 분위기가 좋아서 뮤지컬을 보시는 분도 많지만, 좀 더 현실적인 내용을 보고 싶은 분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연출님이 생각하는 <실비아, 살다>의 감상 포인트를 말씀해 주세요.


장면 전환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무대에 테이블 하나, 의자 몇 개뿐인데 극중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설정일 때, 이걸 어떻게 배치해야 다른 공간으로 넘어갔다는 걸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죠. 전환 시 암전이 되어 스텝들이 소품을 옮기는 게 아니라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배우가 직접 스텝이 되어 소품도 옮기고 무대도 셋팅하는 게 특징이에요. 장면이 전환될 때 유심히 봐주시면 소소한 재미를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두 앙상블 배우의 역할이 앙상블에 머물지 않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무대 위에 존재하며 다른 배역을 맡기도 한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에요. 앙상블 배우가 때론 요정, 신, 관객까지 되는데, 관객이 지금 웃어도 되나, 짜증 내도 되나 싶은 장면에서 같이 웃어주고 짜증 내 주며 그래도 된다고 일종의 안내를 해주기도 해요. 무대의 현장감을 높이고, 관객을 편하게 하는 역할입니다.


이 밖에도 무대만이 줄 수 있는 재미를 살리기 위해 고민과 노력을 많이 했어요. 관객분들은 워낙 볼 게 많은 시대에 시간과 돈을 들여 공연을 보러 오시는 거니까 무대만의 매력을 많이 발견해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연출님이 가장 좋아하는 넘버도 궁금합니다.


작곡가님이 워낙 잘 써주셔서 다 좋은데요, 그중에서도 ‘아빠, 이 개자식’을 가장 좋아해요. 가사에 들어간 시도 마음에 들고, 그 장면이 실비아를 억누르고 있는 것을 다 태워 버리는 화형식처럼 보이기를 바랐는데 상상했던 대로 장면이 잘 나왔어요. 다른 소극장 공연에 비해 저희 공연에 안무가 많은 편인데 이 장면도 그래서 춤 동작, 시선 하나하나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넘버 중에 ‘술 탄 물’에 대한 비유도 와닿았어요. 내게 누군가 술 탄 물을 건네서 내가 비틀거리고 진상을 부리면 그게 과연 내 탓일까 하는 부분이요.


그 가사가 반응이 좋아요. (웃음) 그 비유에 많이 공감하시더라고요. 제가 평소에 많이 하는 생각이기도 해요. 지하철을 탈 때 가끔 신경증에 걸린 것 같은 분들을 보는데, 그분들이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거잖아요. 누가 그분들의 물에 술을 탄 걸까 생각하곤 해요.


 

 

무대 뒤의 이야기:

“시대도 배경도 다른 실비아 플라스에게서 저와 같은 고민을 발견했어요.”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사진 (2).JPG

 


<실비아, 살다>를 만들기까지 어떤 일을 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뮤지컬을 만드는 게 목표였나요?


역사가 꽤 긴데요. (웃음) 중고등학교 때 배우로 활동하다가, 경제학과로 대학을 갔어요. 당연히 전공과 맞지 않아서 뮤지컬 동아리에 들어갔죠. 거기서 <실비아, 살다>를 함께한 김승민 작곡가님도 만났고요.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작가와 연출 일을 해봤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제가 게으른 사람인데, 그 일을 할 때만큼은 부지런해지는 걸 보며 연출을 해야겠다 마음먹고 미국에서 공부를 4년 했어요.


한국에 돌아와 건너 건너 연출 일을 하시는 선배님을 만났고, 저는 연출 얘기를 하려 했는데 그분은 작품 출연 제안을 해주셔서 어쩌다 보니 배우 데뷔를 하게 되었어요. 그게 10년 전 일이에요. (웃음) 연기를 하다 보니 또 재미있어서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연기 공부를 하기도 했어요. 그 무렵부터 배우 활동을 하는 동시에 지원사업으로 독립연극 등 이것저것을 만들며 창작 활동도 조금씩 해왔습니다.


<실비아, 살다>는 그 다음에 나온 작품이네요.


네. 그 전에 <윤지는 오늘도 자기 싫어한다>라는 1인극이 있었어요. 제가 배우로 출연할 뿐만 아니라 작가와 연출까지 맡은 작품으로, 우울증이 심하던 2017년, 2018년 무렵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힘든 일, 고민거리, 제 감정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직접 글을 쓰고 연출을 해보고 싶었어요. 배우로만 출연하는 것보다 더 많은 얘기를 직접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던 중에 아르코-한예종 뮤지컬 아카데미 연출 부문 합격자로 선정되어서 김승민 작곡가님과 함께 <실비아, 살다>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실비아, 살다>는 2020년 아르코-한예종 뮤지컬 아카데미, 2021년 예스24 스테이지에서의 쇼케이스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데요, 처음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일단은 길이가 점점 길어졌고요. (웃음) 쇼케이스를 두 번 거치며 관객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저희끼리도 수많은 고민과 논의 끝에 몇몇 변화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성인인 실비아 플라스의 삶이 중심이었고, 앞뒤에 나오는 기차 장면 대신 실비아가 퓰리처상을 받는 장면이 있었어요. 시작 장면은 죽은 실비아가 시상식을 바라보는 입장이고, 끝 장면은 살아서 직접 상을 받는 거였죠. 초고를 완성한 뒤에 실비아 플라스의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을 읽었는데, 그 소설에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들어 있더라고요. 그 책의 영향을 받아 앞뒤 장면을 기차 안에서의 장면으로 바꿨어요.


고민을 정말 많이 했던 건 엔딩 부분이에요. 몇십 가지 버전이 있었을 정도예요. 극 자체가 현실적이고 사람에 따라 보기 힘들 수도 있는 이야기이기에, 마무리 부분에서는 감정을 해소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괴로움을 말하는 것을 넘어 연대의 뜻을 드러내고자 빅토리아에게 도움을 받은 실비아가 또 다른 소녀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이 있었으면 했고, 그래서 마지막에 어린이 배우를 등장시켰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무대로 옮기며 가장 어려웠던 점 또는 가장 힘을 쏟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일단 실존 인물을 극화시킨 것은 달리 말해 그의 삶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 혹시 잘못된 부분이 없을지 신경을 많이 썼고 고민도 컸어요. 물론 저는 당시 외롭게 죽음을 맞았던 실비아 플라스의 편에 서서 그에게 바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긴 했지만 어쨌든, 한 사람이 실제로 살았던 삶을 이야기로 만드는 거니까요. 지금도 공연을 모니터할 때마다 그 생각을 하게 돼요.


두 번째로는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만들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제 의도와 상관없이 뜻이 왜곡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부분에서도 고민이 컸어요. 모든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라 아직도 잠을 못 잡니다. (웃음)


공연을 만들기 위해 조사하며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을 많이 읽으셨을 테고 실제로 극중에도 그의 시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기억에 남는 작품을 소개해주세요.


하나만 고르기가 힘든데, 시 「가장자리」, 「아빠」, 「야간 근무」, 소설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를 인상 깊게 봤어요. 아무래도 「아빠」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요즘도 볼 때마다 계속 다른 느낌이 나는 작품입니다. 제가 어려운 시는 잘 이해 못 하는데 이 시는 읽자마자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어서 소름 끼치는 지점이 많았어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이 아닌 언어, 솔직한 언어로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에요.

 

 

 

무대 바깥의 이야기: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제 과거의 의미도 달라지겠죠.”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사진 (7).JPG

 


실비아가 살던 시대는 70년 전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벨 자가 우리의 머리 위에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사회문제 앞에서 그런 기분을 자주 느껴요. 그럴 때마다 저는 무기력해지곤 하는데요, 작가님은 이런 순간들을 어떻게 지나시나요?


무기력해지고, 슬퍼지고, 내가 이상한가 생각이 들 때, 저도 많아요. 그럴 때 <실비아, 살다>에 빅토리아라는 존재가 있듯이, 제가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고 같이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연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그걸로 살아갈 힘을 낼 수 있다고요. 제게는 이 공연을 함께한 김승민 작곡가님이 그런 존재예요. 힘들 때면 함께 술을 마시면서 욕을 합니다. (웃음) 관객들에게는 이 작품이 그런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예민해서 그런가, 내가 이상한가 의심이 들 때 아니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거요.


<실비아, 살다>는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살리는 내용입니다. 작가님도 과거로 갈 수 있다면 나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나요?


작품 속에서 빅토리아는 과거를 바꾸려고 계속 노력하지만 결국 바뀌는 건 없거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미래가 과거를 바꿀 순 없어요. 하지만 제가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간다면, 과거의 ‘의미’가 바뀔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경우 힘들었던 시기가 이 작품을 쓰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제 과거의 의미도 달라진다고 믿어요. 과거로 가도 특별한 말을 건넬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살아내 줘서 고맙다, 사느라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럼 반대로 현재의 작가님에게 미래의 작가님이 나타난다면 어떨 것 같나요?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품이 몇 가지 더 있어요. 쓰느라 골치가 아픈 상태인데… 빅토리아처럼 미래의 제가 나타나 어떻게 쓰면 좋을지 얘기해주면 좋겠어요. (웃음)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치며 관객분들께 못 다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응원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대중과 만나는 시도를 해본 건 처음인데, 많은 분들이 작품을 보러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화려한 캐스팅이나 홍보에 의존하지 않고, 작품 자체로 승부를 보고 싶어요. 작품을 열심히 잘 만들면 망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해보고 싶기도 해요. 그리고 물론 공연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느끼겠지만, 누군가 <실비아, 살다>를 보고 뜨거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저는 이걸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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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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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옹이
    • 연출님, 실비아 살다 본 관객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공연 중 연출적으로 가장 섬세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공연 만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빠른 시일내에 다른 작품에서 또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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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콩이
    • 많은 위로가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연극과 뮤지컬 많이 만들어주세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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