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다녔나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7.25 16: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의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은 온통 물건(Thing)이다. 걸치고 있는 옷과 누워있던 침대, 침대를 감싼 천들과 몸을 일으켜 앉은 책상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들. 우리 곁의 물건들의 종류와 수는 너무 많아서 감히 전부 서술할 수도 없다.


오직 기능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에서부터 그 대척점의 것들까지. 우리는 주위의 물건들을 허투루 고르지 않는다. 크기, 모양, 색과 만듦새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수많은 후보를 추려간다. 유행에 어울리는 물건을 고를 수도 있고, 유행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갈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여러 과정을 거쳐 선택한 물건들은 나를 보여주고, 대표한다.


타인이 지닌 물건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해볼 수도 있다. 텀블러와 다회용 빨대를 가지고 다니는 이는 환경 오염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며, 작은 습식 캔을 가지고 다니는 이는 길에 사는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이는 순간의 가치를 알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일 것이며, 지하철에서 책을 꺼내 드는 이는 사정없이 흔들리는 공간 속에서도 빼곡한 글씨와 눈 맞출 수 있는 사람이다.


꼭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오랜 공백을 거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그리움과 기대가, 새로운 인연으로 향하는 길에는 긴장과 설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기다려질 때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들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테지만, 반대로 새롭게 밝아오는 날이 두려워 모든 것이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가방 안의 사소한 소지품부터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중요한 것, 그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느끼는 감정까지. 우리는 많은 것들을 소유하며, 마지막 순간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인생의 끝에 과연 우리는,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무엇이 그들의 ‘유품’이 되었을까.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The things they carried


 

131.jpg


 

팀 오브라이언의 장편 소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그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재구성한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와 동명의 화자가 알파 중대에 머무르며 함께 했던 동료들에 관한 기억을 풀어나간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진실한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 ‘내가 죽인 남자’, ‘용기에 관해 말하기’ 등 2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은 그 자체로 단편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실재와 허구를 구분 짓지 않았다.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어떤 일이 상상 속에서 구현되었는지, 그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재와 허구의 혼재 속에서 그들이 가졌던 감정은 진실되며 뚜렷하게 존재한다.

 

 

그들은 미국위문협회의 문구와 연필과 볼펜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스터노, 안전핀, 조명탄, 신호탄, 철사 타래, 면도날, 씹는 담배, 선향과 작은 염화미소 불상, 양초, 유성 펜, 성조기, 손톱깎이, 심리전 전단, 정글모, 정글도 그리고 그 외 다수를 가지고 다녔다.

/

미첼 센더스는 특별한 때를 대비해 풀 먹인 호피 무늬 전투복 한 벌을 가지고 다녔다. 헨리 도빈스는 블랙 플래그 살충제를 가지고 다녔다. 

/

그들은 기억의 무게를 나누어 졌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해주었다. 그들은 자주 서로를, 부상자와 쇠약자를 날랐다. 그들은 전염병을 날랐다. 

/

그들은 땅 자체를 — 베트남, 그곳, 그 흙을 — 날랐고 오렌지빛의 붉고 고운 먼지가 그들의 발과 전투복과 얼굴을 덮었다. 그들은 하늘을 이고 다녔다.

/

따라서 전쟁은 순전히 자세와 운반의 문제였고, 그 혹 같은 등짐이, 일종의 타성이, 일종의 공허함이, 욕구와 지성과 양심과 희망과 인간미의 그 무디어짐이 전부를 차지했다.

/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갖는 온갖 감정의 수하물을 가지고 다녔다.


 

익숙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물건들은 인물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매우 짧은 순간에 생사가 결정되는 공간에서 그저 총 든 군인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이야기를 갖게 된다. 미첼 샌더스는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 헨리 도빈스는 벌레를 싫어하는 사람이었을 테다. 행운의 조약돌을 가지고 다닌 크로스 중위와 토끼 발을 가지고 다닌 데이브 젠슨은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기억.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고통을 포함한 온갖 감정을 가지고 다닌 그들은 어느새 독자의 곁으로 성큼 다가와있다. 화자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알파 중대 사람들의 행동과 대화,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순간은 어떠한 영상물보다도 현실적이며 생생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전쟁만을 다루는 소설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한 개인의 삶에 그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화자가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무작정 캐나다로 도망쳤던 어린 소년이 죽음을 만들어내고, 또 지켜보던 시간을 거쳐 아홉 살 난 딸로부터 사람을 죽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 아버지가 된 그 긴 시간 동안의 세월을 감내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지난날을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려주는 소설인 것이다.

 

 
마흔세 살, 전쟁은 반평생 전의 일이 되었으나 기억하는 일은 아직도 그것을 현재로 만든다. 그리고 기억하는 일은 가끔씩 이야기로 이어져 그것을 영원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존재한다. 이야기는 지난날을 미래와 이어주려고 존재한다. 이야기는 당신이 있었던 자리에서 당신이 있는 자리로 어떻게 다다랐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슥한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 이야기는 기억이 지워진, 이야기 말고는 기억할 게 없는 영원의 시간을 위해 존재한다.
 

 

글을 쓰는 일은 과거를 생각하는 일이다. 과거에 보고 읽은 것, 과거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그 과정에서 지워내고 싶은 시간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거의 기억을 없애는 일, 더군다나 특정 기억만을 사라지게 하는 영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괴로움으로만 가득차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벅찬 기억일지언정, 그것을 버릴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살아가는 동안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은 가지고 있는 기억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는 것이다. 무게를 덜어내는 일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일이다. 끊임없이 떠올리며 쓴 이야기와 그 안의 담긴 감정의 공유를 통해 현재를 이루는 그 시간의 아픔을 부정하지 않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자세를 갖게 된다.

 

 

그리고 1990년으로 접어든다. 나는 마흔세 살이고 이제는 작가고 아직도 꼭 같은 방식으로 린다가 살아 있는 꿈을 꾼다. 그녀는 린다의 구현이 아니다. 그녀는 존재한 적 없는 사나이처럼 새 정체성과 새 이름을 지닌, 대부분 지어낸 사람이다.

/

하지만 아직도 나는 바로 여기서, 기억과 상상의 주문 속에서, 얼음 안쪽을 들여다보듯, 뇌종양도 장례식장도 없는, 시체가 하나도 없는 다른 어떤 세상을 들여다보듯 그녀를 볼 수 있다. 나는 카이오와도 볼 수 있고 테드 라벤더와 커트 레몬도, 또 때로는 노란 투광조명 아래서 린다와 함께 스케이트 타는 티미도 볼 수 있다. 나는 어리고 행복하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역사의 표면을 지치며 빠르게 나아가는 중이고, 스케이트 날 밑이 녹을세라 고리를 그리고 회전을 돌며, 그러다 어둠 속으로 높이 뛰어올라 30년 뒤 내려와서는, 팀이 이야기를 통해 티미의 삶을 구원하려고 안간힘 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야기의 창작을 통해 그들의 역사,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이야기의 진실(story-truth)이 종종 실제의 진실(happening-truth)보다 더 진실하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꼭 진실한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그렇기에 이야기의 감정은 무엇보다도 강력하다.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던 말을 들을 수 있고, 보고 싶은 얼굴이 활짝 웃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목소리와 얼굴이 상상의 실현일지라도 그들이 가지고 다닌 사랑만은 여전히 실재하여 남은 이들의 삶을 구원하고 있다.

 

 

[김민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