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은 못생긴 몸짓 - 연극 '가별이를 찾아서' [공연]

이 모든 방황 끝에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은
글 입력 2022.07.20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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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대학로의 한 공연장을 찾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간 공연장은 보편적인 극장과는 달리 관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없었다. 최소한의 단차도 없었고 오히려 관객석이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극장의 모습에 홀린 듯 맨 앞자리에 착석했다. 가장 경계가 없는 자리였다.

 

공연 시작 전부터 배우들은 연기를 시작했다. 조명이 켜지지도 않은 무대에서 무언갈 찾는 듯한 움직임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무엇일까? 가별이? 꿈? 삶의 의미? 정답? 그것이 무엇이든, 공연에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경계 없는 무대와 불분명한 시작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공연을 다 보고 난 후인 지금 되짚어보건대, 이 연극을 이루는 ‘경계의 불확실성’은 마치 “이 이야기 연극 아니야. 우리 이야기야. 네 이야기기도 해.”라고 말하는 듯하다. 가별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인 연극 <가별이를 찾아서>를 소개한다.

 

 

[가별이를 찾아서] 포스터.jpg

 

 

<가별이를 찾아서>는 '가별'이라는 소녀의 성장 스토리다. 연극은 가별의 어린 시절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을 거쳐 직장인이 될 때까지의 가별이의 삶을 묘사하며 흘러간다. 부모와 사회가 하라는 대로 ‘훌륭하게’ 커가는 가별은 모든 성장 과정에서 하나의 의문을 품고 있다.

 

‘훌륭함’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가별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만 정작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별은 속이 텅 비어 있다. 정답을 찾고자 부모, 교사, 교수에게 질문하지만, 사회가 규정하는 훌륭한 사람의 정의는 매번 바뀐다. 중학생 때는 착한 사람, 고등학생 때는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사람, 대학생 때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


가별은 이들의 말을 따라 매번 훌륭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면 그 정의는 또다시 바뀌어 있다. 훌륭함을 종용하던 이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가별을 책임지지 않는다.

 

남들에 의해 길을 잃는 삶을 살아온 가별은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 마침내 스스로 길을 잃는 방법을 택한다. ‘진짜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 것이다. 물이 있는 속초로 떠나 태어나 처음으로 하고 싶은 대로 산다. 극 내내 표정이 없던 가별은 이제야 노래하고 웃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제 가별은 하모니카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만의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가별의 성장에서 ‘경준’과 ‘혜나’를 빼놓을 수 없다. 경준은 가별에게 하모니카와 물이 좋은 이유를 알려준 사람이다. 혜나는 어릴 적부터 가별 곁에 있어 준 사람이다. 어쩌면 가별이 마음 놓고 길을 잃을 수 있었던 것은 ‘경준’과 ‘혜나’라는 부표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경준은 훌쩍 떠난 가별을 직접 찾아갔고, 혜나는 훌쩍 떠난 가별이 돌아올 것이라 믿어줬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성장은 덜 아프고, 더 단단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점에서 외롭지 않은 가별의 성장이 반가웠다.

   

 

 

못생긴 움직임, Ugly Movement



<가별이를 찾아서>에서 단연 기억에 남은 연출은 바로 몸짓이다. 배우들은 단순히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닌 리드미컬한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그러나 이것은 춤보다는 ‘몸짓’에 가깝다. 사건이나 주인공의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몸짓이 인상 깊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주인공들은 ‘착한 학생’을 요구하는 선생님의 대사에 맞춰 각이 딱딱 맞는 춤을 춘다. 표정 없이 안무를 구사하는 그들의 몸짓은 마치 로봇 같다.

 

반면 고3이 된 혜나와 가별은 미친 듯이 몸을 흔든다. 숨을 헐떡일 정도로 강렬하고 정신없게 팔과 다리를 움직인다. 힘들어하면서도 “지지 말자!”라고 외치며 몸을 흔드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났다. 몸짓만으로 수험생을 표현할 수 있다니. 잘 짜인 대사나 표정보다도 훨씬 와닿았다.

 

연극을 연출한 <정:지>는 이러한 몸짓을 Ugly Movement라 표현했다. 말과 표정으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캐릭터 내면의 감정을, ‘못생긴 움직임’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못생긴 움직임. 이 낯선 표현은 해당 연극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관통한다.

 

사람들은 종종 삶을 춤에 비유한다. 춤추듯 살라는 말은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명언이고, 각종 가사나 대사에도 삶과 춤은 한데 묶여 표현된다. 그러나 사실 사는 것은 춤이라기보다 못생긴 움직임에 가깝다. 안무가 정해져 있지도 않으며,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얼 표현하려는지, 내가 뭘 추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극 중 가별과 혜나의 몸짓이 극명히 대조되는 부분이 있다. 자신이 누군지,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가별의 몸짓은 마치 발작처럼 보였다. 스스로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몸짓이었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긴 하는데, 그 안에 정답이 없었다. 보는 관객보다 움직이는 가별이 더 답답해 보였다.

 

반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인 혜나의 몸짓은 다르다. 혜나가 구현하는 것은 춤에 가까웠다. 자신의 몸짓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당하고 행복해 보였다.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인물인 혜나를 단번에 설명해주는 몸짓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몸짓은 가끔 괴로운 몸부림이 되고 또 가끔은 아름다운 춤이 된다. 이 두 가지를 구분 짓는 경계는 무엇일까. 착하게 사는 것? 좋은 대학에 가는 것? 불쌍한 사람을 도와 사회에 공헌하는 것? 전부 틀렸다. 자신의 몸짓을 정확히 알고 있을 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때 삶은 비로소 아름다운 춤이 된다.

 

 

이제 다시 이 극의 제목을 보자. ‘가별이를 찾아서’. 가별을 찾는 주체는 누구인가? 가별을 사랑한 경준뿐인가? 어쩌면 경준보다 더욱 애타고 간절하게 가별을 찾는 것은 가별이다.

 

결국 이 극은 ‘가별이 가별을 찾는’ 이야기다. 못생긴 움직임이 아닌 나만의 춤을 추기 위해. 아무렇게나 부는 하모니카가 아닌 음이 있고 노래가 되는 하모니카 연주를 하기 위해.

 

길을 잃는 것은 길을 찾는 방법이라는 말이 있다. 가별은 자신을 찾기 위해 자신을 잃었다. 그 길 끝에서 가별은 ‘진짜’ 자신과 경준을 만났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길을 잃었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해진 길대로 걸어온 우리에게도 때로는 길을 잃을 용기가 필요하다. 가진 것을 기꺼이 잃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그 몸짓은, 못생겼더라도 고유할 것이다. 아주 오롯이 고유하고 자유로운 몸짓일 것이다.

 

23살에는 뭔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며 우울해하는 연인에게 '네가 23살까지 되어야 할 것은 너 자신이야'라고 답하는 어느 영화처럼, 이 모든 방황 끝에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은 훌륭한 누군가가 아닌 우리 자신이다. 가별이가 끝내 찾은 것이 가별이 자신이듯 말이다.

 

 


컬쳐김지은.jpg


   

[김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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