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음악으로 회귀하는 메시지 - 막스 리히터 스페셜 [공연]

고전과 현대의 아름다운 하모니
글 입력 2022.07.1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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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태양이 드러난 살갗을 집요하게 태우던 지난 10일, 연주회를 감상하기 위해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로 향했다. 예술의전당이라 하면 늘 미술이나 사진 전시회를 보러 가는 것이 익숙해 습관적으로 한가람 미술관을 찾던 발길을 겨우 돌려 음악당으로 향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음악당은 연주회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여 그렇지 않아도 낯선 공간이 더욱 아득하게 낯설었다. 티셔츠 속은 이미 오는 길 내내 흘린 땀으로 끈적였고 홀 안으로 들어와서도 안팎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공연을 보기도 전에 심신이 지쳐 버렸다.


이내 연주자들이 각자의 악기를 들고 무대로 올라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바이올린으로 시작한 조율 소리가 어수선하던 홀을 집중시켰다. 오케스트라 공연이 처음이었던 나는 그들이 조율하는 소리와 몸짓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웠다. 한편으론 클래식에 무지한 내가 그들의 연주를 오롯이 즐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공연포스터.jpg

 

 

과거의 음악으로 여는 문 - 조율을 마치자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아드리엘 김이 무대로 올라왔고 그들은 첫 곡으로 요제프 하이든의 <무인도> 서곡의 연주를 시작했다. 오케스트라의 웅장하면서도 활기찬 연주가 홀을 가득 채우자 이전까지와는 다른 공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후 장 필리프 라모의 오페라 <레 보레아드> 모음곡까지 풍성하게 쌓이는 소리들로 전해지는 다양한 심상들을 느끼며 어느새 더위도, 걱정도 잊고 공연에 빠져들었다.


'막스 리히터 스페셜'을 여는 처음 두 개의 곡은 막스 리히터의 것이 아닌 고전 클래식이었다.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의 지휘자 아드리엘 김은 한 인터뷰에서 이번 공연의 콘셉트가 “시대적 하이브리드의 미학”이라고 말했다. 현대 작곡가 막스 리히터의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하이든과 라모의 작품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막스 리히터의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를 통해 과거와 현대가 연결되는 순간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멜로디, 반복되는 메시지 - 드디어, 세 번째 곡으로 이번 공연의 이유인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처음 연주된다는 이 곡은 이라크 전쟁 당시 반폭력 메시지를 담은 <블루 노트북> 음반에 수록된 것으로 <셔터 아일랜드>, <컨택트> 등 다양한 영화 및 드라마에 OST로 삽입되었다.


연주는 비올라의 서정적이면서도 처연한 선율로 시작해 첼로가 감정을 증폭시키고 바이올린의 높은 선율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단순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구조로 막스 리히터 특유의 미니멀리즘 작곡 스타일을 잘 느낄 수 있는 곡이었다. 그러나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전혀 단조롭거나 지루하지 않았고 곡이 진행될수록 내면에서 점점 더 깊어지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막스 리히터가 이 곡을 작곡하게 된 계기는 이라크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이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 곡은 여전히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인류는 전쟁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세계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이반의 어린 시절>이라는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무나 조용해. 전쟁은...”


총성이 울리고 포탄이 터지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허무하리만치 고요하다.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는 고요하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반복되며 우리의 감정을 깊은 곳까지 휘젓는다. 올 초에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다. 뉴스에서 유가가 어떻고 주식이 어떻고 하는 오르내리는 숫자들로는 전쟁의 진짜 얼굴을 알 수 없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 나는 우크라이나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일상이 무너지고 가족을 잃은 그들에게도 부디 따뜻한 햇빛이 닿길 마음으로 빌었다.

 

시간을 잇는 <사계>의 아름다움 - 마지막으로 클래식 중의 클래식, '비발디 사계'를 현대식으로 재구성한 <비발디 사계 리콤포즈드>가 연주되었다. 이 곡은 다양한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 경험이 있는 김다미 바이올리니스트와 협연했다.


비발디와 다시 사랑에 빠지기 위해 이 곡을 썼다고 밝힌 막스 리히터는 비발디의 DNA는 남겨두되 원곡의 75%가량을 재작곡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봄의 1악장이었다. 김다미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는 마치 새가 힘차게 지저귀는 듯 했고 오케스트라의 연주들이 한 음 한 음 쌓여가며 생동하는 봄의 풍경을 만들어 냈다. 반복적인 멜로디와 패턴이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내며 함께 어우러지는 소리는 실제 자연 속에서 들을 수 있는 봄의 소리들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았다.


이후 악장에서도 익숙한 기존의 사계 모티브에 변칙적인 리듬의 변형 및 구조적 반복 등 막스 리히터 특유의 작곡법을 더해 세련되고 참신한 새로운 사계를 들을 수 있어 즐거웠다.


비발디의 사계는 클래식을 전혀 모르는 나에게도 매우 친근하다. 누군가의 휴대폰 알림음으로 혹은 고속도로 휴게소 등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접해 왔기 때문이다. 너무 익숙하다 생각했기 때문일까? 학창 시절 음악 수업 시간에 악장 별로 선생님이 짧게 들려주시며 설명해 주시던 때를 제외하면 비발디의 사계를 온전히 들어 본 기억이 없다.


막스 리히터의 사계 리콤포즈드를 계기로 공연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와 원곡을 처음부터 찬찬히 들어 보았다. 각 악장을 설명한 소네트와 함께 음악에 집중하니 지루하다 생각했던 편견과 달리 각각의 계절을 아름다우면서도 극적으로 표현해 과연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현대의 세련된 맛은 없지만 고전 음악 특유의 미를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데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jpg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

 

 

전쟁으로 반복되는 고통의 굴레를 향해 고요히 비추는 햇빛을 연주하고, 지나치게 가까워 잊고 지냈던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감각으로 되새기는 '막스 리히터 스페셜'이었다. 장마와 폭염에도 지겨운 일상을 견뎌야 했던 요즘,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의 열정적인 연주로 막스 리히터의 세계에 잠시 여행을 다녀온 듯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이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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