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역사는 반복된다'는 불행, 그리고 농담 - 배드 럭 뱅잉 [영화]

글 입력 2022.07.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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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은 스포일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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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럭 뱅잉>, 2022년

 

 

"농담, 기담, 우스운 이야기. 이것들은 비개연성 속을 모험하는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이 완벽한 한 쌍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증거다."

 

- 밀란 쿤데라, <커튼>

 


<배드 럭 뱅잉>의 전반적인 논조는 다음과 같다.


"그깟 섹스가 뭔 대수인데?"


2021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 직후 북미 배급을 논하는 과정에서 제작자 '에드 솔로몬'은 작품의 성적 묘사와 관련한 미국 배급사의 까다로운 태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날이 갈수록 폭력은 쉽게 수긍하는 반면, 섹스는 그렇지 않다. 나에게 폭력은 섹스보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불순한 의도가 내포된 단순 요행이 아닌, 포르노그라피를 컨텐츠로 선택하게 된 복잡한 함의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는 제작사의 입장은 필요 이상으로 폭력에 관대한 북미 시장을 향해서 건넨 일갈이다. 현재까지도 첨예하게 논쟁 중인 주제로서 예술과 외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친 희미한 경계. '라두 주데' 감독의 입을 빌리자면, 그 차이를 판가름하는 건 역시나 맥락Context에 기인한다.


초장부터 영화의 성적 모티브를 언급하는 이유는 관람객 다수의 시선을 강탈하는 인트로의 묵직한 존재감 덕분이다. 물론, 이전과 다르게 성인 매체를 접하기 용이한 작금의 세태를 감안하면 오프닝이 선사하는 충격의 실체는 눈 앞의 이미지가 아닌, 예측 불허한 타이밍에 있다. 타이틀이 채 뜨기 전부터 두 남녀의 낯뜨거운 대사와 몸짓으로 점철된 살색의 향연으로 영화는 포문을 연다. 주체 못 할 욕구 앞에서 창녀를 자처하는 한 여인의 애타는 신음과, 참지 못 할 욕망이 가시화 된 한 남자의 군침을 흘리며 불끈 솟은 남근이 침대 위에서 어지러이 뒤섞인다. 원제에 명시된 그대로 한 편의 포르노그라피를 연상시키는 도입부는 전라의 육체들 사이로 감춰진 감독의 메시지들로 무성한 음모 속으로 관객들을 유도한다(참고로, 7월 28일에 상영 예정인 영화는 라두 주데 감독이 직접 블러 처리한 버전이다).

 

 

<배드 럭 뱅잉>, 2022년

 

 

'에미'(카티아 파스칼리우)는 남편과의 합의 하에 촬영한 섹스 영상이 이유도 모른 채 포르노 사이트에 누출되면서 순식간에 교사직에서 사임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교사로서 자질 논란에 휩싸인 그녀는 학부모들의 요청으로 마련된 위원회 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변호해야만 한다.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들을 불식시키려 하지만 사태는 여의치 않다. 그 과정에서, 부쿠레슈티 한 복판을 배회하며 마주한 거리의 풍경은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며 목을 빳빳이 세운 사람들로 가득할 뿐이다. 뻔뻔함과 떳떳함의 경계가 불분명한 그들의 태도는 타인과 살벌하게 언쟁하며 거리 곳곳에 혼란을 야기한다. 전전긍긍한 속내를 쉽게 감추지 못하는 에미의 발걸음과 얼굴의 절반이 마스크로 감춰진 주민들의 냉담한 응시,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부쿠레슈티의 분주한 현재가 35mm 카메라에 고스란히 기록된다.


총 3가지 챕터로 구성된 <배드 럭 뱅잉>의 내러티브는 1차적으로 누군가의 잘못을 문책하기 위한 책임 공방이 핵심이지만, 논쟁이 지속 될수록 드러나는 건 루마니아의 민낯이다. 이와 관련하여 루마니아 영화계를 전 세계에 알리며 국위선양에 일조함과 동시에, 고국의 어두운 역사가 서사의 핵심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녔다는 점에서 크리스티안 문쥬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과 라두 주데의 <배드 럭 뱅잉>은 서로가 서로의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다. 전자가 차우세스쿠라는 독재 체제 하에 한 개인이 파멸되는 과정을 잔혹하리만치 미시적으로 파고들었다면, 후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집권한 안토네스쿠 총리 시기를 기점으로 말도 탈도 많았던 루마나아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전방위적으로 꼬집는다. 80년대의 무분별한 출산 정책으로 말미암은 그 시절의 끝없는 심연 속으로 크리스티안 문쥬가 관객들을 끌어당겼다면, 라두 주데는 현재까지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과거의 농단을 풍자의 대상으로서 대놓고 격하시킨다. 고국의 어두운 역사를 상반된 태도로 대하는 두 작품의 대조적 특성은 역사를 향한 시선을 다채롭게 견지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그 중에서도, 오프닝에서 부터 그 기미를 엿보인 라두 주데의 날카로운 감각과 익살맞은 성향은 차마 농담으로 치부할 수 밖에 없는 루마니아의 풍조를 노골적으로 비꼬기 시작한 두 번째 챕터에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휘한다.


실제로, 입체파Cubist 작품들에서 착안했다는 영화의 챕터식 구성은 무죄를 증명하려는 에미의 고군분투기가 결코 서사의 전부가 아님을 확인시킨다. 그 과정에서, 루마니아를 구성하는 주요 역사적 진술Anecdotes과 사회적 기호Signs, 그리고 개인적인 일화Wonders들이 알파벳 순으로 열거되는 두번째 챕터는 곧 있을 세 번째 챕터의 침 튀기는 논쟁을 형성하는 핵심 논거들을 일시에 예고한다. 저마다의 소개되는 개념들은 기존의 사전적 지식을 배척한 채 감독의 날선 시선을 통해 재정립한 정의들과 함께 고국이 은폐하고 싶은 암울한 사회 현실을 고발한다. 자식은 정치적 사유로 부모가 내세우는 볼모이며 피로 얼룩진 독재 체제를 상징하는 인민 궁전의 설립 잔혹사, 그리고 유럽 내 가장 많은 집시들이 거주 중인 루마니아 사회의 현 주소를 각각의 개념 정의에 부합하는 아카이브 영상들의 몽타주를 통해서 여과없이 고발한다. 때로는 관객의 헛웃음을 유발하는 기상천외한 개념 설명(금발 여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황소 분장을 한 남자가 미친듯이 그녀를 쫓아다닌다)은 감독의 익살맞은 취향과 더불어 기성 세대의 유산과 인습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그의 반골 성향과 방증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배드 럭 뱅잉>이 출품되었을 당시 레드카펫 행사와 관련하여 밝힌 그의 발언은 문화의 허영을 철저히 배척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다만, 이와 관련한 감독의 입장은 다소 반론의 여지가 있다). 값비싼 문화Fancy를 적대하는 그의 성향과 예술 매체로서 영화를 진지하게Seriously 성찰하려는 또 한 명의 시네아스트로서의 기질은 서로 시너지를 이루며 뒤에 언급할 영화의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재질을 형성한다.


35mm 카메라와 함께 다큐멘터리식으로 접근한 첫 번째 챕터와, 아카이브 영상들을 재치있게 몽타주 한 에세이 형식의 두 번째 챕터와 달리, 세 번째 챕터는 인물들이 내뱉는 수많은 대사들로 레이어된 가장 양식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다. 에미를 잡아먹을 기세로 대기 중인 학부모들의 외관은 영락없이 스스로가 루마니아의 상류층임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구를 대변한다. 사회적으로 각인되길 바라는 저마다의 위신을 시각적으로 부각시키는 그들의 패션은 개인이 갖출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허영의 장막이다. 피해자인 에미의 처지를 가볍게 무시하는 학부모들의 몰지각한 태도는 사실상 자신의 조상들을 옥죄었던 파시즘의 또 다른 재현이다. 교육을 빌미로 에미의 사퇴를 촉구하는 학부모들의 태도는 영락없이 두 번째 챕터에 소개되었던 개념 한 줄('정치적 사유로 자식을 볼모로 삼는다')을 상기시키며, 교사로서 그녀의 자질을 의심하며 제시하는 근거들은 유럽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지 못한 어느 변방 출신의 컴플렉스("옥스포드에 준하는 교육을 기대했어요")를 드러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역사 교사로서 그녀의 행적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자국의 얼룩진 사건을 은연 중에 은폐하려는 그들의 망각은 루마니아의 국민 시인 에미네스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셋팅된 공간적 특성과 맞물리면서 작품의 부조리한 바이브를 증폭시킨다. 개인은 물론 자국의 역사마저 존중하지 않는 극성맞은 토론 현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우스꽝스런 재현이다. 그 가운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 착용하는 인물들의 마스크는 특히나 양식적인 특성으로 인해 다소 비현실적인 기운이 다분한 세 번째 챕터에서 묵직한 현실감을 시작적으로 제시한다(라두 주데 감독은 극 중 인물들의 마스크 모두 루마니아에서 실제로 구할 수 있는 제품들로 선별했음을 밝혔다).


특이하게도, 작품의 현실적인 기운을 환기시키는 점과 더불어 마스크를 통한 상징 활용에 주목해 볼 필요 또한 있다. 극 중 몇 안되는 대사를 가진 신부 캐릭터가 착용한 마스크는 2020년에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추모하는 문구(I can’t breathe)가 새겨져있다. 추모 목적으로 제작된 마스크는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된 불행 때문에 목이 옥죄는 에미의 처지를 집약해서 대변하는 상징으로서 절묘하게 기능한다. 사소한 디테일과 함께 에미가 겪는 불행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지를 다시한번 보는 이들에게 각인시키는 대목이다. 이는, 그녀의 불행이 자유민주사회를 표방한 2020년대에 겪기에는 국가의 감시가 일상이었던 7-80년대 사회주의 체제와 매우 유사한 형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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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럭 뱅잉>, 2022년

 

 

"아직까지 완결되지 못한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루마니아에서 자행되었던 학살이나 인종차별, 혹은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제가 영화를 찍었다면, 여전히 제 주위에 그러한 비극들을 초래하는 이슈들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 라두 주데, Seventh Row와 인터뷰 중 

 

 

에미의 불운은 지독한 역사의 굴레로부터 발원한 농담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의 '루드빅'과 비교하자면, 두 남녀 모두 자신을 향한 불행의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과 더불어,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됐을 법한 행동들이었다는 특성을 공유한다. 에미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애초에 흘려보냈어야 할 가장 사적인 순간을 굳이 영상으로 촬영함으로써 학부모들과의 말도 안 통하는 논쟁을 초래한다. 루드빅은 자신보다도 당을 더 우선시하는 여자친구의 행위에 알수 없는 감정과 함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그녀에게 서신으로 남김으로써 당원 자리를 내놓는 비극을 자초한다. 루드빅의 농담이 개인의 사적 영역이 전무하던 그 당시의 무자비한 사회주의 체제에 기원을 두고있다면, 에미의 그것은 기술 발달로 말미암은 사회 네트워크망으로 인해 되려 자유가 박탈 당한 또 다른 사례다. 형태는 각기 다를지 언정 두 남녀 모두 시대적 특성으로 인해 개인의 사적 영역을 강탈 당하는 불행의 내역은 매우 유사하다.


공통분모가 산재한 두 남녀의 웃픈 상황은 종국에 이르러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은폐된 진실을 목도하는 계기로 또한 작용한다. 당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 때문에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회주의 체제의 맹점을 루드빅이 마주하는 한편, 한 학교의 역사 교사이자 한 아이의 엄마,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3가지 정체성을 영위하느라 제때 직면하지 못한 루마니아 사회의 비루함을 에미는 섹스 영상 누출을 기점으로 체감한다. 두 남녀를 좌우하는 사회적 형태는 상반 되었을지라도, 그들의 발목을 잡는 족쇄 모두 유사한 성질을 띤 채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진실을 직면하게끔 이끈다. 여기서 <배드 럭 뱅잉>은 에미의 행적을 반영이라도 하듯 3가지 버전의 결말을 제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2021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을 당시 관객들을 충격과 공포로 밀어넣은 근본적인 요인은 살색으로 점철된 인트로가 아닌, 총 천연색의 엔딩에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각기 다른 투표 결과로 인해 의지와 관계 없이 선생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거나, 어머니로서 앞으로의 시간에 집중하게 되는 상황들이 연이어 등장한 다음, 문제의 세 번째 결말이 등장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전부 다 농담이었으며 진짜 찍고 싶은 결말은 바로 이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챕터명은 지금까지의 말도 안되는 촌극과 비교했을 때 에미의 감행이 결코 부조리하지 않다는 사실상 감독의 천연덕스러운 코멘트를 가리킨다. 자신을 향한 학부모들의 밑도 끝도 없는 야유를 끝내 감내하지 못한 에미가 분노에 찬 사자후와 함께 원더우먼을 연상시키는 코스튬으로 변신한 채 눈 앞의 악당들을 처단한다(진짜다!). 흡사 가면을 쓴 채 남편과의 황홀한 하룻밤을 보낸 영화의 오프닝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에미의 또 다른 코스튬 플레이는 참을 수 없는 허영의 장막을 손수 해치우려는 감독의 처단식이다. 진실의 채찍 대신 포박용 그물로 악당들을 무장 해제시킨 루마니아의 히어로는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방식을 통해 엄징한 벌을 사한다. (감독이 공인한) 마지막 세 번째 결말까지 보고나서 비로소 확인 가능한<배드 럭 뱅잉>의 백미는 개연성이 전무한 영화적 장치가 더 일리있어 보일만큼 부조리의 끝을 선보인 학부모들과의 논쟁을 기반에 두고있다.


개인이 바보 짓을 할때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다수가 같은 짓을 반복하는 순간 이는 지켜야 할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매김한다. 때가 탄 과거의 인습에 입각한 비상식적 행동들이 일상화 된 세상은 날카로운 감각을 소유한 감독같은 사람들에게 결코 감내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역사를 잊는 자에게 미래는 주어지지 않으며, 남을 존중하지 않으려는 자에게 타인의 배려는 전무할 뿐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지극히 당연한 격언마저 당연하다시피 통용되지 않는 영화 속 세상은 급격한 변화로 인해 현재까지도 진통을 앓고 있는 루마니아의 오늘을 총체적으로 은유한다. 변화의 바람이 조금씩 형성되었던 여타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차우세스쿠 처단 직후 체계적인 준비없이 자본주의 체제로 급작스런 진입을 시도한 루마니아는 장기간의 경기 침체로 말미암은 혼란이 지속되면서 얼룩진 과거의 인습을 향한 그리움이 사회 내에서 조금씩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힘을 발휘 중인 정교회 세력(펜데믹 사태 당시 기록한 26%라는 낮은 접종율에는 백신을 불신한 정교회의 입장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참고로 루마니아 정교회는 파시즘 체제를 지지했음을 두 번째 챕터에서 소개된다)과, 자국 역사에 핏빛 얼룩을 남긴 주범들을 향한 루마니아 국민들의 과거를 망각한 향수가 미처 척산되지 못한 과거의 부산물을 대표한다. 특히, 2015년 차우세스쿠 찬양 공무 금지 법안이 통과될 만큼 그를 지지하는 수가 많았으며, 과거 공산주의 정권을 배척했다는 명목 하에 유대인 학살을 종용한 전범 이력에도 불구하고 2006년 정부에 의해 명예가 복권된 안토네스쿠의 사례는, 비단 루마니아에 국한되지 않는 사실임을 관객들에게 시사한다. 그 누구도 과거를 망각하는 행위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만 개별적으로 남겨둔 채, 정작 잔존해야 할 시간을 소멸시키는 부조리한 행위가 전 세계적으로 여전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 또한 없다.


비합리적인 논리를 고수하는 인간 군상과 비교했을 때 영화의 인트로는 더할 나위 없이 대수롭지 않음을 실감시킨다. 인종(집시) 혐오와 자국 역사의 무지, 그리고 개인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학부모들의 파시즘에 준하는 언행은 단순히 남편과 뜨거운 하룻밤만 보낸 에미와 동일 선상에 위치시키는 것 자체가 결례일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두 주데 감독이 묘사한 영화 속 불운은 잔혹한 인과에 있다. 에미가 겪는 불행은 불특정 다수에게 나신이 누출된 것이 아닌, 그로인해 몰지각한 이들과 엮이는 순간 비로소 성사된다. 시대가 바뀌고 체제가 교체되는 와중에도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다수의 불합리한 처사는 형태를 달리한 채 현재까지도 철저히 생존 중이다. 이는, 2018년에 진행된 동성결혼 금지 투표와 3-40년대에 발생했던 유대인 차별 투표와 유사형식을 지적한 라두 주데 감독의 인터뷰 코멘트와 함께 영화 속 불행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타이틀인 불운Bad Luck의 핵심은 과거의 굴레로부터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며, 해결되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미완에 머물고 있는 역사의 정체停滯다.


결국,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주범들에게 가하는 에미의 학살(?)은 극 중 불행의 맥락과 비교했을 때 되려 설득력 있는 행위일 수 밖에 없다. 사전적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두 번째 챕터가 예고했듯이, <배드 럭 뱅잉>에서는 기존의 판단 기준으로 대상의 타당함과 합당함을 판가름 할 수 있는 효력이 전무하다. 북미 배급사를 아연실색한 인트로의 하드코어한 성적 묘사와, 개연성이라고는 눈에 씻고 찾아 볼 수 없는 에미의 마지막 코스튬 플레이보다,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배려 따윈 전무한 그들의 몰지각한 주둥이가 상식적으로 훨씬 말도 안 된다는 영화의 입장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마도, 지독한 농담이 만들어낸 온갖 불행이 충돌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대폭발의 현장에서, 단언컨데 이보다 더 사필귀정을 충족시키는 윤리적인 마무리는 없다고 감독은 확신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게 농담이라는 전제 하에 말이다.

 

 

 

김현준_컬쳐.jpg

 

 

[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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