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감정의 물성 [도서]

글 입력 2022.07.06 18:29
댓글 1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웬만하면 도서관을 이용하기 때문에 꼭 구입해야 할 책이 있을 때만 서점으로 향한다. 즉흥적으로 몇 권 읽어보고 이 책 마음에 든다 한 번 사봐야지라는 마음으로 책을 사는 경우보다는 항상 가득 차 있는 핸드폰 속 메모장에 적어둔 책을 구입한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읽어보고 싶어진 책들 사이에서 혹은 이렇게 알게 된 작가님들 중 좋아하는 작가님의 모든 책 읽어보기 (다 읽었다면 신작을 기다린다) 등등으로 고민 없이 한두 권을 선택해 서점을 나선다.

 

이런 성격 탓에 베스트셀러 구역에는 큰 감흥이 없다. 현재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는 책 모음들이겠지만 그중에 내가 궁금한 책이 없다면 그 구역의 존재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내가 사려고 하는 책이 그 구역에 있는 경우도 있지만, 베스트셀러 근처에서 맴돌며 이 책 저 책 조금씩 펼쳐보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친구들이 요즘 이 책 유명하던데 혹시 읽어봤어?라는 질문에 안 읽어봤다는 대답을 주로 하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세랑 작가님의 책을 구입하러 간 서점에서 두 명의 남자가 베스트셀러 구역 앞에서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 저 책 재밌더라. 다음 책으로 추천할까 봐.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응. 과학 용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나는 SF 장르를 좋아하기도 하고 작가가 글을 잘 써서 재밌게 읽었어.

- 아직 못 읽어봤는데 다들 재밌다고 하더라. 표지가 예쁘네.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던 독서모임 대학생들이었다.

 

그 이야기에 괜히 시선이 꽂혔다. 가끔 서점을 올 때마다 베스트셀러 구역에 항상 자리 잡고 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표지였다. 정말 표지가 예쁘네. 저 책이 그렇게 재밌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 남학생들이 사라지고 나서 사려던 책을 잠시 내려두고 그 책을 펼쳐봤다. 작가의 말을 훑어보고 단편 모음집이라는 것과 이과 출신 작가라는 것, 모든 단편이 과학과 관련된 소설이라는 정보를 얻고 다시 제자리에 잘 내려놓은 뒤 사려던 책을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반 년이 흐른 어느 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구입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구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던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재밌었고, 역시 독서모임 대학생들은 옳다는 생각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총 7편의 단편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던 <감정의 물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131.png


 

평범한 문구류 회사 이모셔널 솔리드가 1년 만에 야심 차게 내놓은 제품인 ‘감성의 물성’ 라인들을 바라보는 주인공 정하의 시점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사실 정하는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요즘 큰 관심을 끌고 있다는 이 제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들을수록 의심스럽고 말도 안 되는 유사과학 제품에 흥미를 가지고 사들이는 회사 동료들의 이야기에 큰 한숨이 나올 뿐이지만 그들에게 크게 터치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현재 정하의 머릿속은 오랜 연인인 강보현과의 관계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10년 가까이 지속된 연인과의 관계는 요 몇 주간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보현의 강한 의지에 따라 결혼은 하지 않은 채 이어졌던 관계는 보수적인 가풍을 가진 그녀의 가족들의 압박으로 인해 점차 서로에게 지쳐가기 시작했고, 이 감정적인 피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하가 조심스레 내밀었던 (하지만 현명한 해결법이라 보기 어려운) 타협책은 이 냉전기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근 2주 만에 보현과 대화를 하기 위해 보현의 집안으로 들어선 정하는 감정의 물성 우울체를 손에 쥐고 있는 보현을 마주하게 되고, 집안을 가득 채운 우울체의 냄새와 그녀의 숨 막히는 감정에 어지러움을 느낀다. 그날 이후, 정하는 한숨 쉬며 넘겼던 감정의 물성에 대한 다양한 의문이 생기고 그 의문의 답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

 

시작부터 정하는 감정의 물성을 ‘그 이상한 상품’이라고 표현한다. 이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생각에 대한 정하의 의문은 어느 지점에서는 나와 일치했다. 나 또한 긍정적인 감정 라인들을 구입해 소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히 구입할 수 있다고 공감이 됐다. 정하의 말마따나 플라시보 효과에 의존하여 위안을 얻으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긍정적인 감정을 가질 수 있는 물성을 거부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감정을 인위적으로 가지는 것에 대한 꺼림칙한 부분만 해소된다면 누구나 한두 개쯤 집에 두고 싶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정하와 나의 의문을 들게 하는 건 사실 부정적인 감정 라인이었다.


부정적인 감정 라인들, 예를 들면 증오, 우울, 슬픔, 분노를 일으키는 물건을 구입해 소유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약간의 이해는 된다. 하지만 동시에 소설 속 정하처럼 왜 그걸 소유하고자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비용을 지급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손에 쥐고 싶은 이유가 뭘까. 이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그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막연한” 어느 정도의 이해만 될 뿐이다. 이러한 막연한 이해만 가진 반쪽짜리 공감은 정하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작은 이해들을 불러일으켜 완전한 공감으로 채워나가졌다.

 


[크기변환]19930023 (1).JPG

 

 

나는 이미 어떠한 감정의 물성을 내 손안에 쥐고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지나간 추억들을 필름 인화나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보관하고, 어떤 날의 기분을 손수 일기장에 써서 언제든지 펼쳐 볼 수 있게 간직하려 들고, 현재 내 감정을 더 크게 느끼고 감각하고 싶어 한다. 이 모든 순간과 감정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간에 말이다.

 

정하의 후배 유진이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라는 말을 하는 순간 나의 막연한 이해는 이것으로부터 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들은 항상 내 손에 잡히지 않은 채 언젠가 지나갈, 내 곁에 존재한 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겨질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계속 그 자리에 실재하는 무언가로 존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어떤 문제들은 피할 수가 없어. 고체보다는 기체에 가깝지. 무정형의 공기 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짓눌려. 나는 감정에 통제받는 존재일까? 아니면 지배하는 존재일까? 나는 허공중에 존재하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래. 네 말대로 이것들은 그냥 플라시보이거나, 집단 환각일 거야. 나도 알아. 하지만 고통의 입자들은 산산이 흩어져 내 폐 속으로 들어오겠지. 이 환각이 끝나면."

 

 

우울할 때 일부러 우울한 영화를 찾아보고 우울한 노래를 들은 적이 있는가? 화가 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더더욱 화가 나는 상황으로 스스로 깊이 빠져들어 본 적이 있는가? 실생활에서 일어나면 기겁할 상황들이 가득한 공포물을 때때로 찾아보지는 않는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분명히 해당되는 것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감정들이 찾아오는 순간들은 모두 예기치 못한 높은 파도처럼 다가온다. 무방비한 나는 몰아치는 파도를 무력하게 맞이할 수밖에 없고,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짓눌러져 빠져나갈 틈을 뒤늦게 찾아보지만 이미 휩쓸리고 있는 나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형체 없는 괴로움이 나를 둘러싸게 되면 무엇이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이 상황 자체에 답답함을 느낀다. 실체가 없는 무언가는 실체를 가진 나에게 한없이 두려운 존재일 뿐이다.

 

그럴 때 오히려 앞서 말한 상황들처럼 그 감정에 더 깊이 파고들게 된다. 빠져나올 틈을 찾으며 열심히 장애물을 찾아내다 힘이 빠졌을 때 드는 무력감은 나를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에 좌절하게 만들지만, 몸에 힘을 빼고 감정의 바닥까지 다다랐을 때 드는 고요함은 이제 눈을 뜨고 위로 올라가야겠다는 단호한 용기를 가지게 만든다.

 

실체가 없기에 눈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고 빠져나가야 할 틈조차 없다. 그저 끝없는 허공일지라도 조금씩 올라가다 보면 나의 지나간 감정의 물성들이 내 발밑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송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1
  •  
  • 이름
    • 정세랑 작가님 추천 책도 궁금해요!!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