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좋은’ 거짓말은 ‘좋은’ 작별을 만들 수 있을까? – 페어웰 [영화]

작별이라는 난제를 풀어가는 우리들에게
글 입력 2022.06.2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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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헤어짐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고 했다.

아니다, 헤어짐에 익숙해지는 사람은 없다.

 

– JTBC 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中

 

 

헤어짐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흔치 않은 일 중 하나다.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과 생과 사의 경계에서 영원한 이별을 해야하는 경우라면 결코 익숙해질 수 없고,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힘든 일일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것을 알지만, ‘죽음’이라는 ‘영원한 헤어짐’은 늘 갑작스럽고 두렵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거짓말과 상상들로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고 포장하며 그 이후의 세계를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다가올 작별의 시간을 멈출 수는 없고 우리는 결국 영원한 이별을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작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남은 시간을 ‘잘’ 보내고, 이 시간의 끝을 ‘잘’ 마주할 수 있을까?

 

룰루 왕 감독의 영화 <페어웰(The Farewell, 2019)>은 이 질문에 대한 어느 가족의 ‘답’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 답은 룰루 왕 감독이 동참했던 ‘실제 거짓말’에 기반을 하고 있기도 하다.

 

 

[꾸미기][크기변환]페어웰 포스터.jpg

 

 

 

‘좋은’ 거짓말은 ‘좋은’ 작별을 만들 수 있을까?


 

영화 <페어웰>은 가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했던 거짓말에서 시작한다. 뉴욕에 사는 ‘빌리’는 할머니와 통화하며 사소한 거짓말들로 잘 지내고 있다고 할머니를 안심시키며, 빌리의 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간 빌리의 이모 할머니는 빌리의 할머니가 폐암 말기를 진단받았다는 사실을 숨긴다. 그리고 일본과 미국, 중국에 각각 흩어져 살던 친척들은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사촌의 결혼식을 핑계로 할머니 댁에 모두 모인다.

 

빌리는 그래도 할머니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다른 가족과 친척들은 할머니의 시한부 선고 소식을 할머니에게 숨기기 위해 모두 거짓말에 동참한다. 친척들은 이것이 할머니를 ‘위한’ 일이며, 중국 혹은 동양의 문화에서는 이것이 맞는 일이라고 이야기 한다. ‘사람을 죽게 하는 건 암이 아니라 공포’라는 말을 하며 말이다.



"보통 중국 가정에서는 이런 경우 말씀 안 드려요.

우리 할머니도 암이셨는데 말씀 안 드렸어요."

 

"거짓말해도 되는 거에요?"

 

"좋은 의도로 하는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거짓말은 거짓말이죠."

 

"선의의 거짓말이에요."

 

 

심지어 할머니를 진단했던 젊은 의사조차 빌리에게 대부분의 중국 가정에서는 이런 경우 빌리의 가족들처럼 거짓말을 하며, 이러한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빌리의 말처럼 ‘선의의 거짓말’도 결국 ‘거짓말’이다. ‘좋은’ 의도로 하는 이러한 거짓말은 진짜 그 의도대로 ‘좋은’ 작별을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이 정말 빌리의 할머니를 위한 일일까?

 

개인적으로는 빌리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빌리처럼 할머니에게 당신의 상황을 숨기고 거짓말하는 것에 반대했을 것 같다. 할머니께서 지각능력이 부족한 상태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일을 스스로가 알 수 없다는 건 맞지 않는 것 같다. 또 영화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이러한 거짓말이 어쩌면 굉장히 조금 남았을 지 모르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할머니 스스로 결정하고 준비할 기회마저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빌리의 큰아버지는 할머니의 상태를 그래도 할머니께 말씀드려야 한다는 빌리에게, 할머니를 속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책임감 없는’ 사람이라고, 미국에서 자라서 중국 혹은 동양의 문화를 잘 모르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빌리의 아버지 역시 가족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며 할머니에게 사실을 말씀드릴 수 없다고 한다.


 

"할머니한테 말씀드릴 거예요?"

 

"난 못 한다. 가족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어."

 

"빌리, 네가 알아야 할 게 있다. 넌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살았잖아.

내 인생은 내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동양은 서양하고 달라.

동양에선 한 사람의 삶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야.

가족에 속해 있고 사회에 속해 있지."

 

 

물론 빌리의 큰아버지가 말하는 ‘문화 차이’가 완전히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고, 빌리 친척들의 마음 또한 완전히 공감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은 한 사람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대한 일인데,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이것과 관련된 일을 당사자에게는 밝히지 조차 않고,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정말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긴 어렵다. 어쩌면 할머니는 소중한 사람들과 작별을 준비할 시간을 가족들의 거짓말로 인해서 잃어버렸을 지도 모르고, 죽음에 다가가는 엄청난 신체적 고통을 그 원인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견뎌내야 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빌리 친척들의 함께 한 거짓말은 빌리 할머니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 역시 소중한 사람과의 작별을 마주하고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에, 또 걱정 없이 여느 때와 같은 할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을 좀 더 남기고 싶기에 할머니의 시한부 선고를 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할머니에게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빌리가 책임감이 없거나 중국 문화를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할머니에게 사실을 숨긴다고 해도 이 역시 ‘잘못된’ 작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꾸미기][크기변환]페어웰 스틸컷_병원에서 나오는 가족들.jpg

 

 

그러니 결국 애초에 ‘좋은 작별’이란 존재할 수 없고, 우리는 작별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이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마주 해나갈 뿐이다. 도저히 풀고 싶지 않았던 문제의 답안을 어쩔 수 없이 적어내야 하듯, 각자가 생각하는 나름의 답을 따라서 말이다. 이러한 답에는 정말 극단적인 오답이 있을지언정 정답은 없다.

 

따라서 ‘좋은’ 거짓말은 ‘좋은’ 작별로 향하는 ‘정답’이나 ‘해설’이 아니라, 작별이라는 난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내놓는 수많은 답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이 답으로 무엇을 적어 내든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마주해야 하는 우리가 빌리의 가족들처럼 적어도 답을 함께 고민하고 그 무게를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이들 곁에 있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답이 누군가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고 비난받지는 않기를 바라본다.

 

 

 

문화와 가족의 경계에서 ‘나’를 제대로 마주하기


 

빌리는 중국어도 서툴고 친척들이 이야기하는 중국 문화나 가치관과도 잘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중국에서 보낸 여름 방학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며 이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고, 중국에 있는 빌리의 할머니는 빌리의 ‘고향’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할 때, 어떤 국가 혹은 문화권에 소속감을 느끼는 요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러한 요인에는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 속에 더 오랜 기간 살아 왔는지도 포함되겠지만, 자신에게 ‘돌아갈 곳’, ‘돌아가고 싶은 곳’이 되어주는 기억 혹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결국 자신이 속한 곳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빌리에게는 그 곳이 ‘할머니가 있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빌리는 익숙하지도 않고 잘 맞지도 않지만, 할머니가 이야기한 ‘중국의 문화’를 최대한 따르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할머니는 미국, 일본 등 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가족들에게 ‘너희들은 중국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할머니에게 빌리의 아버지는 자신은 '미국 여권을 갖고 다니는 미국인'이라고 말하지만, 빌리의 큰아버지는 국적이나 사는 곳과 상관없이 자신은 언제나 중국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단단하게 자리잡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빌리의 친척들의 삶과 가치관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할아버지 산소를 들른 할머니가 자신은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이야기하자, 할머니의 조카는 ‘우리는 중국이니까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의 의견에 앞서 스스로 속한 문화를 따라야 한다는 식의 의견이 빌리 친척들에게서 나올 때마다,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빌리의 친척들처럼 개인보다 그들이 소속된 가족이나 사회 등의 집단을 중시하는 것 또한 문화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같은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공유하는 가치보다 개인의 선택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것이 필요할 것인지와 같은 질문에 답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영화 <페어웰>도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개인이 속해 있는 혹은 소속감을 느끼는 문화나 집단과 그 개인 간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의 인물들도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도 다양한 상황과 정도의 스펙트럼 안에서 이 관계의 균형을 조율해 나간다.

 

빌리의 친척들은 너무나 명확하게 그들 안에 자리 잡은 중국에 대한 소속감과 중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빌리는 ‘고향’의 원형으로서 과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었던 곳, 즉 ‘중국’에 향수를 느낀다. 또한 이의 연장선상에서 빌리는 익숙하지 않고 본인의 가치관에는 잘 맞지 않더라도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사실 충분히 민족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 다소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빌리의 행동과 룰루 왕 감독의 연출 의도는 그들이 이민자 혹은 이민자 2세로 살아오며 느꼈을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소외감, 그리고 그들에게 ‘할머니’라는 존재의 의미를 염두한 채로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좋은 기억이 정말 거의 없지만 할머니 댁에서 보낸 여름은 좋았어.

마당 있는 집에서 할아버지랑 잠자리도 잡았어. 그런데 갑자기 미국으로 간거야.

모든게 낯설고 아는 사람은 없고 딸랑 우리 셋뿐이었어.

(…)

난 늘 혼란스럽고 두려웠어.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해줬으니까.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편찮으시단 얘기도 안 해줬잖아.

내 입장에선 할아버지가…갑자기 사라진 기분이었어. 장례식에도 안 데려가고.”

 

 “학기중이었잖아. 수업 빠지게 할 순 없었어. 널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거야.“

 

 “결국 한 번도 못 만났잖아. 중국에 올 때마다 할아버진 안 계셨고

나중엔 돌아가셨어. 집도 없어졌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베이징의 우리 집도 없어졌고, 곧 할머니도 돌아가시겠지.”

 

 

‘늘 혼란스럽고 두려웠다’는 빌리의 말을 들으면 우리가 소위 ‘뿌리’라고 부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지하는 배경이 되는 그것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빌리는 계속 혼란스럽고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런 빌리에게 어린 시절 중국에서 보냈던 소중한 추억과 그 추억이 서린 장소, 할아버지 할머니의 존재는 이러한 ‘뿌리’의 증명이었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단서들과 자신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꾸미기][크기변환]페어웰 스틸컷_빌리와 할머니.jpg

 

 

그런데 이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할머니의 존재마저 없어질 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빌리가 느꼈을 감정은 공허함과 두려움, 슬픔과 혼란스러움 등이 얽히고 설킨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빌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그것을 확실하게 붙잡으려고 한다. 이를 위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소위 말하는 ‘뿌리’라고 하는 것이 꼭 가족이나 국가여야 한다는 데 동의하진 않는다. 가족이나 국가가 개인의 가치관과 삶을 결정하는 데 가지는 비중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일 수 있다. 그러니 결국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 자신의 가치관과 그 가치관이 만들어진 배경에 속해 있는 여러 요인들일 것이다. 다만,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대부분 태어날 때부터 이미 소속된 가족이나 국가 등과 같은 집단과의 연결이 많은 경우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인지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빌리의 할머니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빌리의 가족들이 속해 있는 다양한 문화나 국가 등의 배경을 모두 하나의 ‘뿌리’로 포용해 낸다. 이를 통해 어떤 가족 구성원은 명확한 정체성을 갖게 되지만, 이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며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렇게 소위 ‘뿌리’라고 하는 것이 자신의 그림자가 되든 버팀목이 되든, 혹은 그것을 붙잡지 못한 채 부유하게 되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 간의 관계에서 균형을 잡아나가는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통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때로는 받아들이고 때로는 비판적인 시선에서 보고 판단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더 알아가고, 어떤 집단이나 역사의 흐름 속에 우리의 존재를 인지하며 그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이것이 오랜 기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존재로 살아온 인간이 성숙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면, 소중한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든든한 힘이 되어줄 것이다. 할머니가 빌리에게 가르쳐준 기합이 영화의 마지막 빌리의 기합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문화와 가족의 경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수많은 '빌리'들도 자신과 연결된 존재로부터 지지받을 수 있기를,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 단단히 바로 서기까지 너무 많이 외롭거나 상처 받지는 않기를 바라본다.

 

 

 

김효중 태그 .jpg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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