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금쪽같은 내 새끼'는 없어도

글 입력 2022.06.20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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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이하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본 적이 있는지. 아마 클립 영상 하나라도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세대를 불문하고 많은 시청자의 눈물 도둑으로 자리매김한 <금쪽같은 내 새끼>는 오은영 박사와 고정 패널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육아 개선 예능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와 같은 육아 예능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전에도 있었고, 최근에도 <고딩 엄빠> 등 새로운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금쪽같은 내 새끼>는 단 한 가지가 새로웠다. 바로 아이의 문제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먼 옛날까지 가지 않더라도, 아이의 문제 행동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싸늘한 편이었다. ‘이래서 아이를 낳기 싫은 것이다.’부터, ‘역시 체벌은 필요한 것이다.’까지. 아이의 행동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반응이 주류였다. 대체로 가족 관계와 아이의 행동을 개선하기 위해 출연을 결심하는 양육자들은 방송상으로 심각한 폭력을 저지르지도 않는 편이고, 방송을 통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러니 대중의 눈에는 이 모습이 ‘평범한 양육자 아래에서 자란 별난 아이가 가족의 분위기를 해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금쪽같은 내 새끼>의 방영 후, 사람들은 놀랍도록 빠르게 아이에게 공감하기 시작했다. 오은영 박사가 적극적이고 단호한 태도로 아이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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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금쪽같은 내 새끼> 방영분)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민하게 판단한다. 아이들은 자신과 양육자가 가진 문제점을 꽤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말과 행동으로 표현도 할 줄 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적확한 언어로 풀어내서 사람들을 설득하기에는 어려운 위치에 있다. 오은영 박사는 이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분석해 가족이 가진 문제점을 간파하고, 그것을 어른의 언어로 전달한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던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행동을 하나의 표현 방법으로 이해하게 된다.


결국 아이와 어른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다. 둘 사이에 좋은 통역사만 있다면 해결되는. 그러나 오은영 박사는 한 명이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오은영 박사와 안면조차 없다. 그러니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고, 급기야는 아예 ‘아이와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아이를 만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다. 그것이 ‘노 키즈존(No Kids Zo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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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노 키즈존' 카페 안내문_출처 경남도민일보)


 

대부분의 노 키즈존이 내놓는 이유는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우리는 계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유리 식기를 쓰기 때문에’, ‘뜨거운 음료를 취급하기 때문에’, ‘다른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서’. 아이들이 다치고 가게가 시끄러워지면 곤란하기 때문에 출입을 제한하겠다는 말을 친절하게 돌려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음료를 엎지르고 다치는 것은 어른들도 할 수 있는 일이며, 모든 아이가 통제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아이들을 오지 말라고 하는 모든 이유 중 아이가 악의를 가지고 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이것은 아이가 아직 신체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해서, 어른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다. 피곤한 어른들은 그냥 아이들만 오지 않으면 편리해진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이들의 판단력은 앞서 말했듯 매우 예민하다. 친절한 어조로 가려둔 단호한 거부를 금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아이들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함을 배워가는 것이다.


우리는 ‘내 아이’가 없더라도,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아이의 양육에 참여해야만 한다. 그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다. 이유식을 만들거나 주말에 놀이동산에 같이 가지는 않더라도, 아이들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건강한 가치관을 갖고 자랄 수 있도록 최소한의 참여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에 기대어 살고 있기 때문에. 오은영 박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순 없다. 스스로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오은영 박사는 없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이라는 나쁘지 않은 통역사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서 아이의 진심에 공감하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른들은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 단지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을 뿐.

 

 

[김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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